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백제)] [include(틀:백제의 역사)] [include(틀:백제)] [목차] == 개요 == [[백제]]의 역사를 다룬 문서이다. == 역사 == === 건국 === >貴須王者, 百濟始興第十六世王也. 夫百濟太祖都慕大王者, 日神降靈, 奄扶餘而開國. >[[근구수왕|귀수왕]]은 백제가 처음 일어난 때로부터 제16대 왕입니다. 무릇 백제의 태조 도모대왕(都慕大王)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에 머물러 나라를 열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준으로는 14대 왕. 《[[속일본기]]》와 《[[제왕운기]]》에 따르면 [[근구수왕]] 이전 백제의 왕계가 2대 정도 누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제의 태조로 '도모대왕(都慕大王)'이 언급되는 점을 고려하면 1대는 도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2대에 해당하는 인물은 불확실하다. 이는 [[동명성왕|주몽]]과 [[비류]]일 수도 있고, [[동명왕|동명]]이나 우태([[구태]])일 수도 있다.] >---- >《[[속일본기]]》 [[간무 덴노|연력]] 9년([[790년]]) 7월 17일, 백제계 [[도래인]]의 후손들이 올린 표문 中 백제의 건국자는 [[동명성왕|주몽]]의 재취처인 [[소서노]]의 [[아들]], [[온조왕]]이라고 전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의 건국전설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비류]]와 온조 형제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위례]]에 도읍을 세웠는데, 미추홀에서 건국한 비류는 결국 자결하여 그의 나라는 동생 온조에게 병합되었다고 한다.[* 재밌는 것은 로마 건국신화에서도 형제인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수도를 어디로 정할지 싸우다가 갈라서는데, 이 경우는 전쟁까지 해서 레무스가 죽는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고구려 왕비였던 소서노가 남하하여 건국했다고도 한다. 《[[주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 등에는 시조로서 고구려의 주몽이 아닌 "[[우태]]" 혹은 "[[구태]]"라 하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을 주고 있다.[* 이강래의 《[[삼국사기]]》 주석에 따르면 [[구태]]는 부여 왕 위구태를 말하는 것으로, 북쪽의 부여와 사비백제의 다른 이름인 '남부여'를 혼동하여 기록했을 것이라고 한다. 기타 의견은 [[구태]]와 [[우태]] 문서 참조.] 확실한 것은 백제를 세운 지배 계층이 [[고구려]]계였다는 것이다. 한편 문헌 상으로는 백제와 부여의 관계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으나,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백제와 부여의 관계가 희박하다는 사실은 반론의 여지 없이 점점 정설에 가깝게 굳어지고 있다. 묘제든 유물이든 부여와의 직접적 관계를 증빙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며,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부여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국한된 것이었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이들이 [[한강]] 유역에 이미 있었던 토돈 분구묘제 집단과 연합한 다음, 한반도로 남하해서 현지 토착 세력[* [[마한]]이라고 통칭되는데 고대 국가 백제의 이원적 지배층 중 하나는 고구려식 적석총 외에 경기-충청-전라 서해안 일대의 토돈 묘제 사용 세력임이 드러나고 있으므로 마한이라고 하는 건 바르지 않다-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 시리즈 1권 참조. 마한의 주된 묘제는 목지국을 비롯한 경기-충청-전라 내륙 지역에서 드러나는, 고조선 묘제와 일맥상통하는 토광목관 혹은 토광석곽묘 계열이었다.]과 융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의 언어가 달랐다는 떡밥도 있지만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건길지]] 항목 참조. ==== 명칭 ==== [[고려시대]]의 《[[제왕운기]]》에 따르면 백제 말고도 응준(鷹準), 나투(羅鬪)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나중에는 아예 [[부여]]로 나라 이름을 바꾸기도 했는데, 백제를 [[부여]]의 계승국으로 생각한다면 "남부여"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이 호칭은 [[성왕(백제)|성왕]] 시절에만 잠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백제의 최대 적국이자 고토 회복 전쟁의 대상이었던 [[고구려]] 또한 [[부여]]의 일파이므로, 성왕 대의 국명 변경은 백제가 정통 부여이며 고구려는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삼국시대]]로 접어들 무렵 [[견훤]]이 옛 백제 지역에서 부활시킨 나라의 이름은 남부여가 아닌 [[후백제|백제]]였기에 주된 국호는 역시 백제로 보아야 한다. [[일본]]에서는 '쿠다라'라고 부르는데[* 요즈음은 교과서 등에서 음독하여 햐쿠사이(ひゃくさい) 또는 하쿠사이(はくさい)로 적는 경우도 있으나, 현재까지도 예전부터 쓰여왔던 명칭인 쿠다라(くだら)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오사카]] 쪽 지명에 쿠다라(百濟)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오사카 지역에 [[12세기]]경까지 백제군(百濟郡)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공존하고 있다. [[웅진]](熊津)의 백제식 [[훈독]]이었던 '고마나리'[* 《[[양서(역사책)|양서]]》의 표기인 '고마(固麻)'와 《[[일본서기]]》의 표기인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바탕으로 본래 음가를 재구성한 것이다. 뜻은 한자 '熊津'과 마찬가지로 '곰나루'이다. 《[[용비어천가]]》에서도 공주의 토착 지명을 '고마ᄂᆞᄅᆞ'라고 기록하였다.]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며, 과거 백제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배가 출항했을 장소로 여겨지는 하구 지역이 노년층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최근까지도 '구드래'[* 현재도 구교리 금강 유역(충남 방언으로는 '백마강')에 구드래 조각 공원이 위치하고 있으며, [[부여군]]에서 출하하는 농산품의 브랜드 '굿뜨래(Good + 뜰에)'의 유래가 바로 이 구드래다. 현재까지도 백제의 마지막 도읍으로서 부여를 대표하는 옛 지명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니 이 또한 연관이 있을 공산이 없지는 않다.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2777/4|#]] 한편 [[역사스페셜]]에 출연한 일본의 모 교수는 유력한 학설 중 하나로 '큰 나라'라는 한국말이 '쿠다라'의 유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RRtrRC64sc|#]] 다만 한나마(韓奈麻)와 [[대나마]](大奈麻)의 대응 등으로 문증되는 옛말 '[[하다#s-8.1]][大]'와 달리 '크다'는 [[고대 한국어]]에서 직접적으로 문증되지 않으며, '[[나라]]'의 ㄴ 음가가 어떻게 ㄷ으로 변했는지 설명하기도 까다로우므로 확실한 가설은 아니다.[* 고대 한국어에서 ㄱ과 ㅎ의 구분이 모호했다는 점을 들어 '하다'와 '크다'의 어원이 같았을 것이라 주장하는 설도 있으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재구형 '*카다'와 '쿠다라'의 모음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긴다.] 참고로 '나라'는 [[금관국]]의 이표기 '소내라(素奈羅)' 및 신라 향가 [[안민가]]의 '國惡(*NALak)'으로 문증된다. 참고로 [[1910년]] [[경술국치]]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각지에 '구다라고우리(百濟郡)', '구다라손(百濟村)', '구다라강(百濟川)', '구다라대교(百濟大橋)', '구다라평야(百濟平野)' 등 '구다라'가 붙은 행정 지명이 산재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병합 이후 백제와 관련된 대부분의 일본 지명들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현재 일본에서 '백제'가 지명으로 남아 있는 곳은 [[나라현]] '고료초 구다라(廣陵町 百濟)'[* 이곳에는 '구다라 우편국(百濟郵便局)'이 영업 중이다.]와 [[교토]]시 동쪽의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東近江市 百濟寺町)'[* 이 이름은 스즈카산(鈴鹿山) 등성이에 우뚝 서 있는 '샤카산 햐쿠사이지(百濟寺)’라는 유서깊은 사찰에서 비롯했다. 일본에서는 통상적으로 '百濟寺'를 '구다라데라'라고 읽으나, 유독 이 사찰만은 ‘百濟寺’의 한자어를 소리 나는 대로 읽어 ‘햐쿠사이지’로 부른다.] 두 곳뿐이다. 그러나 이 두 곳의 지명 또한 언제까지 존속할지는 알 수 없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5450&sca=&sfl=mb_id%2C1&stx=yunsu53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0199812|#]] ==== 건국 연대 논쟁 ====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제외한 사료에서 백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와 마찬가지로 중국 사서 《[[삼국지(정사)|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며, 여기서는 "백제(伯濟)"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국외 사료에서 처음 등장하는 왕명은 그보다도 100여 년이 지난 [[근초고왕]]으로서, 370년에 최초로 [[중국]]의 [[동진]] 왕조 및 일본 열도와 수교를 맺었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칠지도]]는 바로 이 시기에 백제에서 열도로 넘어간 것이라는 설이 다수설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사기]]》 자체가 수백 년이 지난 [[고려시대]] 중반에 쓰여진 역사서이다 보니 '''편의상 [[초고왕]] 이전도 백제라고 기술했다'''. 《삼국사기》가 고려시대에 쓰여진 역사서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제8대 [[고이왕]] 이전 군주들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의문이 제기된다. 특히 제5대 초고왕 대 이전의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의 경우 즉위 연대 자체도 비현실적으로 길며, 《[[삼국사기]]》 내용에서도 초대 온조왕 대의 마한 정벌 기사 등 당대의 사건으로는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많아 이를 후대의 역사가 전대로 소급되었다고 보는 편이다. 