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릉팔우)] [목차] == 개요 == 范雲 (451~503) [[소량]]의 [[명재상]]. 하남성 무음(舞陰) 출신. 자는 언룡(彦龍). 후대에는 문학가로도 알려져 있다. == 생애 == 6살 때 고모부 원숙명(袁叔明)을 따라 『모시(毛詩)』를 읽었다. 영민하고 학식이 풍부했으며, 문장을 잘 지어 붓을 대기만 하면 바로 문장을 이루었다. [[송(남조)|유송]]에서 원외산기랑(員外散騎郞)이 되었으며, [[제(남조)|남제]]에서는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이 회계태수(會稽太守)로 있을 때 진망산(秦望山)을 유람하다가 진나라 때 새긴 석문(石文)을 발견했는데, 다들 알아보지 못했지만 범운만이 유창하게 읽어 상빈(上賓)이 되었다. 이후 그의 문하에 머물며 왕부주부(王府主簿)를 지냈으며 소연, [[심약]](沈約) 등과 절친하여 [[경릉팔우]](竟陵八友)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후 영릉내사(零陵內事)와 광주자사(廣州刺史) 등을 역임했고, 지방 호족(豪族)들의 무고로 인해 하옥되었다가 사면되기도 했다. [[무제(양)|소연]](蕭衍)이 양나라를 세우자, 양의 [[개국공신]]이 되어, [[시중#3.1|시중]](侍中)과 산기상시(散騎常侍),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좌명(佐命)의 공으로 소성문개국후(霄城文開國侯)에 봉해졌으며, 이후 관직이 [[상서복야|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절친인 심약이 상서좌복야로 이 둘은 건안이경(建安二卿)으로 불리었다.]에 이르렀다. 그는 문필가로 더 유명한데 그의 시는 증답(贈答)한 작품이 많고, 심약과의 성실한 우정이 넘쳐 흐른다. 생전에 30권의 문집을 저술했지만, 오늘날에는 문집은 전해지지 않고 단편적인 시만 전해진다. 대표작으로는 송별(送別)[* 떠나는 사람을 보낸다는 뜻], 유소사(有所思)[* 그리워하는 이가 있다는 뜻], 효고(效古)[* 옛 시를 본뜬다는 뜻]등이 있다. 시호는 문(文). == 여담 == *[[자치통감]]의 기록으로 인해 [[정력왕]][* 5월 정사일(6일)에 소성문후(霄城文侯) 범운(范雲)이 죽었다. 범운은 마음을 다하여 황상을 섬겼으며 알면 행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고 번잡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끝까지 처리하니 정력(精力)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 범운과 심약은 절친인 동시에 양무제의 [[왕좌지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둘은 상서복야직을 나누어 맡았는데, 주위 사람을 굴리는 양무제의 스타일로 인해 격무에 시달렸다. 하지만 범운은 일이 많더라도 이를 끝까지 해내어 죽을 때까지 황제의 신임을 잃지 않았다. 반면 심약은 말년에는 심신이 경솔해지고 허해져서~~심약해져서~~ 제대로 직무를 볼 수 없었기에 매번 문책을 당했고, 사후 시호조차 황제의 명으로 바뀔 정도로 양무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양서)] [include(틀:남사)] [include(틀:양(남조)의 개국공신)] [include(틀:제(남조) 대사마부 구성)] [include(틀:건안이경)] [include(틀:역대 양(남조) 상서복야)] [[분류:양(남조)/인물]][[분류:451년 출생]][[분류:50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