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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희철]]이 졸업한 [[1996 대학농구연맹전|1996년도]]에도 박훈근은 대부분 벤치에서 시간을 보냈고, 하반기들어선 신입생 [[이규섭]]에게도 기회를 뺏기는 모습을 보였다. 1996년 창단한 [[창원 LG 세이커스|LG 반도체 농구단]]이 신생팀 연고지명 대학으로 고려대를 택하면서[* 당연하게도 국가대표 슈터 [[양희승]]을 염두해 둔 선택이었다.] 졸업 직후 박훈근은 [[양희승]], [[박규현]], [[박재헌]]과 함께 신생팀 LG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 프로 시절 === ==== 창원 LG 세이커스 (1997~2000) ====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 첫시즌(97-98) 개막을 앞두고, 거액의 계약금을 주고 야심차게 영입한 루키 [[양희승]]이 아킬레스건 파열로 인해 뛰어보지도 못하고 시즌아웃 판정을 받게 되었고, 고려대 출신이라지만 대학 4년내내 후보였던 선수만 모인 창원 LG는 같은 신생팀 [[서울 SK 나이츠|청주 SK]]와 더불어 유력한 꼴찌후보였다. 하지만 막상 시즌이 개막하자 고대 후보출신 3박이 주축이 된 창원 LG는 당시까지만 해도 신선한 농구란 소리를 듣던 [[이충희]] 감독의 원조 "수비농구"를 선보이며 시즌 내내 돌풍을 일으켰고, [[이상민(농구)|이상민]]-[[조니 맥도웰]] 콤비의 [[전주 KCC 이지스|대전 현대 다이냇]]에 이어 정규리그 2위에 오르며 플옵 4강에 직행하는 기염을 토한다.[* 하지만 플옵 4강에서 [[허재]]-[[클리프 리드]]가 대폭발한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부산 기아]]에 1승 3패로 패하며 돌풍은 다소 쉽게 사그러들었다.] 박훈근은 비록 여전히 식스맨이긴 했지만 이전과는 360도 달라진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를 보여주며 동문선배 [[이충희]] 감독의 신뢰를 받았고, 출전할때마다 KBL 수위권의 토종빅맨으로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98-99 시즌 주전센터 [[박재헌]]이 무릎부상으로 골골댄 탓에 박훈근은 출장시간이 크게 늘며[* 97-98시즌: 평균 15분 39초 → 98-99시즌: 평균 26분 57초] 팀의 주전 파워 포워드 자리를 차지했고, 빅맨 파트너 아미누 팀버레이크(202cm)의 다소 부족한 존재감에도 불구, 한시즌 동안 팀 골밑을 잘 지켜내며 9.4득점-3.3리바-1.2어시의 괜찮은 기록을 남겼고, 팀을 2년연속 플레이오프로 이끈다. [[원주 동부 프로미|원주 나래 블루버드]]와 만난 6강 플레이오프에서 박훈근은 3경기 평균 17득점을 올리며 원주 나래를 괴롭혔지만, 팀의 에이스 [[버나드 블런트]]가 침묵한데다 또다시 폭발한 [[허재]](1차전에서 30득점 7어시)를 막지 못하면서 3연패로 물러나고 만다. 어쨌든 박훈근의 활약은 탈락한 LG에게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었고, LG 팬들도 장차 박훈근이 팀을 지탱할 토종 에이스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 99-00 시즌 박훈근은 완벽히 주전으로 올라서며 시즌 전경기에 출장하지만, 이 시즌엔 그 유명한 "[[버나드 블런트]] 야반도주 사건"이 일어나 창원 LG의 시즌 외인선수 플랜이 무너져버렸고, 대체로 들어온 외인 듀오 쉔드릭 다운스(193cm, SG)와 마일로 브룩스(202cm, C)는 너무도 평범했다. 