백제사의 권위자인 [[노중국]] 교수는 그의 《백제 정치사 연구》에서 제5대 [[초고왕]]을 현실적인 백제의 첫 번째 왕으로 본 바 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발굴은 이를 논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발굴로 여겨진다. [[2000년대]]까지는 일단 이러한 건축물이 지어지려면 백제가 상당히 체계화된 국가임이 분명하고, 그 시기가 기원전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보아 제8대 [[고이왕]] 이전 백제사에 대해서도 긍정하는 시각이 늘어났다. [[http://academic.naver.com/view.nhn?doc_id=17474933&dir_id=1&field=0&unFold=false&gk_adt=0&sort=0&qvt=1&query=%ED%92%8D%EB%82%A9%ED%86%A0%EC%84%B1%20%EC%97%B0%EB%8C%80&gk_qvt=0&citedSearch=false&page.page=1&ndsCategoryId=10102&library=45|2001년의 논문]], [[http://academic.naver.com/view.nhn?doc_id=17475545&dir_id=1&field=0&unFold=false&gk_adt=0&sort=0&qvt=1&query=ad%20200%EB%85%84%20%EB%B0%B1%EC%A0%9C&gk_qvt=0&citedSearch=false&page.page=1&ndsCategoryId=10102&library=136|2002년의 논문]]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중국계 유물에 대한 연대관이 정리되면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주요 부분이 축조된 시기가 주로 [[3세기]]~[[4세기]]에 걸쳐 있다는 의견이 다수가 되면서([[http://academic.naver.com/view.nhn?doc_id=56992275&dir_id=1&field=0&unFold=false&gk_adt=0&sort=0&qvt=1&query=%ED%92%8D%EB%82%A9%ED%86%A0%EC%84%B1%20%EC%97%B0%EB%8C%80&gk_qvt=0&citedSearch=false&page.page=1&ndsCategoryId=10406&library=132|2012년의 논문]]) 백제의 고대 국가로서의 진정한 출발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연대를 그대로 믿긴 어려워졌다'''. 다만 발견된 중국계 유물을 통해 백제가 3세기 초부터 중국의 국가와 교류했다고 볼 수는 있게 되었다. 왕통의 시작과 고대 국가로서의 출발이 다소 다를 수 있음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최근 고고학적인 발전에 의한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탄소 연대 측정법]]으로는 성벽의 일부 누층의 축조 연대를 기원전으로 내릴 수 있으나, 본격적으로 축조가 이루어진 구간은 아니다. 따라서 [[풍납토성]]의 일부 하층부에서 발견된 기원전 1세기에 속하는 층이 [[백제]]의 뿌리가 되는 원류 집단의 흔적이었을 것으로 상정하고, 3~4세기에 체제가 크게 발전하면서 대대적으로 증축되었다고 볼 수는 있게 되었다. [[석촌동 고분군]] 중 [[고구려]]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적석총|돌무지무덤]]들은 대강 기원후 3세기 중반 이후에 축조되어 이 지역에서 중요한 발전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이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3세기 중반 이전에는 고구려계 돌무지무덤이 [[한강]] 유역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고구려계 돌무지무덤들은 2세기 중후반부터 [[임진강]] 유역에 나타나는데, 주로 당대 고구려 돌무지무덤 양식 중 압록강 이남에 해당하는 묘제이며[* 때문에 [[온조왕]]이 고구려 남부 영역을 담당하던 관노부 소속이었다는 주장도 소수설로 제기되기는 한다.] 3세기 중반 한강 유역에 등장하는 것을 기점으로 갑자기 임진강 유역에서 사라진다. 고고학적으로만 보면 [[온조왕|온조]]-[[초고왕]]계로 비정되는 [[고구려]]계 세력은 기원후 2세기 중후반 즈음에 [[임진강]] 유역으로 남하해온 후, 모종의 이유로 3세기 중반에 한강 유역의 [[위례성]] 인근으로 넘어와서, 해당 지역의 토돈분구묘제를 쓰는 토착 세력과 연합해 고대 국가 단계를 이룬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고구려계 세력이 넘어오기 전에 위례성 일대를 이미 차지하다가, 고구려계 세력이 넘어오자 일단 주도권은 넘겨주지만 왕비도 분명히 배출하며 기득권에서 퇴출되진 않았던 토돈분구묘제 집단은 경기·충청·전라 서해안[* 아이러니하게도 이 중 [[영산강]] 유역에 자리한 토돈분구묘 집단이 야요이인 집단 및 [[고조선]]계 토광묘 집단과 융합 후 옹관묘 집단으로 진화해서 [[침미다례]]라는 정치체로 번영하다가, 고대 국가를 이룬 지 겨우 50년도 채 안 돼서 [[목지국]]을 쓰러뜨리고 힘을 키운 백제국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에 분포한다.[* 중국의 옛 [[오월]] 지역과 [[산둥성|산둥반도]] 동해안에 있는 분구묘제 및 일본 규슈 북부와 [[기나이]](畿內) 일대에서 유력했던 일본 분구묘 묘제와의 연관성이 유력하게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 이 토돈분구묘제 집단은 고고학적으로 3세기 초에 한강 유역에 나타나 기존에 있었던 [[고조선]]계 토광묘 집단 및 [[옥저]]계 중도문화 유형을 피지배층으로 아울렀던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다 약 반세기 후, 상술한 바와 같이 [[임진강]] 유역 일대의 [[고구려]]계 주민과 연합하여 고대 국가 백제를 성립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사실과 기존 문헌을 어떻게 조화시킬지는 여전히 학계의 고민이다. 일단 '''백제 지배층 자체가 이원적'''이었음은 이제 문헌학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의심할 수 없는 단계가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신라]]와 [[백제]]의 건국 년도는 신뢰도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기 때문에 발굴 조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풍납토성]]의 최초 건설 연대는 기원전이고, 이후 대대적으로 증축, 개축, [[재건축]] 등 여러 [[건설]] 사업을 벌이면서 4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의 [[건축물]]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풍납토성의 건설 이력이 여러 차례 나타나는 것은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한 일반적인 역사학계의 결론은 "백제는 약 250~300년 사이에 국가 단계에 들어서서 대외 교류가 시작되었다"라고 정리할 수 있으며, 이 시기는 형법과 행정법 반포로 유명한 제8대 [[고이왕]]의 후기 치세 및 제9대 [[책계왕]]의 치세와 일치한다. 즉 2~3세기까지 소국 형태로 존재했던 백제는 3세기 중후반 국가로서의 체계를 갖추면서 [[경기도]] 일대를 아우르며 [[목지국]]이 몰락하기도 전에 이미 [[마한]] 내 최강국으로 성장했고, 4세기 들어 [[대방군]]과의 교류와 [[마한]] 정벌을 통해 전성기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전라도 남부의 마한을 완전히 통합했다는 입장이 정설이었으나, 이후 문헌 연구 및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근초고왕]] 시기 간접 통치설을 주장하는 문헌사학자들이 대두하게 되었다.[* 다만 근초고왕 대에 간접적으로 마한 지역을 느슨하게 복속시킨 것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 조정에 의한 직접 지배로의 전환이 늦었을 뿐, 간접 통치까지의 영토로 본다면 교과서 상의 지도도 크게 무리는 없다. 또한 고구려만 보더라도 [[한사군]]의 물리적 복속보다 그 일대의 고고학적 변화가 늦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된다.] 현재 학계에서는 백제가 우리가 알고 있는 지도의 영토까지 직접 통치를 시작한 시기를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으로 보는 편이 대세[* 장창은, 〈현행 중학교 역사 교과서와 역사 부도의 삼국시대 지도 검토〉, 《선사와 고대》 제57호, 한국고대학회, 2018.]이며, 고고학자들 역시 대체로 6세기 초엽인 [[무령왕]] 대 정도 가서야 백제가 [[영산강]] 유역 일대까지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재하게 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사실 백제는 마한 연맹체 구성국들 중 하나로 출발했으니 정벌이라기보다는 기존의 목지국 중심 체제에서 백제국 중심으로 재정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 발전 === 백제는 초기부터 강성한 국가가 아니었다.[* 이는 [[고구려]]나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그 강대했던 [[로마 제국]]조차 시작은 [[이탈리아]] 반도 북쪽에 있던 [[에트루리아]]한테 수백 년 간 휘둘리는 신세였다. 그러다 연맹 체제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에트루리아는 종합적인 국력이나 전통에도 불구하고 로마한테 망했고, 마찬가지로 [[목지국]] 또한 한때는 부하 소국이었던 백제국한테 타도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건국 초기에 북쪽으로는 [[낙랑군]]에게, 남쪽으로는 [[마한]] 연맹의 수장인 [[목지국]]에게 휘둘리며 어려운 시기를 보내긴 했는데,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서는 상당히 짧은 시기에 급성장한 편이라 초기의 어려운 시기는 그닥 길지 않았다. 백제는 고고학적으로 고대 국가가 된 지 불과 50년도 안 되는 시기에 상전인 [[목지국]]을 타도함은 물론이요, 기존 마한 연맹 소속 소국들도 꽤 빠른 속도로 넘어뜨리고 있었다. 이는 아무래도 백제를 건국한 주류 지배층인 고구려인들이 당대에 사회적 수준이 [[삼한]]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발전되어 있던 2~3세기 [[고구려]]에서 바로 남하해온 부류였던 것이 이유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가 건국된 시기, 백제의 중심지인 한강 유역은 [[마한]]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 백제 건국기에는 [[목지국]][* 현재는 충청남도 천안 청당동이 유력하다.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발간 백제사 시리즈 참조. 한편 익산도 한때 제기되었으나, 익산에는 [[준왕]] 남래 당시 고조선계 세력이 갑자기 대규모로 나타남이 규명되어 일단 익산 [[건마국]]이 문헌대로 마한의 초기 수장국이었을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이 마한의 수장국이었다. 