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목차] == 개요 == 房亮 (459 ~ 529) 자는 경고(景高). 청하군(淸河郡) 출신. == 생애 == 아버지 방법연(父法延)은 초군(譙郡) 태수를 지냈다. 방량은 학문을 좋아했고 절개와 지조가 있었다. [[효문제]] 태화(太和) 연간[* 477년 ~ 499년], 수재(秀才)로 급제하여 봉조청(奉朝請)이 되었다. 뒤에 비서랑(秘書郞)으로 임명되었으며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을 겸임하였다. 492년, 중서시랑(中書侍郞) 송변을 보좌하여 [[제(남조)|남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돌아와서 상서이천석낭중(尙書二千石郞中), 제주(濟州) 중정(中正)에 임명되었다. 방량은 뒤에 원외상시(員外常侍)를 겸임하며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나 당시 고구려의 국왕이었던 [[문자명왕]]은 병을 핑계로 사신을 접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방량은 사명을 어긴 죄로 관작을 삭탈당한 상태로 낭중(郞中)을 대행하였다. 이후 제북(濟北) 태수로 제수되고 평원(平原) 태수로 전임되어 청렴함과 엄정함으로 칭송받았다. 508년, 기주(冀州) 자사 경조왕(京兆王) [[원유(북위)|원유]]가 기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방량이 태수로 부임했던 평원군은 기주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는데, 원유는 방량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반란에 가담하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방량은 곧바로 원유가 보낸 사람을 죽였고 군대를 일으켜 원유에 대해 방비하였다. 원유는 여기에 분노하여 대장(大將) 장영화(張靈和)를 파견하여 평원군을 공격했다. 방량은 백성들과 병사들을 독려하고 성을 나와 장영화를 물리쳤다. 이윽고 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상을 마친 뒤 방량은 좌장군(左將軍), 급군(汲郡) 태수로 제수되었고 전장군(前將軍), 동형주(東荊州) 자사로 전임되었다. 당시 변경에 부임한 자사는 관례에 따라 아들 1명에게 출신(出身)을 내렸는데, 방량은 자신의 아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자신의 조카인 방초(房超)를 봉조청으로 삼아서 당시 사람들이 이를 칭송하였다. 뒤에 평동장군(平東將軍), 창주(滄州) 자사로 전임되었으며 입조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되고 안동장군(安東將軍)이 더해졌다. 방량은 529년에 죽어서 무군장군(撫軍將軍), 제주(齊州) 자사로 추증되었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459년 출생]][[분류:529년 사망]][[분류:싱타이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