|| '''{{{#000000 박정일 미카엘 주교의 역임 직책}}}'''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천주교 제주교구장)] ---- [include(틀:역대 천주교 전주교구장)] ---- [include(틀:역대 천주교 마산교구장)] ---- [include(틀:마산교구의 주교단)] ---- [include(틀:역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 }}} || ---- ||<-3> '''2대 [[천주교 제주교구|{{{#000000 천주교 제주교구}}}]]장'''[br]'''제6대 [[천주교 전주교구|{{{#000000 천주교 전주교구}}}]]장''' [br]'''제3대 [[천주교 마산교구|{{{#000000 천주교 마산교구}}}]]장''' [br] '''{{{+1 박정일 미카엘}}}'''[br] '''朴正一''' | '''Michael Pak Jeong-il''' || ||<-3> [[파일:external/cathms.kr/87c00604db0effdc75ac156532ece244.gif|width=100%]] || ||<|2> '''출생''' ||<-2>[[1926년]] [[12월 28일]] ([age(1926-12-28)]세) || ||<-2>[[평안남도]] [[평원군(평안남도)|평원군]] || || '''국적''' ||<-2>[[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28]] || ||<|3> '''재임기간''' ||[[천주교 제주교구|제주교구]]장 ||[[1977년]] [[5월 31일]] ~ [[1982년]] [[6월 23일]] || ||[[천주교 전주교구|전주교구]]장 ||[[1982년]] [[6월 24일]] ~ [[1988년]] [[12월 27일]] || ||[[천주교 마산교구|마산교구]]장 ||[[1988년]] [[12월 28일]] ~ [[2002년]] [[11월 11일]] || ||<-3> [[파일:external/cathms.kr/e42a505c1ecfa4402bfc102b20878abb.gif]] || ||<-3> '''충성과 온유 [br] (In Fide Et lenitate)''' {{{-1 ([[마산교구]]장 취임 이후의 문장)}}}[* [[집회서]] 45장 4절. 박 주교는 교구를 옮길 때마다 새로 문장을 만들었고, 3개의 문장은 모두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강찬균 공예가가 그렸다. 현재의 3번째 문장은 제주교구장 시절(돛단배)과 전주교구장 시절(태극문양 합죽선)에 쓰던 문장을 합쳐서 만들었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1926년]] [[12월 28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4남 3녀 중 셋째로 출생. [[대한민국]] [[가톨릭]] 교회의 제6대 [[전주교구]]장 및 제3대 [[마산교구]]장, 제2대 [[제주교구]]장. 그리고 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1999~2002). [[세례명]]은 '[[미카엘]]'이다. '''역대 [[한국 가톨릭]] 교구장 주교들 중 유일하게 온전한 3개 교구의 교구장을 역임하였다.''' [* 자세한 내용은 [[주교]] 문서의 [[주교#한국 주교들의 여러 기록|한국 주교들의 여러 기록]] 항목 참고.] == 생애 == 무종교인 집안에서 자랐고, 20대 초반에 [[보통학교]] [[교사]]로 잠깐 일했다가, 1945년에 만 22살의 나이로 덕원신학교에 입학한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박 주교는 무신론자였던 어머님과 무려 3년여를 싸웠다고 한다. 하지만, 덕원신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덕원자치수도원|원산 베네딕토회 수도원]]과 덕원신학교가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어 [[평양교구]]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교구의 교구장이었던 [[홍용호]] 주교까지 인민군에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목숨을 걸고 월남해 서울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부모님과 세 여동생들도 월남에 성공했지만, 나머지 가족들은 이북에 남아 생사를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고. 부산으로 임시로 이전한 [[성신교정|서울 대신학교]]에서 당시 학장 신부가 박 주교와 동기들에게 로마 유학을 명했고, 그들은 신학 공부를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제대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이국 땅에서의 신학생 생활은 고되었지만, 박 주교는 부모님이 [[부산]]에서 [[세례성사]]를 받으셨다는 소식과 여동생이 편지로 전해주는 소식들을 듣고, 이를 위안 삼으며 버텨냈다. 1958년에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고, 1962년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종교사회학 석사를 취득한 박 주교는 종교사회학 박사과정까지 공부하고 싶어했지만, 당시 [[천주교 부산교구|부산교구]] [[최재선]] 주교가 "교구에 사제가 부족하니 와서 도와달라."고 귀국을 명하여 본격적인 사목 일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부산교구에서 [[마산교구]]가 분리되자 마산교구 소속이 되었고, 주교 수품 직전에는 대건신학대학(현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잠시 교수신부로 일하기도 했다. 1977년 4월 15일 제주지목구의 교구 승격에 따라 제2대 [[제주교구]]장에 임명되어, 1977년 5월 31일 주교 서품식 및 교구장 착좌식을 했으며, 1982년 6월 24일 전주교구장을 거쳐, 1988년 12월 28일부터 마산교구 제3대 교구장을 역임한 후 2002년 11월 11일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시복시성 특별위원장을 10년 넘게 맡으며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의 시복에 큰 역할을 했다. 2021년 기준 만 94세의 고령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S47FHufgQJs|2021년 3월 14일 선종한]] [[이문희]] 대주교를 위한 [[죽은 이를 위한 미사|미사]]에서는 직접 강론을 담당하였다. == 여담 == [[파일:박정일 주교님 문장(제주교구).jpg]] [[파일:박정일 주교님 문장(전주교구).jpg]] 제주교구 교구장 시절의 문장{{{-1 (왼쪽)}}}과 전주교구 교구장 시절의 문장{{{-1 (오른쪽)}}}은 각각 위와 같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박정일, version=21)] [[분류:평원군 출신 인물]] [[분류: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 출신]] [[분류: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 출신]] [[분류:실향민]] [[분류:천주교 제주교구장]] [[분류:천주교 전주교구장]] [[분류:천주교 마산교구장]] [[분류:1926년 출생]] [[분류:2002년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