목지국 거수는 삼한에서 가장 강하다고 해서 그 왕이 '진왕'[* 진왕이 백제 [[고이왕]]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 경우라면 목지국은 백제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러나 이는 1970년대에 들어서 지지하는 학자가 사실상 사라진 설이다. 《[[삼국지(정사)|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기리영 전투]]로 인해 '[[신분활국|한]](韓)을 멸망시켰다'고 한 이후 진왕에 대한 기록이 끊어지는 반면, 백제는 이 근처 시기 사로잡았던 군현의 포로를 돌려주고 그 뒤로 성장을 이어나가기 때문이다.]으로까지 불리기도 했다. 백제는 [[마한]]과의 제휴, 견제, 대립, 경쟁 속에서 성장했으며, [[위말갈]] 및 [[한사군|한군현]] 등과도 마찰을 빚었다. 백제는 이렇게 시작부터 사생결단으로 전쟁하거나 주변 세력을 회유하면서 병합하는 방법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한강]] 유역에 머물렀으나, 점차 팽창하며 [[마한]]의 여러 소국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고이왕]](재위 234~286) 때 율령 반포 및 중앙 집권이 이루어졌다. 8대 고이왕 시절부터 [[낙랑군]] 및 [[대방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백제는 10대 [[분서왕]](재위 298~304) 때 낙랑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후 313년~314년에 낙랑군과 대방군은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을 받고 무너진다. 마한 통합 과정은 현재 일치된 설이 없을 정도로 문헌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별도 문단이 있다. 하여간 고고학적으로 확실한 것은 [[3세기]] 말까지 백제가 경기도 지역을 석권했으며, 13대 [[근초고왕]] 때인 [[4세기]] 중반에 걸쳐 북쪽으로는 황해도 일부 지역과 남쪽으로는 금강 유역까지, 5세기 후반 들어서는 전라도 지역까지 직접 통치를 시행했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한성백제 시기부터 [[호남 지방]]까지 직접 지배를 실시했다는 해석이 있었으나, 이는 현재 고고학적 연구에 의해 부인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활발히 진행된 연구 결과 [[6세기]] 중반까지 전라도 남부에 여전히 자치력을 유지하는 소국 세력들이 온존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이를 놓고 고고학자들은 6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마한 자치체가 완전 소멸한다는 입장이고, 문헌사학자들은 대체로 4세기 후반~5세기 이후 간접 통치를 실시하다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직접 지배로 넘어갔다는 입장이다. 이 부분은 문헌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완전히 대립하는 부분은 아니다. 근초고왕 재위기에 [[영산강]] 유역 세력에서 중심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소국이 갑자기 고고학적으로 증발하면서 어느 정도는 성장이 통제되는 현상이 관찰되는데, 이는 역시 문헌사학계에서 제시하는 근거 자료와 어느 정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고학계는 자료만으로 간접 지배의 정도와 시기를 확정하는 게 어려운 반면, 문헌사학계는 일단 내놓을 문헌 자료가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어쨌든 백제의 강성해진 국력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근초고왕]](재위 346~375) 시대로, 이 시대의 백제는 [[동진]]에 사절을 보냈고,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에 따르면 [[왜국]]과도 국교를 맺고 [[칠지도]]와 칠자경을 보내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백제는 이로써 국제적인 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편 중국 사서인 《[[송서]]》와 《[[양서]]》에는 근초고왕 때 백제인들이 요서까지 진출했다고 기록했다. 자세한 사항은 [[요서경략설]] 문서 참조. 이전까지는 [[고구려]]와 별다른 충돌이 없었으나, 근초고왕 대인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의 [[치양 전투|치양을 공격]]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다툼이 시작되었고, 2년 후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371년)|평양성까지 진격하여]] [[황해도]]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치욕을 겪었으며, 이후 고구려는 백제를 '백잔(百殘)'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며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근구수왕]] 시기에도 고구려와의 대립은 이어져서,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백제 역사상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평양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때까지 백제의 전성기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근초고왕 말년부터는 국력 쇠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라]]의 국력이 점점 강해져 373년에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주민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375년에는 수곡성(현재의 황해도 [[신계군]])을 고구려 [[소수림왕]]의 침공으로 빼앗겼음에도 보복하지 못했다. 한편 백제사에서 [[마한]]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고, 백제국이 마한의 일부로 출발하였으니 마한사와 백제사는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이 불가능함이 밝혀지고 있는 상황이다. 백제의 발전은 그 자체가 마한의 통합 과정인 바, 해당 과정을 밑 문단에서 자세히 논한다. ==== 마한 통합 과정 ==== [[마한]]은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의 두 건국 설화에 의하면 부여 혹은 고구려계 유민인 비류와 온조 일행이 마한 지역의 일부였던 한강 하류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했다고 되어 있다. 백제는 지속적으로 전투, 압력, 협상, 설득, 교류 등의 다양한 수단으로 마한 54개국을 점진적으로 복속하면서 영역을 확장해갔다. 백제가 언제 마한 전역을 복속했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있다. 그동안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369년 근초고왕 대에 백제가 마한 전역을 정복했다는 설이 주류였으나, 근초고왕설의 유일한 근거인 《[[일본서기]]》 기록은 근초고왕 24년 남쪽 오랑캐를 무찔렀다는 식으로 표현되어 기록 자체가 애매한 데다가 마한 전체를 모두 정복했다는 이야기도 없기 때문에 근초고왕 정복설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 이후 지역적으로 여러 고고학적 연구가 진행되면서 현재는 6세기 초까지 전라도의 일대에 어느 정도 독립적이었던 마한세력[* 특히 일본과 교류가 활발하였는데, 이 지역을 백제가 통합함으로써 비로소 일본과의 각별한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이 잔존했고, 백제가 이 지역을 완전 병합하게 되는 것은 6세기 초에 이르러서였다.[* 고고학계에선 일단 6세기 초반 이후에도 간접 지배했다는 설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비주류의 소수설이며, 문헌사학계에서는 전혀 지지받지 못한다. 그나마 문헌사학계에서 물러선 것이 <《삼국사기》 초기 수정론>이 한계고, 적어도 4세기부터는 <백제본기>의 연대와 사건 등에서 그 사실성을 의심받고 있지 않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 온조왕 완전병합설 =====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마한(왕)'을 거꾸러 뜨린 것이 [[온조왕]] 대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3세기까지 경기도 ~ 충청도 일대에 걸친 통일적인 정치 세력이 존재했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온조왕이 마한 54개 소국 중 하나만 정복했거나 잠시 군사 활동만 하고 왔을 뿐 대규모적인 정복 활동은 하지 못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설령 기록이 사실이라고 주장해도 '마한 왕' 한 명을 몰아낸 것뿐이 되고 '마한을 정복했다'는 말이 무의미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마한을 정복했다'고 말할 만한 시점은 경기도 지역에 백제 토기가 대대적으로 확산되는 3세기 후반에 근거하여 고이왕 혹은 책계왕 대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 벽골제 건축 기사 등에 근거하여 [[비류왕]] 대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 근초고왕 대 초기 기사의 공백과 [[4세기]] 중반 충청도 북부 지역에서 고분군의 교체 등에 근거하여 [[근초고왕]] 대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 등이 갈리고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마한 정복'이라 함이 목지국을 타도한 걸 두고 말하는 것이라면 고이왕 ~ 비류왕 대가 유력해진다. ===== 근초고왕 완전통합설 ===== 고고학적 연구가 부실했던 1990년대 이전까지는 근초고왕 때 백제가 마한을 완전 정복했다는 설이 큰 지지를 받아왔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학계를 대표하는 원로 학자가 이러한 주장을 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각 대학 교수로 포진해 있었던 학계에서는 명확한 근거가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이를 정설화했고, 교과서 또한 그렇게 서술되었다. 그러나 이후 고고학적 연구가 활성화됨에 따라 '''근초고왕이 마한을 완전 정복했다는 설은 사실상 폐기되었고,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은 차령산맥 또는 노령산맥 이북 지역까지 한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근초고왕 정복설은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조]에 근초고왕 24년(369)[* 369년은 일본 학계에서 백제가 칠지도를 일본에 보냈다고 주장하는 해이기도 하다.] 