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 [목차] == 개요 == 氾毓 생몰연도 불명 [[서진]]의 인물. 자는 치춘(稚春). 청주 제북군(濟北郡) 노현(盧縣) 출신. [[전한]] 시기 명망높은 유학자인 범승지(氾勝之)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범승지는 본래 "범(凡)"을 성씨로 썼으나, [[초한쟁패기]] 시절 전란을 피해 범수(氾水)를 건널 때 성을 "범(氾)"으로 고쳤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원래부터 氾을 성씨로 쓰던 [[둔황]] 범씨 집안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 생애 == 범육의 집안은 대대로 유학자를 배출해낸 집안으로 9족이 항상 화목하였고, 청주(靑州)에 정착해 일곱 대에 걸쳐서 그곳에 거주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 집안의 화목함을 칭송하며 이르길, > "아이에게 정해진 아비가 없고, 옷에는 정해진 주인이 없다." 라 하였다. 범육은 젊어서부터 고상한 지조를 갖추었고, 안빈낙도를 누리면서 학업을 이루고자 하는 뜻을 품었다. 이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범육은 부친의 묘소 곁에 막집을 짓고 30여 년 동안 정성스럽게 묘지를 관리하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아버지 묘지 관리에 보내다가 마침내 집에 돌아와서 두문불출하고 학업에 몰두하였다. 당시 범육은 청주의 또다른 은사인 [[유조(서진)|유조]], [[서묘]]와 더불어 학자로서의 명성을 나란히 하니, [[사마염|무제 사마염]]은 범육을 남양왕문학(南陽王文學), 비서랑, 태사참군으로 여러 번 초빙했으나 범육은 전부 응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여, 《[[춘추|삼전]]》에 주석을 달았고, 《춘추석의》(春秋釋疑), 《육형론》(肉刑論) 등 여러 서적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71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분류:서진의 인물]][[분류:몰년 미상]][[분류:지난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