박훈근은 평균 '''11.8득점-3.7리바-2.8어시'''에 경기당 0.7개의 3점슛을 꽂으며(3점슛률 37.1%) 대학선배 [[전희철]]의 하위호환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한팀의 주전 [[파워 포워드]]로 자리하기엔 다소 부족한 영향력이었고, 팀은 1게임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내며 창원 LG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한 박훈근이었지만, 시즌 종료 후 새로 부임한 [[김태환(농구)|김태환]] 감독은 박훈근을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대구 동양 오리온스]]로 트레이드시키고 중앙대 감독 시절 제자였던 슈터 [[조우현]]을 영입한다.[* 1:2 트레이드였다. 대구 동양 get: 박훈근 ↔ 창원 LG get: [[조우현]], 이현주] ====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대구 동양 오리온스]] (2000~2003) ==== 지난 두 시즌 동안 주전 빅맨으로 활약한 박훈근이었지만, 새로 이적한 대구 동양에는 익숙한 그 이름, [[전희철]]이 있었고, 박훈근은 고려대 시절에 이어 또다시 1년선배 전희철의 백업이 되고 만다. 하지만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보였던 전희철도 이 때쯤부터 서서히 전성기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00-01 시즌엔 [[김병철(농구)|김병철]]-[[전희철]] 두 간판스타의 불협화음 속에 팀은 시즌 최하위로 추락했다. 이 때쯤부턴 전희철도 박훈근도 외인들을 상대로 골밑을 지키기 버거워진 탓에 점차 외곽으로 밀려나 [[스몰 포워드|3번]] 자리에서 뛰어야했는데, 아직 3번이 익숙하지 않았던 박훈근은 아직 3점슛은 쓸만했던 전희철은 물론 중고신인 [[박재일]]에게도 밀리는 신세였다. 01-02 시즌 매직키드 [[김승현(농구)|김승현]]와 1순위 외인 [[마르커스 힉스]]가 입단하면서 대구 동양은 일약 정규리그 1위, 그리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창단 첫 우승을 달성한다. 시즌 내내 주전라인업([[김승현(농구)|김승현]]-[[김병철(농구)|김병철]]-[[전희철]]-[[마르커스 힉스]]-[[라이언 페리맨]])이 확고부동했던 탓에 박훈근은 [[박재일]], [[위성우]] 등과 함께 여전히 식스맨이었지만, 시즌 내내 팀내 자신의 비중이 줄어드는게 불만이었던 [[전희철]]이 본인 요청으로 [[전주 KCC 이지스]]로 트레이드되는 바람에, 박훈근은 02-03 시즌 주전 3번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갑작스레 주전으로 올라선 박훈근은 비시즌동안 대구 동양과 1억 5천만원에 FA 재계약을 맺는다. 02-03 시즌 초반 박훈근은 [[전희철]]이 잊혀질만큼 인상적인 활약들을 펼치며 디펜딩 챔피언의 주전 멤버로 손색없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갑작스런 부상을 당하며 약 한달간 결장해야만 했고, 이틈을 타 [[박재일]]이 맹활약하며 주전 3번자리를 냉큼 차지하게 된다. 다시 식스맨으로 돌아간 박훈근은 팀의 2년연속 정규리그 우승 및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기여하지만, 식스맨 치곤 높은 연봉 탓에 시즌 종료 후 [[인천 전자랜드]]의 [[이은호]]와 1:1 트레이드로 이적한다. ====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2003~2006) ==== 인천 전자랜드에서 박훈근은 주요 식스맨이자 2쿼터 전용 토종 빅맨으로 나서며 03-04 시즌 인천 전자랜드의 4강 돌풍에 기여한다.