남서쪽 오랑캐를 정벌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기사 자체가 사실적인 신뢰성이 없다고 하여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설에 대해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견해도 있어 왔다.[* 오해를 막기 위해 첨언하자면 이 주장이 백제가 충청 ~ 전라 지역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주장은 연대나 사실 관계 면에서 신뢰할 수 없는 기록이 실제 백제, 그중에서도 근초고왕 한 명만이 '마한'을 정복하고 확장하는 과정에 대응할 수 없다고 보며, 아예 관련 기록이 후대에 정치적 목적에 따라 소급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고고학적 사실은 인정하되, 문헌의 사실성은 비판적으로 보는 것. 《[[일본서기]]》의 기초적인 신뢰도 자체가 굉장히 의심스럽기에 나올 수 있는 주장이다.] 또한 기록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마한 전체를 완전히 정복했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게다가 [[근초고왕]] 이후에도 [[동성왕]], [[무령왕]] 등이 계속 남쪽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기록이 나온다는 점도 근초고왕의 마한 완전 정복설을 부정하는 중요한 근거였다. 한편 그 외에 일부 견해는 근초고왕 대에 마한 세력을 거의 병합했으나, 근초고왕 사후 한성백제가 쇠퇴하면서 마한 세력이 다시 부흥했다고 보는 다소 절충론적인 설도 있었다. 추가적인 고고학적 연구 결과 이러한 절충설은 폐기되었으나, [[개로왕]] 대의 한성 함락 이후, 근초고왕이 복속시켰던 마한 영역 중 간접 지배하던 영역들, 즉 금강 유역권, 영산강 유역권은 백제의 통제를 벗어나면서 잠깐 다시 번영하던 사실은 재확인되었다. 그중 전남 동부 남해안 일대는 아예 [[가야]]한테 포섭되어 백제의 영역에서 완전히 이탈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백제 입장에선 배신이자 영역 축소로 받아들여졌겠지만 전남 동부 남해안 소국들 입장에선 보다 조건이 널럴하고 좋은 프랜차이즈로의 변경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소지가 높다. 그 대가로 훗날 백제의 직접적인 군사적 응징을 당하기도 했지만.] 2000년대 이후 전라도 남부지역의 고고학 발굴 결과들이 나오면서 6세기 중반까지 전라도 일대에 독자적인 옛 소국 세력들이 존재했음이 사실로 확인되었고, 근초고왕대에 마한을 완전히 정복했다는 설은 현재 부정된다. 현재 학계에서는 근초고왕 대 백제의 남쪽 경계선에 대해 <차령산맥 이북설>과 <노령산맥 이북설>이 논쟁 중에 있다. 일부는 차령산맥과 노령산맥 사이 지역, 즉 지금의 전라북도 지역 중 서쪽 해안 지역은 백제에 복속되었고, 동쪽 산악 지역은 마한에 남아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대체로 학계 정설은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 당시 백제의 직할지가 된 지역은 노령산맥 이북 지역이고, 노령산맥 이남과 영산강 유역은 공납 혹은 간접 지배 상태로 있다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편입된 것으로 본다.''' 이런 내용들이 문헌적 근거로 나타나는 건 《일본서기》인데, 《일본서기》 자체가 철저히 백제 왕실과 조정 관점에서 서술되었다는 점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곤 하지만 그건 가야, 신라를 백제의 부용국 내지 속령으로 서술하는 태도나 아예 가야, 신라, 백제 등을 일본 천황의 부하 나라로 서술하는 내용에 대한 것이다. 마한과 백제의 관계에 대해선 《일본서기》가 서술하는 내용 중 일부가 꽤 들어맞는 부분이 있음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안이다. [[마한]]에 대한 직접 지배의 완성은 [[무령왕]] 즉위기간인 [[6세기]] 초반이라는 입장은 학계 공통 의견이다. [[근초고왕]] 시대 직후인 [[4세기]] 후반~[[5세기]] 중반 때 금강 하구 지역에 백제식 묘제가 발견되는 것은 이 지역이 미약하게나마 중앙 정부 통제를 받았다는 것을 뜻하며, 이런 고분은 백제로부터 지원을 받는 유력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근초고왕 재위기에 영산강 유역의 유력한 소국 하나가 갑자기 그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공중분해되고, 적어도 한성 함락 시기까진 그 세력의 성장이 억제되는 것 또한 드러나는 현황이다. 백제 부여씨 왕실이 영산강 유역 전체를 직접 지배 지역으로 전환하진 못했어도, 하나로 뭉쳐서 다른 세력을 향해 엇나가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무력과 외교력을 동원했다는 강력한 증거다. ===== 6세기 완전통합설 (현재의 정설) ===== 1980년대 이전 학계에서는 당시 한국 사학계의 권위자인 [[이병도]]의 의견에 따라 [[근초고왕]] 시기를 전후로 목지국 등 마한의 전 지역을 백제가 직접 지배 지역으로 병합한 것으로 추론하는 시각이 우세했다. 명확한 근거가 전혀 부재하다는 비판이 당대에도 있었지만 거의 묵살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로 전라남도 여러 지역에서 고고학 발굴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그 결과들이 연이어 발표되자 결국 기존 학설이 완전히 뒤집혔다.[* 병합 여부를 떠나서 전남 고흥군 길두리에서 출토된 한성백제 시기의 금동관이나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영산강 토기 표지유물을 보았을 때 한성백제 시기에도 전남 마한 지역과 교류관계가 있었던 것은 확인되고 있다. 물론 이것이 한성백제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단순 교류 차원으로 해석된다. 참고로 전남 지역 마한은 삼국을 넘어 왜, 중국 심지어 동남아시아와도 교역을 했다.] 근래의 여러 발굴조사 결과, 6세기 초반까지 전라도 남부 일대에는 독자성을 유지하는 세력이 세 부류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침미다례]](신미국)였던 영산강 유역 세력이다. 영산강 유역 세력은 해상으로 백제, 신라, 가야, 왜, 중국과 교류했고, 그 일대에서는 여러 세대에 걸쳐 하나의 분구에 추가장을 하는 대형 고분이 출현하기도 했다.[* [[백제왕릉]]의 규모와 비교하는 경우도 있으나 한 무덤에 1~2명만 매장된 백제 왕릉과 여러 세대에 걸쳐 추가장이 이뤄지며 거대해진 전남 지역 대형 분구묘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또한 백제는 일찍부터 박장이 특징이었으며, 한반도 삼국과 일본 모두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고분 규모는 되려 축소되는 모습을 보인다.] 나주시 ‘신촌리 9호분’을 만들려면 연인원 5,000명 이상이 동원됐으리라 추정되기 때문에, 이들 세력의 권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 가능하다.[* 다만 앞서 지적하듯 일반적인 고분들이 특정 시기에 개인 혹은 2명 내외를 매장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과 달리 전남 지역 대형 고분들의 경우, 대체로 하나의 분구에 다수의 매장 시설이 존재하고 경우에 따라서 여러 세대에 걸쳐 축조되는 것도 목격되는 등 단순히 고분 규모만으로 위세를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다만, 영산강 유역 세력은 흡사 후기 [[가야]] 또한 그랬듯 어떤 한 세력이 주도 세력으로 떠오르는 일 없이 서로 어느 정도 자립성을 유지하는 단계를 끝내 벗어나지 못한 것이 고고학적으로 거듭 확인되고 있다. 즉 고대 국가 단계에 이르진 못했다는 것이고, 세력도 독자성도 어느 정도 응집성이 있었던 후기 가야 집단만 못하다는 것이다. 백제의 영향력은 전라도 남부지역에 4세기 후반부터 침투하여[* 최성락,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와 백제에 의한 통합과정>, 《지방사와 지방문화》20-1, 2017 및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형성과정 연구》, 주류성, 2018] 6세기 초 [[무령왕]] 대 완전히 물리적으로 복속시켰으며, 직접 지배지로 개편되면서 방 - 군 - 성제가 시행되었던 [[성왕(백제)|성왕]] 때인 6세기 초중반이 되면 행정적으로 정비된다. 백제는 6세기 초까지 이곳에 직접 통치를 이룰 여력이 없었다. 지속적으로 강성해지며 남하하는 고구려를 방어하기에 급급했고, 475년 개로왕대 한성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바닥부터 다시 올라와야 했다. 나주 신촌리 고분군 등은 이 시기에 그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는 모습을 보인다. 초기에는 백제계 석실분으로 보아 백제 측에서 직접 개입하기도 했지만, [[전방후원분]](장고형 무덤)이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에 부족한 힘을 보탤 세력을 찾아 왜국계 세력을 끌어들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방후원분은 한 지역에 1개, 많아야 2개가 존재하는 정도이고, 고분'군'을 형성하지 못하는지라 왜국계 세력은 백제와 협력한 개인이 사망하여 전방후원분을 축조한 이후에는 한반도에서 기반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현지에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백제의 압력이 있었을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기록상으로 볼 때 백제는 [[동성왕]][* 이쪽은 탐라를 정벌하러 가는 과정에 무진주에서 탐라의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이라 전남 지역은 이미 백제의 지배력이 미치고 있는 지역이었지, 정벌 대상이 아니었다는 견해도 있다.]과 [[무령왕]] 등을 거치면서 6세기 초반에 전라남도 전역의 마한 세력도 완전히 복속시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무리 보수적인 시각인 무령왕 정복설로 접근해도 660년 백제 멸망 직전까지 전남이 백제령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절대 성립할 수 없다. 전라도 남부의 아직 통합되지 못한 세력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전쟁과 같은 긴장 관계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성곽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전남 옛 마한 거수국들과 백제간에 전쟁이 없었다고 보이며, 고분군의 현지 세력들 또한 對백제 협력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남부 지역에 대한 영토화 과정 전체는 백제가 통제하고 있었고,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과정이었기에, 현지 세력들이 강한 힘을 가진 백제를 인정하며 자발적으로 백제에 순응하며 점차 관료화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성백제 시기부터 고흥 길두리 백제 금동관, 풍납토성 출토 영산강 토기 등의 교류관계가 보이지만 6세기까지 독자문화를 유지했던 점이나, 나주 송제리 고분군(왕실과 밀접한 백제 중앙세력)이 인근 나주 복암리 고분군(독자 문화의 재지세력)과 축조시기가 분리되지 않고 겹침 등이 그 근거가 될 수 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1&aid=0002445007|#]] 반대로 군사적 긴장 관계가 존재했다는 의견도 있다. 