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Banska_Bystrica_SNP_Square.jpg]] ||||<:>{{{#fff {{{+3 반스카비스트리차(슬로바키아)}}}}}}|| ||<-3><:> [include(틀:지도, 장소=Banská Bystrica)] || [목차] [clearfix] == 개요 == [[슬로바키아]] 중부에 위치한 도시로 반스카비스트리차 주(Banskobystrický kraj)의 주도이다. 과거 [[광업]]으로 유명한 도시였으며 역사적으로 주변 산맥과 접근하기 쉬운 곳으로 여겨지다보니 매년 여름철과 겨울철에 많은 관광객들이 몰린다. == 언어별 표기 == ||[[슬로바키아어]]||Banská Bystrica|| ||[[헝가리어]]||Besztercebánya(베스테르체바녀)|| ||[[독일어]]||Neusohl(노이졸)|| == 역사 == 9세기 무렵 [[슬라브족]]의 취락이 건설되었으며 이후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255년 헝가리 국왕 [[벨러 4세]]가 [[몽골 제국|몽골]] 침입으로부터 헝가리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보다 숙련된 정착민들을 끌어들일 목적으로 광범위한 도시 특권을 부여하면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독일인]] 이민자들이 흘러들어와 카르파티아 독일인(Karpatendeutsche)[* 헝가리어로는 kárpátnémetek, 슬로바키아어로는 karpatskí Nemci]을 형성하였고 이들에 의하여 지역 광산 중심지로서 번창했다. 15세기에 들어 부유한 상공 시민들이 시가지에 교회, 주택을 건설하였고 1494년에는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 가문이 웅가리셔 한델(Ungarischer Handel)[* 독일어로 '헝가리의 무역'이라는 의미]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16세기까지 유럽 구리 생산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의 패전으로 헝가리 왕국은 붕괴되었고 1589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북상하면서 도시 요새가 돌벽으로 개선되었다. 16세기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치하 헝가리 왕국의 [[개신교]] 중심지로 부상하였으며 [[헝가리인]]들은 [[가톨릭]]을 강요하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서진에 맞서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다. 18세기에 들어 지하 자원의 고갈로 인해 위기를 맞았으나 목재, 섬유, 종이 산업으로 다시 일어서는데 성공했고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거치며 여러 공공 시설들이 들어서며 발전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되었고 1920년에 체결된 [[트리아농 조약]]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에 편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나치 독일]]에 저항하여 슬로바키아인 민족 봉기가 일어났으며 종전 후 슬로바키아 중부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벨벳 혁명]]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된 후 슬로바키아 영토가 되었으며 1996년 반스카비스트리차의 주도가 되었다. == 인구와 사회 == 2021년 기준, 인구는 75,317명으로 슬로바키아에서는 6번째로 큰 도시다. 역사적으로는 1850년 오스트리아 제국 인구 조사 당시에 [[슬로바키아인]]이 대다수였으며 일부 독일인과 극소수의 헝가리인이 있었으나 [[대타협]]으로 헝가리가 주권을 되찾고 강력한 마자르화 정책이 실시되어 191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인구 조사 시점에서는 헝가리인이 독일인을 앞서기도 했다. 현재는 대부분 [[슬로바키아어]]를 사용하는 슬로바키아인이 다수이며 헝가리인은 극소수만 남아있다. 독일인은 헝가리인보다도 더 적어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 1992년 설립된 마테이 벨 대학교(Univerzita Mateja Bela)는 고등 교육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다. [[분류:슬로바키아의 도시]][[분류:화폐의 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