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백제]][[분류:성씨/한국]][[분류:사라진 성씨]]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송화강 일대에 존재했던 한민족의 고대국가, rd1=부여, other2='부여'라는 이름을 가진 동음이의어, rd2=부여(동음이의어))] {{{+3 扶餘氏}}} [목차] == 개요 == [[백제]]의 [[국성]].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부여]] 왕가에서 나온 데서 따서 지은 것이 성씨의 유래이다. 온조의 아버지는 부여의 왕족 [[우태]] 혹은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 추모라고 했는데, 전자라면 부여 왕실의 직계 후손이고, 후자라 해도 고구려 건국 설화에 따르면 동명성왕 추모가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결국 백제 왕실은 부여 계승 의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경쟁자인 고구려보다 더 정통성 있는 부여의 적통임을 주장한 것이었고, 사비시대 [[성왕(백제)|성왕]]이 '[[남부여]]'로 국호를 바꾼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2글자 [[복성]]이지만 줄여서 여(餘)씨로 축약 표기하는 관습이 당시 백제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런 축약 표기는 중국이나 일본 기록에서 많이 확인된다. 예를 들면 [[위덕왕]] 부여창은 여창(餘昌)으로 기록되는 등. 백제에서는 부여씨뿐 아니라 다른 성씨도 사씨(沙氏)는 본래 사택씨(沙宅氏)로, 목씨(木氏)는 본래 목리씨(木刕氏)로 여겨지는 등 복성을 단성으로 줄여 부르는 사례가 많았다. == 역사 == 《[[삼국사기]]》에 의하면 부여씨는 [[온조왕]] 시기부터 사용되고 있는데, 중국이나 일본 측 기록과 교차되는 최초의 부여씨는 4세기에 재위한 [[근초고왕]](? ~ 375년)이다. 《[[진서]]》(晉書)에 의하면 '''여구(餘句)'''로 등장하는데, 이는 부여씨를 여씨로 축약한 것이다. 이후로도 중국 측 기록에서는 축약해서 '여(餘)'로 칭하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정작 진짜 부여는 근초고왕이 즉위하는 346년에 [[모용선비]]에게 멸망당한다는 것이 아이러니. [[백제멸망전]]과 [[백제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백제 부여씨들은 상당수가 [[당나라]]로 끌려가거나[* [[의자왕]], [[부여융]], [[부여효]], [[부여태]] 등의 백제 왕족들.] [[일본]]으로 망명했다.[* 백제부흥운동의 수뇌부에 속한 [[부여선광]], [[부여자신]], [[억례복류]] 등의 백제 왕족들.] 신라가 통일한 한반도에 잔류한 부여씨들은 정황상 서씨(徐氏)와 여씨(余氏) 등으로 성씨를 바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야 '부여씨'라는 성씨를 그대로 쓰는 사람은 더 이상 한중일 3국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서씨와 여씨는 물론 대성팔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능성 구씨|구씨(具氏)]], [[백(성씨)|백씨(白氏)]], [[임(성씨)|임씨(林氏)]]가 그러했듯 신라에도 상당수가 잔류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백제 왕족으로 추정되는 [[충상]],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한 [[부여충지]]와 [[부여충승]]은 [[문무왕]]에게 항복하여 신라로 넘어갔다.] [[대한민국]]에서는 [[부여 서씨]][*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시조로 삼는다.], [[이천 서씨]][* 부여 서씨를 비롯한 [[달성 서씨|달성]], [[대구 서씨|대구]] 등 여타 본관들의 대종(大宗)으로, 부여 서씨에서 중시조로 삼는 서존(徐存)이 다름 아닌 [[서희]]의 현손자다. 다만 부여 서씨와는 달리 백제 왕실의 후손을 자처하지는 않는다.], 의령 여씨[*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시조로 삼는다.]가 부여씨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는데, 보다시피 부여씨에서 서씨, 여씨로 글자를 바꾸었다고 족보에 전하고 있다. 복성인 '부여'를 한 글자로 줄여 칭하는 관습은 백제 당대의 중국 측 기록에도 종종 나오는데 이런 관습을 공식화한 것이다. == 백제 부여씨의 분파 ==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백제)|무왕]]의 조카 [[귀실복신]], 귀실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 다만 실제 [[근초고왕]]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은 낮은데, 해당 단락에서 등장하는 '근속왕'(近速王)이라는 인물은 왕이 아닌 국인, 즉 신하로 나와 있고 시기적으로 많이 차이가 나서 할아버지-손자 관계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찬성씨록》에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의 후예를 자처하는 가문도 기록되어 있다. 준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한왕]]의 직위를 박탈당했지만 그의 후예는 남아서 계속 제사지냈다고 하는 기록이 《[[후한서]]》, 《[[삼국지]]》 등을 통해서 나오는데 해당 가문으로 추정된다.]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출처는 노중국 교수의 《백제의 성씨와 귀족가문의 출자》, <<대구사학>> 89, 2007.]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백제)|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 '''[[오우치]]씨(大内氏)'''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칭했으며,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다.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오우치보다 상위 씨족으로 타타라씨가 있는데 현 오우치는 타타라우지로 취급되고 있다. 다만 타타라가 가야계라는 설도 있기 때문에 부여씨와 연관이 없을 가능성도 있다.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정말 의외의 가문이 부여씨 분파일 가능성도 있다. * '''후지와라(藤原)?''' - 후지와라의 시조인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진지하게 [[부여풍]] 설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 설이 사실이라면 후지와라 또한 부여씨의 일파가 된다. 