우선 동성왕[* 바로 위에 썼다시피 정벌 대상이 탐라로 적혀 있어 전남 일대 정벌 기사로 볼 수 있는지는 이견이 존재한다.]의 탐라 정벌기록과 무령왕대의 섬진강 유역(임나4현) 진출기록을 보았을 때 백제가 전남 정벌에 나섰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고, 최근 고고학적 발굴 결과로 미루어 볼 때 서남부 영산강 유역 세력은 멸망하기 직전까지 백제와는 어느 정도 구분되는 문화를 유지했으며, 일본, 신라, 가야와도 독자적인 교류 관계를 가져왔음이 밝혀졌다.[* '완전 다른 고유'로 통칭될 수는 없다. 오히려 고분 묘제로 볼 때 한성백제와 가장 거리가 있는 쪽은 마한의 원 수장국이었던 목지국과 그 주변 거수국들, 즉 충청-전북 내륙 일대였다.] 마한의 성곽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마한의 세력이 대규모 성곽을 건설할 만큼 강력한 통일 세력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백제 입장에서 보자면 백제가 주로 공세적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만큼 굳이 성곽을 건설한 필요가 크지 않았을 것이며, 애초에 백제도 성곽을 거의 건설하지 않는 나라였다. 백제의 성곽 유적은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무척 희귀하며,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성곽도 토성 위주다.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나중에 신라가 병합하면서 백제의 성곽을 파괴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신라는 [[나당전쟁]]을 위해 기존 백제, 고구려의 성곽을 개축하는 경우도 많았고,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 기록 등을 볼 때 수도를 제외하면 별로 성곽을 쌓지 않는 스타일인 것으로 파악된다. 일단 백제군 자체가 귀족 연합군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전투가 끝나면 곧바로 병사들을 돌려보내야 했기 때문에 성곽을 쌓고 이를 유지할 여력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백제는 고구려의 평양 인근까지도 몇 차례 진출했지만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철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551년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도 병력 부족으로 스스로 철군하기도 했다.] 한편 마한이 성곽을 구축하였다 하더라도 백제가 이를 정벌, 병합하면서 당연히 토성을 파괴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의 토성이 현재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위에 서술되어 있듯 백제 자체가 성곽을 잘 구축하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했지만 신라에 병합되면서 일부가 파괴되었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한편 현재 '마한'으로 단순히 지칭하고 있는 전라도 지역을 계속 '마한'으로 부르는 건 잘못되었다는 설이 대두하고 있다. 《[[삼국지(정사)|삼국지]]》 〈위지〉 동이전 및 《[[진서]]》 〈동이전〉에서 '마한'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지 200년이 넘게 지난 시점까지 남부지역 일대가 어느 정도는 독자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마한의 마지막 조공 기사인 3세기 후반과 '마한' 영역이 완전히 백제에게 정복된 것으로 이견이 없는 6세기 중반 사이 시기에 '마한'이 사료에 뚜렷하게 등장하는 사례는 《송서》에서 [[야마토]] 정권이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 제군사'로 책봉을 요구해 백제만 빼고 받은 사례가 유일하다. 그러나 《송서》 <열전>에서는 이전과 이후의 사서들과 달리 한반도와 일본 열도 여러 국가의 내부 사정에 대한 기사 없이 책봉 기사만 기록하고 있어 책봉을 받은 당사국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전혀 없다. 무엇보다 저 기사는 소위 [[임나일본부설]] 문제에서 언급된 지 오래되어, 한국에서의 연구를 통해 야마토 정권이 뻥카를 던지며 외교를 한 흔적일 뿐 실제 한반도 남부의 사정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는 반박이 이미 자리잡았다. 다시 말해 사실로 믿을 수 없는 기사에만 '마한'의 이름이 잔존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최근 고고학계의 일각에서는 이 지역을 '영산강 지역' 내지 '전라도 남부 지역'이라고 하여 논란을 일으키지 않을 표현을 써서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아직까지 다수의 학자들과 전라남도 현지 지자체들은 대체로 '마한'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마한'이라는 단어 자체가 단일 세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넓게 퍼진 수십여 소국들을 통칭하는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변한이 가야로 명칭이 변한 것처럼, 영산강 유역 세력 또한 자신들을 지칭하는 별칭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라를 통해 기록이 후세까지 전달된 가야와는 달리 전라남도 마한에 대해서는 남은 문헌 자료가 거의 없고 거의 전적으로 고고학적 연구에 의존하기에 이를 밝혀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자주 오해되는 사실인데, 전라남도 마한으로 자꾸 잘못 통칭되고 있는 영산강 유역 세력은 실상은 오늘날의 전라남도 서남부 1/3밖에 차지하지 못한 군소 세력이었다. '''즉,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북 내륙 세력, 나중에 가야한테 포섭되어 잠깐 백제를 꽤나 긴장타게 만든 전라도 동부 섬진강 일대 세력, 요즘 고고학 발굴이 가장 핫한 편인 영산강 유역 세력 등 이 셋은 다 제각기 남이고 이해관계가 달라서 서로 뭉치는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영산강 유역 세력 탓에 주목받지 못하는, 전라도 동부 세력에 대해서 알아보자. 영산강 유역에 비해 경제든 문화든 인구든 분명히 뒤떨어졌던 섬진강 유역권, 즉 오늘날의 전남 동부는 그 역사적 전개가 대단히 특이한 편이었다. 기원전 4세기까진 오히려 영산강 유역권보다도 발전했고 잘 살았으나, 전국시대의 연나라가 고조선을 밀어내던 바로 그 시기에 영산강 유역권에 조선계 유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영산강 유역권이 섬진강 유역권을 크게 앞지르게 되었다. 이 우열은 섬진강 유역권이 가야의 교역 및 지배를 받아 크게 개발되는 4~6세기까지 무려 1,000년 동안 유지되었다. 섬진강 유역권은 4세기엔 [[안라국|아라가야]], 5세기엔 [[고자국|소가야]] 등과 거래를 터서 발전하다가 5세기 중후반 들어선 아예 [[반파국|대가야]]의 영역이 되어 크게 발전하게 된다. 훗날 백제는 대가야로부터 490년~512년 동안의 과정을 거쳐 무력으로 이 지역을 빼앗게 되며, 516년 들어 남원과 임실 일대는 대가야에게 다시 빼앗기지만 이때는 여수, 순천 일대를 굳건하게 고수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520년대 초 즈음에 남원과 임실을 완전히 대가야로부터 도로 빼앗아온 다음, 그 후에는 아예 경상남도 함양, 산청, 하동, 남해 등까지 들어가게 된다. 이 이후로 섬진강 유역권은 영산강 유역권과 마찬가지로 백제의 산하로 복귀하게 된다. 이걸 보면 백제가 전쟁없이 마한을 통합했다는 주장은 적어도 영산강 유역에 한해서만 사실로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전남북 동부가 가장 최우선 제휴 대상으로 택한 건 어디까지나 반로국(=대가야) 세력이었고, 백제가 이들을 산하로 데려오려면 군사력을 동원해 강제로 그걸 관철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만 백제가 그렇다고 섬진강 유역권에 살던 가야인들을 마구 죽이거나 쫓아내진 않은 것 같고, 한동안은 어느 정도 자치를 인정해주었으나, 보장받은 자치나 후대는 영산강 유역권에 비해 명백히 그만 못했으며, 이 과정에서 다시 영산강 유역권에 비해 뒤쳐지게 된다. 백제는 군수는 분명 중앙에서 파견하여 직접 지배를 관철했으나 현령격인 성주 자리는 가급적 토착 세력권에게 양보했고, 물론 영산강 유역 세력가들은 대부분 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섬진강 유역권 유력자들은 이런 대우를 받지 못했고 군수 밑의 성주까지 죄다 백제 중앙에서 파견된 자들이 도맡게 된다. 우선 이 지역은 신라 및 가야와의 접경지였기에 백제가 토착 세력만 믿을 수가 없었던 데다, 섬진강 유역권 자체가 동성왕에게 순순히 항복한 영산강 유역권과는 달리 대가야 편에 서서 저항을 멈추지 않고 무력으로 평정되었던 것이 이유였다. 다만 이 6세기 통합설이 간과하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고고학적 변화 양상은 정치체적 변화에 맞추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후행한다는 점이다.''' 일례로 [[고구려]]만 보더라도 《[[삼국사기]]》 상의 [[옥저]], [[한사군]] 지역에 대한 정벌 시점보다 실제적인 고고학적 변화 양상이 늦게 나타나지만 이를 두고 <고구려본기>의 해당 기사를 의심하진 않는데 이는 정치체가 멸망하거나 바뀌었다고 해서 토착 집단의 생활 양상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고구려본기>와 달리 <백제본기>는 초창기 연대부터가 왜곡되었기 때문에 백제사를 보수적으로 연구하는 경향이 있고, 그렇기에 백제의 마한 정벌 역시 최대한 보수적으로 보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보다 <백제본기>나 <신라본기>의 연대적 신뢰성이 많이 떨어져서 고구려사보다 백제, 신라사를 접근할 때 보수적인 설이 지배적인 경향이 다소 있다.] 