(이때 주전멤버는 [[최명도]]-[[조동현(농구)|조동현]]-[[문경은]]-[[앨버트 화이트]]-제이슨 윌리엄스) 하지만 시즌 종료 후 [[유재학]] 감독이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울산 모비스 피버스]] 감독으로 옮기고, [[박수교]]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팀은 2년 연속 리그 꼴찌로 추락하고, 여기에 당시 일명 '개그랜드'라 불렸던 막장 팀 운영 탓에 시즌 내내 외인 센터난에 시달리면서 선수생활 말년에 출장시간이 다시 늘어나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05-06 시즌도 또 꼴찌로 마감한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인천 전자랜드]]는 창원 LG의 포인트가드 [[황성인]]을 영입하기 위해 박훈근, [[박규현]], [[박지현(농구)|박지현]], [[임효성]]을 내주는 충격과 공포의 1:4 트레이드를 실시했고,[* [[황성인]]+3억 원 ↔ 선수 4명 트레이드였다.] 박훈근은 친정팀으로 복귀하게 된다. ==== [[창원 LG 세이커스]] (2006~2007) ==== [[파일:LG 박훈근 선수.jpg]] 6년만에 친정팀에 복귀한 박훈근은 [[현주엽]]-[[찰스 민렌드]]-[[퍼비스 파스코]]로 이루어진 창원 LG 프론트 코트의 백업자원으로서 한시즌 쏠쏠히 활약했고, 오랜만에 플옵 4강까지 오른다. 시즌 종료 후 33세의 나이에 두번째 FA가 된 박훈근은 창원 LG와의 협상 결렬 후, 연봉 1억 5천만원에 3년 계약으로 [[서울 삼성 썬더스]] 유니폼을 입는다. ==== [[서울 삼성 썬더스]] (2007~2010) ==== [[파일:삼성 박훈근 선수.jpg]] [[서울 삼성 썬더스|서울 삼성]] 이적 첫해에는 [[이규섭]]의 백업으로 경기당 약 12분가량 출장하는 주요 식스맨이었지만, 08-09 시즌에 [[김동욱(농구선수)|김동욱]]이 상무에서 제대한데다 루키 [[차재영]]에게도 밀리며 박훈근의 출전시간은 점차 줄어들었고, 09-10 시즌에는 아예 시즌 절반도 출전하지 못했다. ====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대구 오리온스]] (2010~2011) ==== [[파일:오리온스 박훈근 선수.jpg]] 서울 삼성과 재계약하지 못한 36세의 FA 박훈근은 [[김남기]] 감독이 이끌던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대구 오리온스]]에 재영입되어 마지막 불꽃을 태우지만, 일명 '''꼴리온스''' 시절이던 당시 팀은 또 꼴찌에 그쳤다. 박훈근도 [[이동준(1980)|이동준]], [[허일영]]에 밀려 거의 나오지 못했고 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 지도자 경력 == 은퇴 직후 [[2011년]]부터 [[2014년]]까지 3년 동안 [[이민형]] 감독 아래에서 모교인 고려대학교 농구부 코치를 역임하였다. [[2014년]] [[서울 삼성 썬더스]]에서 [[이상민(농구)|이상민]]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이규섭]]과 함께 [[서울 삼성 썬더스]] 코치로 부임하였다. [[2017년]] [[2월 15일]] 부친상을 당한 [[이상민(농구)|이상민]] 감독을 대신하여 오리온스와의 경기에서 일일 감독대행을 맡은 이후 2016-2017 시즌 팀의 KBL 파이널 진출과 함께했으나, 2017 시즌 이후 [[이규섭]] 코치의 수석코치 승진과 [[양은성]] 코치의 선임과 함께 정들었던 [[서울 삼성 썬더스]]를 떠나게 되었다. 3년 뒤인 2020년 드디어 모교인 부산중앙고의 코치로 활약하게 되었는데 사유는 [[박영민(농구)|박영민]] 코치의 개인사로 인한 사퇴였다. == 관련 문서 == * [[농구 관련 인물(한국)]] * [[창원 LG 세이커스/선수단]] * [[서울 삼성 썬더스/선수단]]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농구 선수]][[분류:1974년 출생]][[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스몰 포워드]][[분류:파워 포워드]][[분류:1997년 데뷔]][[분류:2010년 은퇴]][[분류:부산중앙고등학교 출신]][[분류:고려대학교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include(틀:포크됨2, title=박훈근, d=2022-07-10 19:2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