다만 카마타리의 아들인 [[후지와라 후히토]]의 생모가 덴지 덴노의 후궁 출신으로 카마타리에게 하사했기 때문에 후히토는 덴지 덴노의 혈통이라는 설도 있다. ===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 '''[[해(성씨)|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 '백제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解)를 성씨로 삼았다.' - 《삼국유사》 권2 <기이>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조- 여담으로 일본서기 기록에 위덕왕이 고구려장수에게 일기토를 걸었을때 고구려왕실과 성이 같다 언급하였다. 즉 고구려와 백제는 해성을 가지고 있고 촌수가 멀어지면서 부여씨와 고씨로 나뉘어졌다 추정이 가능하다.]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문안식, <백제의 시조 전승에 반영된 왕실 교대와 성장과정 추론> , 《동국사학》40 한국교육학술정보원, 2004.]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일본서기》는 《삼국사기》와 달리 22대 문주왕을 21대 개로왕의 왕모제(王母弟), 즉 동복아우로 표현하고 있다. 모씨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왕모제를 동복아우가 아닌 왕의 어머니 형제인 외삼촌으로 해석하고, 남조 측 사서에서 문주왕과 동성왕을 여씨 + 이름의 축약형이 아닌 모도, 모대로 표현하고 있어 모씨 설을 주장했었다. 다만 왕모제는 주로 동복아우를 뜻하는 말인데다가 동성왕 역시 출자가 문주왕이 아닌 부여곤지로 기록되어 있어서 설득력을 잃었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 == 부여 부여씨(여씨)의 인물 ==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餘)씨'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출처는 여호규, 《백제의 요서진출설 재검토: 4세기 후반 부여계 인물의 동향에 관련하여》(2001), 강종훈, 《4세기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과 그 배경》.]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 [[현왕(부여)|여현]] * [[부여울|여울]]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철륵|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 [[여암(후연)|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 모용농은 여암의 난을 진압한 뒤 요동과 현도를 장악한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과 현도를 재탈환하게 된다. 단, 고구려가 요동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고 일부를 점거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 *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 출처: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의 코리안 디아스포라-고조선・고구려・부여계 이주민 집단 연구》.] == 백제 부여씨의 인물 == 백제의 군주들에 대해서는 [[백제/왕사]] 참조. [[진손왕]], [[태아랑왕]], 해양군의 경우 [[왕진이]]의 후손들이 만든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해당 항목 참조 *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 * [[우복]]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 * [[부여신제]] - 17대 아신왕의 공주. * [[부여기]] - 백제의 좌현왕. 개로왕의 친족을로 추정된다.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 * 부여고(夫餘古) * 부여력(夫餘歷) * 부여고(夫餘固)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 * [[부여적계]] - 백제의 왕족. * [[부여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 * [[사아군]] - [[순타태자]]와 동일인물? * [[임성태자]] - [[아좌태자]]와 동일인물?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 * [[아좌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 * [[부여교기]] - 30대 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 * [[부여새상]] - 의자왕의 아들 혹은 동생. * [[부여규해]] - [[부여풍]]과 동일인?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 [[부여선광]] - 부여용과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 * 일문낭장[* 인명이 아니라 당나라의 관직명이다.]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 * 백제대방군왕 - 이름 미상. 725년 당나라 봉선제에 참여했다.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백제)|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 부여창성 - 부여선광의 아들. * 부여양유 - 부여선광의 2남.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윤충]], [[의직]], [[충상]]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 성충과 윤충의 부여씨설은 조선상고사를 지은 신채호가 주장했고, 의직의 부여씨설은 이도학 교수가 주장했다.] === 전설상의 인물 === *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초(미야자키)|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 백제 멸망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왕족들은 쿠다라노코니키시씨, 쿠다라노아손씨, 타카노노미야츠코씨 등으로 사성받았다.]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 * 백제의 셋째 왕자(百濟第三王子):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만 나오는 인물. 엔닌을 태운 배가 고의도(오늘날 전남 하의도)에 배를 정박했을 때, [[흑산도]]에 백제의 셋째 왕자가 도망해서 들어가 피난을 갔다는 전승을 기록했다.[* 의자왕의 3남인 부여효는 멸망 당시 다른 왕족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간 점으로 볼 때 부여효일 가능성은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