아무튼 서구적 사고관의 영향을 받은 현재의 사학계는 편집자에 의한 왜곡 가능성이 존재하는 문헌 사료보다 실증적인 검증을 거친 고고학적 성과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고, 무령왕대에 가서야 백제가 마한 정복을 완료했다는 설은 분명 고고학적 성과에 기반한 것인데 고고학적 변화 양상이 무조건적으로 정치체의 변화와 동일한 시기에 딱 떨어져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마한 전 영역의 백제화 양상이 6세기 초에 발생한다는 사실이 무조건적으로 정치적 복속이 무령왕대 완성되었다는 점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6세기 통합설은 현재까지 과학적 접근에 기반한 가장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설임은 분명하지만 이 역시도 아직 안고 있는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마한)] ===== 백제의 직접통치 범위 ===== 6세기 초반 무렵 백제가 옛 마한 일대를 완전한 직접 지배지로 편성해 중앙 조정에 의한 직할 통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 된 현재는, 근초고왕대 이후 백제의 직접 지배 영역과 간접 지배 영역이 어디어디였는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5세기까지 백제는 적어도 경기도 남부, 충청도 북부, 전라도 서북부 지역 및 일본으로의 항로에 중요한 전남의 거점 몇 군데는 직접 지배를 실시했고, 충청도 남부 및 전라도 일부에 대해서는 간접 지배를 실시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경기 남부 및 충청 북부지역에서도 마한 재지세력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지역이 있는 반면 빠르게 백제화되는 지역도 있기 때문에 지역에 따른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여주는 유적이 [[화성]] 마하리 고분군과 [[오산]] 수청동 고분군이다. 화성 마하리와 오산 수청동은 모두 경기 남부지역에 위치하지만 무덤의 변화 양상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마하리 고분군은 목관묘(널무덤) 또는 목곽묘(덧널무덤)에서 석곽묘(돌덧널무덤)와 석실분(굴식돌방무덤)으로 변화한다. 반면 수청동 고분군은 주구토광묘(주구움무덤)라고 하는 마한의 특징적인 무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진다. 뿐만 아니라 같은 주구토광묘라고 하더라도 경기 남부지역과 충청 북부 그리고 각각의 지역 내에서도 무덤의 방향, 부장품(껴묻거리)의 위치 등에 차이가 나타난다. 즉, 지역적인 특색이 상당히 강했던 셈이다. 게다가 경기도 [[김포시]], 충청남도 [[서산시]] 등 서해안 지역을 따라서는 주구토광묘와 형태는 비슷하지만 축조방법이 다른 '분구묘'라고 하는 특징적인 무덤이 확인되고 있다[* 연구자에 따라 분구묘를 주구토광묘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간접 지배를 실시했던 것으로 보이는 충청도 남부 지역과 전라도 일부, 강원도 일부 영서 지역에서는 유력세력 또는 요충지에 위치한 세력에게 수준높은 물품을 하사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수준높은 물품이란 바로 '''금동제품'''. 원주 법천리, 공주 수촌리, 고창 봉덕리, 익산 입점리, 고흥 길두리에 있는 무덤들에서 백제의 금동관모, 금동신발 등이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는데, 간접 지배 지역에 대해서만 금동제품을 하사했다고 하기 어려운 것이 위에서 언급한 직접 지배에 해당하는 충청 북부지역에서도 금동제품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경기 남부지역까지가 직접지배의 한계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금동제품의 성격을 다르게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2014년 경기도 화성시 요리에서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백제의 세력권과 금동제품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더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 남부지역은 지역마다 다르나 5세기 후반 ~ 6세기 초반까지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세력이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영산강 일대에는 6세기까지 거대한 항아리를 무덤으로 사용하는 문화를 가진 재지 세력이 존재했음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이들이 백제의 영향력 하에 놓인 반독립 세력인지 백제와 별도의 독립 세력인지는 의견이 나뉜다. 대체로 과거부터 문헌사학계 및 고고학계 일부에서는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반독립 세력으로 보는 편이지만, 최근 고고학계 일부에서는 현장 발굴 연구를 바탕으로 독립 세력으로 보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다만 후자는 아직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진 못하고 있으며, 주로 이는 한성 공함 직후 이 일대가 잠깐 독자성을 확보한 것으로 해석된다. 섬진강 유역 일대는 별도 세력이니 뭐니 이전에 완전 가야 쪽으로 넘어가버린 쪽으로 해석된다. 단, 직접 지배로 편성된 건 영산강 유역 세력보다 적어도 20~30년 앞서는 것 또한 간과해선 안 되겠다.] 전라도 북부 및 금강 하구 지역은 백제의 금동제품이 확인되고 분구묘를 비롯한 마한의 무덤이 확인되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마한•백제 관련 고고학 연구는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있을 뿐 상당히 미흡한 실정이다. 때문에 마한•백제 역사 규명을 위해 향후 관련 지역의 본격적인 고고학 연구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연구는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개발로 대다수의 고분들이 파괴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북 초촌리 고분군의 경우 1978년 발굴 조사 당시 삼국시대에 축조된 고분이 211기에 달했으나, 현재는 거의 파괴된 상태다. 충청남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가장 북쪽의 금강 하구 지역은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5세기에 이미 마한의 분구묘가 백제의 석축묘로 대체되었다. 백제의 웅진 천도 무렵 이미 군산 지역은 백제 영역화가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사실 과거부터 군산 대야면 등에서 마한의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된 적이 있었다. 군산, 익산 지역은 백제 [[무왕(백제)|무왕]] 시절 <익산 천도설>이 크게 부각되면서 아무래도 백제사가 마한사보다는 문헌적으로 규명하기 쉽고 인지도도 높기에, 마한사 연구는 상대적으로 자제되었다. 그러나 이건 단순히 그 일대를 마한 아닌 백제로 언플하려고 일부러 연구를 억제한 건 아니다. 익산 일대가 백제의 제2수도로 자리매김된 건 사비백제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대목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후 지금 시점에 와선 익산 [[건마국]]에 대한 연구 또한 크게 진행되어, 건마국과 [[준왕]] 사이의 관계 또한 거의 규명된 단계에 있다.[* 익산 일대에 마한사 및 백제사 연구 현황이 복잡하게 얽힌 건, 익산이 초기 마한의 중심지이자 백제의 제2수도였던 까닭에 전승이 이 두 사실 내에서 분리되지 않고, 얽혀 실은 통일신라 말기 익산 사람들마저 뭐가 뭔지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견훤이 후백제 왕으로 취임하면서 한 연설이 뭔가 뒤죽박죽인 건 이것이 이유였다.] 군산 바로 아래인 구 이리시, 미륵산 일원과 완주 지역에서는 5세기 중엽까지도 마한 분구묘의 전통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 이유는 미륵산에서 모악산에 이르는 분지형의 공간적 범위, 곧 만경강을 중심으로 군집을 이루고 축조된 토광묘 집단은 마한 성립의 주체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군산 지역에 비해 마한 분구묘의 전통이 오랜 기간 지속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주 혁신도시 조성시 발굴된 고분에서는 이미 마한이 백제에 완전히 귀속된 이후인 백제 말기에 건설된 고분임에도 마한 분구묘 양식이 강하게 남아 있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최근(2018년) 발표된 전라북도 [[정읍]] 지역 고고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읍 지역에서는 웅진 시기(475~538년)에 마한계 분구묘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백제계 석축묘가 소수 분포하고 있었으나, 사비 천도(538년) 이후 백제계 석축묘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전라남도와 인접한 전라북도 정읍 지역은 백제의 웅진 천도 이후에도 간접 지배가 이루어지다 사비 천도 이후 백제에 완전히 병합된 것으로 해석된다. 즉 전라남도 마한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백제에 병합된 것이다. 정읍 지역의 마한 분구묘는 만경강 지역의 분구묘보다 규모가 크고 집단화되어 있어 이 지역에 강성한 재지 세력이 존재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일본서기》에서 《[[백제삼서]]》를 인용해 서술한 근초고왕 때 고사부리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사실일 수 있다. 왜냐하면 백제 고사부리성의 축성 시기가 4세기 중반으로 나오고 건축 양식도 백제계 토성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할 영역이 되었다고 하나 계속해서 마한 토호 세력의 존속이 나타나고 있기에, 일부 거점만 직접 지배하며 재지 세력에 의한 느슨한 간접 통치를 이루다 6세기 초반에 완전히 직할 영역이 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 위기 및 혼란 === [[침류왕]](재위 384년 ~ 385년) 때 불교를 수용했다(384년).[* 이웃 신라에서 불교가 토착 세력의 반발 속에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어렵게 수용된 후 곧바로 호국불교로 급속히 발전했던 것에 비해, 백제에서는 침류왕 때 수용된 이후 한동안 불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신라만큼 불교가 크게 융성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근초고왕]]의 사후 이어지는 [[근구수왕]](재위 375년 ~ 384년), [[진사왕]](재위 385년 ~ 392년), [[아신왕]](재위 392년 ~ 405년)대를 거치면서 국세가 현격히 약화되었다. 당시 한성백제는 고구려를 상대로 군사 활동을 벌였으나 국력이 크게 소모된 반면 영역화한 지역이 적었다. 근구수왕 대 [[평양성]]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진사왕 원년에 청목령(개성)에 방어성을 축조하고 관미령(한강 또는 임진강 연안)에서 전투하는 등 백제의 방어선은 이미 예성강 선으로 후퇴해 있었다. 예성강 방어선도 진사왕 말년에 [[광개토대왕]]에 의해 갈려버렸다. 백제는 외부로부터 고구려의 압박뿐만 아니라 내부의 끊임없는 정쟁과 권력 암투로 혼란한 시기를 보냈다. 