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 국방군/인물]][[분류:1900년 출생]][[분류:1982년 사망]][[분류:독일의 실향민]][[분류: 교통사고로 죽은 인물]] [include(틀:독일 국방군/장성급 장교)] ||<-2>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발터 뱅크.jpg|width=100%]]}}} || ||<#666> {{{#FFF 이름}}} ||<(>'''Walther Wenck'''[br] '''발터 벵크 '''|| ||<#666> {{{#FFF 출생}}} ||<(>[[1900년]] [[9월 18일]][br]{{{-1 [[독일 제국]] [[작센안할트|작센주]] [[비텐베르크]]}}} || ||<#666> {{{#FFF 사망}}} ||<(>[[1982년]] [[5월 1일]][br]{{{-1 [[오스트리아]] 리트 임 인크라이스}}} || ||<#666> {{{#FFF 복무}}} ||<(> 1920년 ~ 1945년 || ||<#666> {{{#FFF 최종 계급}}} ||<(>[[파일:Si_4b.png|width=32]] [[육군]] 기갑대장 || ||<#666> {{{#FFF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666> {{{#FFF 주요 서훈}}} ||<(>기사 [[철십자 훈장]] [[독일 십자훈장]]|| [목차] [clearfix] == 개요 == [[독일 국방군]]의 장성이다. 최종계급은 육군 병과대장(기갑) 이다. 1900년생으로 독일 국방군을 통틀어서 최연소 병과대장이었던 데다가 제법 동안인 외모 덕에 “소년 장군”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전쟁 말기 서부전선을 방어하는 유일한 독일군세였던 제12군의 사령관이었으며, 히틀러의 요구대로 포위되어있는 베를린을 공격하기보다는 민간인을 보호했다. 그런 이유로 양심적인 군인이라고 평가된다. 동시에 유능한 지휘관으로도 평가받는데, 스타르가르드 전투 당시 한물간 자신의 병력으로 소련군을 돌파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 군 경력 == 1900년 9월 18일 독일 제국 비텐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1920년 국가방위군(바이에른 공화국의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입대하기 전에도 이미 그는 [[자유군단]] 일원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1942년 11월 루마니아 3군 참모장이 된 벵크는 11월 말쯤 6군과의 넓은 간극을 메워서 A집단군과 돈집단군의 연결고리를 이어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된 6군의 상황을 이용할수 없게했다. 또 1939년부터 1942년까지 그는 제 1기갑사단의 작전지휘관이었다. 1942년에서 1943년에는 [[카를 아돌프 홀리트]]의 참모였고, 1943년에는 제 6군의 작전지휘관이 되었다. 1944년엔 [[육군최고사령부]]의 최고 운영책임자가 되었다. 1945년 2월 13일에 그는 [[고트하르트 하인리치]]가 이끌던 비스툴라 집단군의 참모장이 되었다. 1945년 4월 10일에 그는 제 12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 [[베를린 공방전]] === 4월 21일, [[펠릭스 슈타이너]]의 분견군은 [[게오르기 주코프]]의 부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슈타이너의 부대는 제대로 된 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공격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히틀러의 마지막 몇 주를 다룬 독일 영화 [[다운폴]]에서도 히틀러가 직접 이 명령을 언급한다. 그리고 이 장면 이후 바로 [[다운폴/패러디|전설의 그 장면이 등장한다.]]]. 이에 따라 하나의 군대라고 할 만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벵크의 12군은 이제 나치 독일의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 없었다. 4월 22일, 벵크는 [[테오도어 부세|부세]]의 제 9군과 합류하여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격파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다. 벵크의 12군은 공세를 개시했으나 소련군과의 전력 격차가 거대하여 베를린 서쪽 포츠담시 외곽 지역을 끝으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베를린 총통벙커에 들어박힌 히틀러는 벵크와 12군이 재차 베를린으로 진입할 것을 명령했으나, 벵크는 이를 '''거부'''하고 군대를 서부로 되돌려버렸다. 히틀러는 격노했으나 벵크는 '''"더 이상 [[아돌프 히틀러|한 개인]]의 운명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라고 대답하며 그대로 씹었다.[* 벵크의 12군은 나름 여력이 남아있긴 했으나 전쟁 말기 군대 자체가 와해되어가던 나치 독일 상황에서야 그렇게 평가할 수 있을 뿐, 몰려드는 연합군에 반격을 개시하기는 커녕 방어전을 수행하는 것도 힘겨운 수준이었다. 애초에 12군 자체가 계속된 패전으로 편제가 무너진 부대들을 모아서 재편성한 부대였으니 히틀러의 바램대로 12군이 소련군을 격파하고 포위망을 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벵크가 기적을 일으켜서 베를린을 포위한 주코프의 군대를 격파한다고 해도 다음은 코네프의 군대가 몰려들 뿐이다. 신의 은총이라도 받아서 소련군을 모두 몰아냈다고 해봐야 그 다음은 미군과 영국군의 차례.] 4월 24일, 엘베 강을 9군과 함께 방어해내며 소련군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던 민간인을 미육군 점령지로 도하시켰다. 이 철수 작전은 쉽지 않았는데, 당시 엘베 강을 가로지르는 교각이 파괴된 상태였고, 보트도 몇 척 없었기에 대부분의 민간인들은 교각 잔해에 매달리거나 직접 헤엄을 쳐서, 또는 각종 잔해로 배를 만든 다음 강을 건너야 했다. 벵크 장군과 사령부 참모들은 맨 마지막에 건너갔는데, 그가 강을 건너던 도중 그가 타고 있던 보트가 소련 육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벵크 장군 본인은 무사했으나 동승한 장교 몇 명이 총상을 입었을 정도로 철수 작전은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 평가 == 벵크는 [[베를린 공방전]] 당시 민간인을 빼낸 이유로 좋은 평가를 받는다. 만약 베를린 공방전에서 벵크가 자신의 12군으로 제대로 공격을 할 수 있었더라면, [[나치 독일]]의 패망은 늦춰졌을 수 도 있다. == 전후 == 전후에는 [[서독]] [[니더작센]]에 거주하다가, 전쟁이 끝나고 1982년 오스트리아에 휴가차 방문하였다가 당시 탑승하였던 차량이 나무에 충돌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서훈 내역 == 2급 철십자 훈장: 1939년 9월 13일 1급 철십자 훈장: 1939년 10월 4일 [[독일 십자훈장]]: 1942년 2월 26일 기사철십자 훈장: 1942년 12월 28일(당시 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