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백낙주}}}'''[br]'''白樂疇'''}}}}}}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백낙주.jpg|width=100%]]}}} || || '''창씨명''' ||마쓰바라 운키(松原雲起) || || '''이명''' ||백세창(白世昌)·백운기(白雲起) || || '''자 / 호''' ||학범(學範) / 일우(一愚) || || '''본관''' ||[[수원 백씨]][* 인주공파(仁州公派) 20세 낙(樂)◯ 항렬. 수원 백씨 32세.] || ||<|2> '''출생''' ||[[1888년]] [[12월 18일]] || ||[[평안도]] [[정주시|정주목]] 갈지통 광동리[br](현 [[평안북도]] [[정주시]] 오산동) || ||<|2> '''사망''' ||[[1965년]] [[12월 29일]] (향년 77세)|| ||[[부산광역시]] [[동구(부산)|동구]] [[범일동]] 자택 || ||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57호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 생애 == 1888년 12월 18일 평안도 정주목 갈지통 광동리(현 평안북도 정주시 오산동)에서 아버지 백병제(白昺濟)와 어머니 [[남양 홍씨]] 홍익환(洪益煥)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고향 [[평안북도]] [[정주시|정주군]]에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그해 7월 [[만주]]로 망명하였고, 그해 4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 싼위앤푸조선족진(三源浦朝鮮族鎭).]에서 결성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0년 [[봉천성]] 흥경현(興京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본계현(本溪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번시시.]·무순현(撫順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방면의 외무감독, 재무감독 등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그해 7월 대한독립단 독립소대장으로서, [[봉천성]] 흥경현 영릉가(永陵街)[*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 용링진(永陵鎭).]에서 [[봉천]] 주재 일본 영사 및 친일단체인 [[만주보민회]] 회장 백형린(白衡麟), 백용범(白龍範), 오가와(小川) 순사 등 일행을 사살하고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30여 만 원을 탈취하였다. 또한 그해 10월 일어난 [[간도 참변]]으로 독립군의 근거지가 혼란에 처하자, 1921년 [[권덕근]]·나정규(羅正奎)[* 이명 나정봉.] 등과 함께 대한독립단 산하 혈성대(血誠隊)를 조직, 혈성대장에 취임하고 지방 수복 공작에 착수하여, 봉천성 관내 흥경현을 비롯해 관전현(寬甸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만주족자치현(寬甸滿族自治縣).]·환인현(桓仁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번시시]] 환런만주족자치현(桓仁滿族自治縣).]·통화현(通化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通化市) 퉁화현.]·유하현·해룡현(海龍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메이허커우시(梅河口市).] 등을 수복하는 한편, 친일단체 만주보민회를 비롯해 일민단(日民團)·강립회(强立會) 등의 단원 및 회원들을 숙청하였다. 1923년 8월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법무부장 [[현정경]]과 함께 법무부원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전덕원]]을 따라 [[의군부]]로 이적하였으며, 1926년에는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에 진력하다가 이듬해인 1927년 일본 관헌의 추적을 받게 되었으나, 서자의(徐子儀) 등과 함께 만주로 무사히 돌아와 당시 [[몽고]]와 접해 있던 봉천성 도남현(洮南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청시(白城市) 타오난시(洮南市). 지린성 바이청시는 현재도 [[내몽골 자치구]] 싱안멍(興安盟)과 접해 있다.]으로 잠시 망명했다가 1928년 3월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8년 9월 28일 봉천 주재 일본 영사관 오오카와(大川) 순사부장의 직접 지휘 하 일본군에 의해 집이 포위되고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영사관 순포(巡捕) 왕추신(王樞臣)에게 중상을 입힌 뒤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 뒤 요령성 무순현 방면에서 활동하던 중, 변절자 공성환(孔成煥)의 밀고로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안북도]] [[신의주시|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는 결국 1932년 3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공소하여 이듬해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아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뒤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 차례로 이감되었다. 이후 위 죄명에 대해 상고하였으나 1944년 1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88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8048&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상고가 취하되면서]] 1945년 [[8.15 광복]]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옥할 수 있었다. 광복 후에는 [[경상남도]] [[부산시]]로 이주하여 광복동지회 및 3.1 동지회 부산지회장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2018|취임하여 활동했으며]], [[동구(부산)|동구]] [[범일동]]에 거주하면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5년 12월 29일 범일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그의 유해는 1975년 8월 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정주시 출신 인물]][[분류:수원 백씨]][[분류:1888년 출생]][[분류:1965년 사망]][[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