야심과 집념의 소유자였던 [[아신왕]](재위 392년 ~ 405년)은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할 왕위를 가로채간 [[진사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왜국의 지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킨 후 진사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아신왕은 왕위에 오른 후 고구려 땅이 된 [[관미성]]을 차지하기 위해 수 차례 고구려를 공격(393년 정월, 394년 7월[* 이때는 수곡성을 공격했다.], 395년 8월, 395년 11월)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고구려의 반격으로 영토와 병력을 계속 상실하면서 백제의 국력이 상당히 소진되었다. 아신왕의 계속된 공격에 분노한 광개토대왕은 396년 백제 원정을 단행하여 한강 이북의 58성 700촌을 점령하고 백제 수도 한성을 포위했다[* [[광개토대왕릉비]] 2면 5행에 의거. 다만 학계에서는 58성 700촌 중 일부는 이전에 아신왕의 관미성 침략 때 반격으로 빼앗은 것을 일괄 합산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수도가 함략당할 위기에 처하자 아신왕은 성문 밖으로 나와 [[광개토대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는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그러나 이같은 굴욕적인 패배 이후 아신왕은 복수에 집착하여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위해 더욱 강도 높은 전쟁 준비에 매진했다. 아신왕은 397년 5월 왜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태자 영([[전지왕]])을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아신왕은 백성들을 수시로 군사 훈련과 축성 공사에 동원했다. 398년 마침내 고구려 정벌을 위한 대규모 징집을 실시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군사 훈련과 징집에 지친 백성들이 이웃나라인 왜, 가야 심지어는 고구려, 신라로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백제의 인구가 감소하면서 결국 고구려 정벌은 취소되었다. 백성들이 대거 신라로 도망가자 아신왕의 분노는 신라로 향하기 시작했다. 399년 아신왕은 가야, 왜와 연합해서 대규모로 신라를 공격하지만 신라와 동맹 관계에 있었던 광개토대왕이 출병하는 바람에 패배했다. 404년 고구려가 [[후연]]과 전쟁을 하고 있는 틈을 타 아신왕은 왜, 가야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고구려의 대방, 평양을 공격했다. 후연과의 전쟁 중에 있었던 광개토대왕은 급히 친위부대를 이끌고 나타나 왜와 백제, 가야 연합군을 섬멸했다고 하는데, 적어도 이 과정에서 백제가 경기도 북부와 개성의 주요 군사적 요지는 수복했던 걸로 보인다. 왕에 대한 국내의 불만이 극도로 높아진 상황에서 405년 아신왕은 정쟁으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나마 한성 포위 때 상대적으로 꽤 관대한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준 바 있는 광개토대왕의 고구려를 격분하게 만들었고, 강원도 영서 지방과 충북 일대는 끝내 되찾지 못하여 웅진백제 시기까지도 그 루트를 통해 침투해오는 고구려군에게 개로왕 시즌 2를 찍기 일보 직전까지도 갔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개로왕 때까지 더 게겨보는 건 불가능했다.[* 강원도 영서 일대가 없어진 상황에서 개성이라도 확보해놓지 않을 경우 한성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건, 이후 후대에서 여러 차례 증명된다.] [[왜]]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던 아신왕은 즉위 후 왜와의 우호 관계에 상당한 공을 들였었다. [[왕인]], [[아직기]] 같은 석학들을 보내어 선진 문화를 전파시켜 줌으로써 왜국의 발전과 선진화에 크게 기여했다. 또 아신왕 대의 대규모 징집을 피하기 위해 왜국으로 도망친 유민들의 행렬도 왜국이 한 단계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아신왕은 태자([[전지왕]])[* 재위 405년 ~ 420년]를 왜국으로 보내 장기 체류시키기도 했다. [[전지왕]]의 경우 왜국에 있다가 돌아와서 왕이 되었는데, 볼모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진짜 볼모라기보다는 백제의 국제 정세가 어지럽기 때문에 해외 유학을 보내놓은 것에 가깝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애당초 백제가 보냈다는 볼모에 대해서는 그 속까지 파고 들어가봐야 하는 게, 정작 '백제'와 '왜'라는 양 당사자 간에는 "선왕이 쌓은 우호를 잇기 위해 방문하였다"라는 《[[백제삼서]]》의 기록과 "내조하였다"라는 일본 쪽의 기록만 있지, 볼모를 보냈다는 기록은 '''없다'''. 즉, 《일본서기》에도, 또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의 기록에서도 '볼모'라는 표현은 전혀 없고 오직, 한참 후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만 나오는 표현일 뿐이다. 오히려 이 당시 왜국으로간 태자는 볼모가 아니라 [[외교관]]으로 갔다는 주장도 있으니, 지금 현재로서는 볼모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당시 태자를 맡길 만큼 백제 국왕과 왜국 대왕(오오키미)과의 관계가 매우 친밀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게 노객이 되겠다고 말하는 굴욕을 당한 직후 왜국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면서 태자를 보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볼모의 성격이라는 의견도 있다. 아신왕 사후 태자 영([[전지왕]])이 왜국에 있었던 까닭에 아신왕의 동생 훈해가 섭정이 되었으나 아신왕의 막내 동생 설례가 정변을 일으켜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부여설례|폐왕 설례]])이 되었다. 왜와 해씨 세력의 도움을 받은 태자가 내분에서 승리하여 왕위([[전지왕]](재위 405년 9월 ~ 420년))에 올랐지만, 즉위 후 [[해충#s-3|해충]], [[해수]], [[해구]] 등 그를 왕위에 올려준 외척 해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여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한편 《송서》에 의하면 [[서진]]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전지왕]] 때의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땅을 거점삼아 백제군을 두었다고 한다. [[전지왕]] 이후, 고구려가 [[장수왕]](재위 412년 ~ 491년)으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맞는 동안 백제는 계속해서 어린 왕이 즉위했다가 젊은 나이에 죽는 일이 반복되었다.[* 고구려 장수왕 재위 기간(412년 ~ 491년) 동안 백제는 [[전지왕]], [[구이신왕]], [[비유왕]], [[개로왕]],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을 거쳤을 정도이다.] 이 시기 백제는 잦은 섭정으로 외척 세력인 해씨 등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둘러싼 권력 암투 등으로 왕권이 약해지며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구이신왕]](재위 420년 ~ 427년)과 [[비유왕]](재위 427년 ~ 455년) 모두 정변으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변란으로 선왕이 살해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즉위한 [[개로왕]](재위 455년 ~ 475년)은 즉위 후 내분으로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다.[* 오랜동안 선왕 [[비유왕]]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할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수년간 개로왕이 제대로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을 정도로 심각한 내분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백제 조정이 어수선한 틈을 타 456년 12월 고구려 장수왕이 침공해 왔으나 신라의 원군으로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막아내었다. 오랜 내분 끝에 개로왕이 마침내 내분을 수습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 권력 투쟁 과정에서 밀려난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고구려로 달아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나중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는데 475년 장수왕의 백제 원정 때 이들이 선봉에 선 것이다.] 고구려의 위협에 압박감을 느낀 개로왕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협공을 가하자고 제안했으나 사신이 고구려에 발각되는 바람에 오히려 장수왕의 분노를 초래하고 말았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 원정을 단행했다. 개국 이래의 수도였던 한성이 다시 함락되고, [[개로왕]]과 [[왕족]]들이 고구려군에게 비참하게 처형되는 등 거의 파멸상태에 이른다(475년)'''.[* 《[[일본서기]]》에는 이때 백제가 멸망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국내 역사학자 중에서도 이때 백제가 사실상 멸망했고, 웅진에 나라를 다시 세웠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중국사 관련 정보|중국사]]에서도 [[서진]]이 멸망한 후, [[동진]]을 다시 세웠고, [[북송]]이 망한 후, [[남송]]을 다시 세우는 등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때 [[나제동맹]] 관계에 있었던 신라가 보낸 지원군 및 백제 남부 귀족들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한성이 함략되고 말았다. 그때 신라에서 지원군을 얻어 돌아오던 개로왕의 동생 혹은 아들 문주는 한성이 함략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문주는 신라군과 함께 위례성으로 입성해서 약 한 달 동안 한북으로 물러가 동향을 지켜보는 고구려군과 대치하게 된다. 소수의 백제 귀족 지원군도 합류하였다.[* 그러나 다수의 경우 위례성 함락 소식을 듣고 지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멸망했다고 기록되지만, 문주와 신라군의 존재로 백제는 완전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문주는 신라군과 함께 남하하여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갖고 있는 [[웅진]](공주)에 새로 도읍을 정하고 즉위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문주왕]](재위 475년 ~ 477년)이다. 이미 개로왕 때부터 지방 세력 등용과 중시는 계속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성 기반의 백제가 수도 자체를 남쪽으로 옮기는 것은 상당한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며, 우리 생각같이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한성 백제가 사실상 멸망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당장 고구려가 추격해올 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천도한 충청도 토착 귀족이 지지해 주지 않는다면 백제의 재건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문주는 신라군의 도움으로 웅진성을 구축했고, 충청남도 지역 토착 귀족 세력들이 문주왕을 지지해 주었다. 이 [[웅진]] 천도 시기는 [[영가의 난]]으로 [[서진]]이 멸망한 이후의 [[동진]]과 상황이 엇비슷하긴 했다. 북방 세력에게 박살나서 군주가 죽었고, 남쪽으로 피신했으며, 외적의 방어에 좀 더 쉬운 곳에 새로 도읍을 정했다는 것. 하지만 분명히 말하자면 그나마 웅진백제가 동진보다는 형편이 좋았다. 웅진백제에겐 신라라는 강력한 원군이 있었고, 중앙군도 편제가 모조리 다 무너진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성 공함 과정에서 고구려군에게 상당 부분 적지 않은 피해를 준 탓에 고구려 또한 강 건너 코 앞에 있는 신라-백제 연합군에게 감히 정면도전해오진 못했었다. 한편 고구려 장수왕은 부여문주가 남하한 것을 확인한 후 군대를 재편성하여 내려와 한성을 정식으로 점령하고,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충청도에 남성골산성[*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을 구축하며, 대전 월평 산성을 점령하여 주둔했으며 적어도 최소한 십수 년은 유지하면서 웅진백제를 대혼란의 아노미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럼에도 백제와 신라가 워낙 우주방어를 잘해냈기에 고구려의 한반도 제패는 좌절되고 말았으나 '''백제가 이 시기에 느껴야 했던 멸망의 공포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최근 고고학 연구가 더 진행된 현재, 고구려가 생각 외로 남한 지역에 고분을 꽤 남긴 상태이며, 어떻게든 예산 부족을 커버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가 남긴 군사 유적을 최대한 재활용하려 했다는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즉 점령에 결코 소홀하지 않으려 했다는 말. 고구려 입장에서 마침 [[물길#s-2]]이 활개치던 북쪽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지만, 몇 발짝만 더 가면 신라는 몰라도 개로왕 시즌2는 확실히 고지가 보이는 입장이라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신라에 대한 공격이 훨씬 더 날카로웠다지만 신라쪽이 오히려 잘 버텨내면서 역공했던 측면도 있었다. 때문에 웅진백제는 부여씨의 왕권이 크게 실추되어 각지에서 도적이 일어났고, 조정에서는 좌평 [[해구]] 등 외척 세력인 해씨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진로 등 진씨 세력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수시로 정변을 일으키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문주왕이 실추된 왕권을 다시 세우려고 동생 [[곤지]]를 중용했으나 이에 반발한 해구에 의해 문주왕이 [[암살]]되고 말았다. 이어 문주왕의 장남 [[삼근왕]](재위 477년 ~ 479년)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그러나 어린 왕은 실권이 없었으며, 권신 해구가 섭정을 위임받아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479년 해씨 세력과 정쟁을 벌이던 진씨 세력이 마침내 해씨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며 정권을 장악했고, 이때 삼근왕도 죽음을 당했다. ==== 끊임 없는 정쟁과 왕들의 시해 ==== 백제는 왕비족 가문들간의 끊임없는 정쟁과 정변이 연이어 터지며, 이러한 난리통 속에 수많은 왕이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제 명에 죽은 왕이 거의 없을 정도인데 역사적 기록이 비교적 자세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근초고왕]] 이후를 보면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17대 [[아신왕]], 폐왕 [[부여설례]], 19대 [[구이신왕]], 20대 [[비유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왕]]이 모두 정변으로 시해되었거나 또는 시해로 추정되는 의문스러운 최후를 맞았고, 21대 [[개로왕]]과 26대 [[성왕(백제)|성왕]]은 각각 고구려 [[장수왕]]과 신라군에게 대놓고 전장에서 참수당했다. 이후 27대 [[위덕왕]], [[태자 아좌]], 28대 [[혜왕]], 29대 [[법왕(백제)|법왕]]도 정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시해로 추정되는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원래 고대 시대 왕과 귀족은 부족장에서 시작되어 가장 강한 부족이 왕족이 되고, 그 다음으로 강한 부족이 왕비족이 되었다. 왕권이 약한 고대 국가에서 귀족(부족장)들은 사병을 거느린 봉건 제후나 마찬가지였다. 백제의 경우, 왕비를 독점적으로 배출한 왕비 가문([[대성팔족]])의 세력은 거의 부여씨 왕족에 근접할 정도로 막강했다. 이들 왕비족의 세력을 얼마나 빨리 억제시키느냐가 진정한 왕권 강화인 동시에 중앙 집권화가 되는 것이었는데[* 참고로 왕권 버금 세력이 사라진 것이 확실한 처음 시기는 왕비족이 사라지는 신라 [[태종 무열왕]] 대부터, 분권의 상징인 사병이 완전히 혁파되는 것은 [[조선]] [[태종(조선)|태종]] 시기는 되어야 한다.], 백제 왕족인 부여씨는 왕비족을 누르고 중앙집권화를 이루는데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백제의 왕비족들은 정변을 일으켜 반대 파벌 의 왕을 시해한 후, 정권을 차지해 새로운 왕을 앉히는 것을 반복했고, 이렇게 해서 즉위한 왕들은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귀족 세력들에게 권력을 내주고 마는 악순환이 백제 시기 내내 반복된다. 백제의 경우 왕족인 부여씨가 고구려로부터 이주해 온 세력이었기 때문에 인구 등 규모에 있어서 처음부터 한계가 분명했고, 이 때문에 한성 토착 세력이었던 '진씨'와 '해씨'의 도움 없이는 국가의 유지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백제에서는 토착 세력인 진씨와 해씨가 오히려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건국 때부터 진씨와 해씨라는 두 우열을 가리기 힘든 대등한 세력의 왕비족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 어쩌면 이러한 연이은 비극의 씨앗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제는 건국기부터 '해씨', '진씨'가 왕비 가문으로서 왕권 못지 않은 권세를 누려왔다. 이 두 가문은 정쟁을 통해 자신들끼리 정권 교체를 이루며 권력을 양분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정권 교체란 바로 '''왕의 시해'''다. 왕이 죽어야만 자체 가문 출신의 왕비로 교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웅진 천도 이후 [[동성왕]] 시대부터는 충청남도계 토착 세력인 '사씨', '백씨', '사택씨', '목씨' 등이 왕비족으로 가세하면서 왕비 가문은 [[대성팔족]]으로 확대, [[정사암]] 회의를 지배하게 된다. 이웃 나라들과 비교해 보자면, 고구려의 경우 왕비족이 절노부 하나여서 왕비족들 간의 정쟁이 발생할 여지가 없었다. 신라의 경우 건국 초기 왕비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6개 성씨([[경주 이씨|이씨]], [[정(성씨)|정씨]], [[최(성씨)|최씨]], [[손(성씨)|손씨]], [[배씨]], [[설씨]])가 있었다. 그러나 이 6개 성씨들은 서로 엇비슷한 세력을 가지고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특정 가문이 왕비족으로 부각되지 못했다. 이후 신라 왕족 김씨는 아예 [[성골]]끼리 통혼하는 관습을 만들면서 왕비족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대성팔족]]으로 상징되는 중앙 귀족들과는 별도로 지방 세력 역시 독립적인 힘이 상당히 강했다. 마한의 소국들이 순차적으로 백제에 병합되면서 마한의 기존 부족장들이 백제의 지방 귀족이 되었는데, 이들 지방 세력들은 백제 병합 후에도 독자적인 권력을 상당 기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475년 한성 함락 이후 백제가 위기 상황을 겪을 때 영산강 유역 세력은 사실상 독립하여 자체 국호로 외국에 사신을 보내기까지 하거나, 전남 동부 일대는 아예 가야에게로 이탈하고 만다. 하지만 이걸 갖고 백제가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건 큰 오해. 개로왕 때 백제-신라 연합군이 먼저 도착했던 건 그당시 마침 추풍령 일대에서 신라 정예군이 육성되던 시점이라 그 일대 신라 부대들[* 아이러니하지만, 후삼국시대에는 이 일대가 후백제에게 넘어가서 그 지역 신라 옛 부대들이 왕건의 고려를 저지하게 된다!]이 바로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이지, 백제 지방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아선 아니었다. 또한 이런 정쟁에는 위에 언급한 한성 함락 및 한강 유역 상실도 영향을 끼쳤다. 한성 및 한강 유역은 백제 왕실이 시작한 지역으로, 역사적 명분 뿐만 아니라 백제 왕권을 뒷받침하는 현실적인 군사,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남하로 이게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다. 이러니 혼란이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웅진백제 초기에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건 오히려 왕권 장악을 노린 현지 토착 귀족이나 남래한 옛 한성 귀족 세력의 다툼이 주 원인이지, 백제에게 복속한 마한 옛 거수국들이 정면도전한 것이 이유는 아니었고, 전남과 전북에 걸쳐 당시 세력을 유지한 마한 시절부터의 거수국 세력은 크게 보아 셋인데 이들은 저마다 정치적 견해나 경제적 이해 관계가 각기 따로인 집단들이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오히려 동성왕 당시 백제가 크게 국력이 신장된 것은 이 지방 세력들의 포섭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백제가 무력을 동원했지만, 이런저런 부분에서 나름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등 회유하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백제 중앙 정치가 어지러운 건 지방 세력들의 반란이나 이탈보다는 거꾸로 중앙 귀족들의 왕에 대한 도전이 이유였다. === 중흥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