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부여)] [include(틀:역대 부여 국왕)] [include(틀:부여)] ||<-2> {{{+1 '''부여 왕조[br]扶餘王朝'''}}} || ||<-2> '''기원전 4세기 ~ 494년''' || || '''국성''' ||해씨 || || '''창건자''' ||[[동명왕]] {{{-2 (? ~ ?)}}} || || '''마지막 군주''' ||[[잔왕]] {{{-2 (? ~ 494년)}}} || || '''국호''' ||[[부여]] {{{-2 (기원전 4세기 ~ 494년)}}} || || '''군주 직함''' ||[[왕]] {{{-2 (기원전 4세기 ~ 494년)}}} || || '''통치 국가''' ||[[부여]] {{{-2 (기원전 4세기 ~ 494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이 문서는 [[부여]]의 역대 [[군주]]들에 대한 정보를 담은 문서이다. 부여를 다루는 역사 기록은 불행하게도 매우 적으며, 그렇기에 부여의 역대 군주들이 누구였으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중국 사서인 《[[삼국지]]》<동이전>에는 부여의 위치나 지리, 풍속 등만 기록되어 있을 뿐 왕사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비롯한 국내 사료에도 부여의 초기 건국사만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부여의 역대 왕사를 정리해 보면 중간에 큰 공백기가 생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는 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로부터 그 후손인 대소왕까지의 기록은 남아 있으나 그 뒤의 기록은 부분 부분 끊겨 있어 제대로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 사서에 나오는 부여와 중국 사서에서 나오는 부여가 동일한 정치체인지도 의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단군]]의 아들 중에 [[부루]]가 있기 때문에 한국 사서의 부여는 [[고조선]]에 가까운 정치체지만, 중국 사서에 나오는 부여는 [[백제]]와 같이 [[위구태왕]]을 시조로 모신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 역대 군주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이 나라를 동부여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뒤에서는 동일한 나라를 북부여라고 기록하는 등 혼란이 있다. 게다가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추모(주몽)가 도망쳐 나온 나라를 동부여가 아닌 북부여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나라를 동부여가 아닌 북부여로 여기고 있다. 또한, 서기 285년 [[모용선비]]족이 침략해 [[의려왕]]이 자결하고 백성들이 동쪽의 [[옥저]]로 피난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곳에서 나라를 세운 것이 동부여라고 보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에 '동부여는 예전부터 우리(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주몽이 북옥저를 정벌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확한 건 아무도 모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1117|위구태 문서]]는 그를 제9대라고 표기하였다. 이에 따라 본 문서에서는 문헌에 등장한 순서대로 편의상 대수를 표기하였다. * 참고: [[조선상고사]] 중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2851336&cid=62042&categoryId=62042|2세기부터 의려왕까지]]. || 대수 || 국가 || 왕호 || 재위 기간 || 비고 || || 1 || 부여 || [[동명왕]] || ? ~ ? || 부여의 시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국내의 기록에는 부여의 시조를 해모수라 했으나, 중국 측의 기록인 《[[후한서]]》에는 동명을 부여의 시조로 기록했다. 《논형》에 남아 있는 설화가 고구려의 [[추모왕]]([[동명성왕]])의 건국 설화와 판박이라서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연남산]] 묘지명> 등에 [[동명왕]]과 [[추모왕]]이 별개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기에 동일한 인물이 아닐 가능성도 존재한다.]. || ||<-7><#dcdcdc> .[br].[br]. || || 1 || 북부여 || [[해모수]] || 기원전 59년 ~ ? || [[파일:해모수.png|width=180]][br]북부여 건국[* 《[[삼국유사]]》 에 따르면 국왕 [[해부루]]가 재상 아란불의 말을 듣고 가섭원으로 천도하자 기원전 59년 음력 4월 8일에 그 옛 터에 북부여를 건국했다. 주몽의 아버지로도 알려져 있으나 설화적 윤색을 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 || 2 ||<|3> 동부여 || [[부루왕]] || ? ~ ? || 가섭원 천도 || || 3 || [[금와왕]] || ? ~ ? || [[파일:46_금와왕과_유화부인.png|width=250]] || || 4 || [[대소왕]] || ? ~ 22년 || 죽을 때 '''80대 노인'''이었음. || || 1 ||<|3> [[갈사국]] || [[갈사왕]] || 22년 ~ ? || [[대소왕]]의 동생, [[갈사국]] 건국[br]도두왕의 할아버지, [[호동왕자]]의 외증조할아버지 || || 2 || □왕 || ? ~ ? || 갈사왕의 아들.[br]도두의 아버지. || || 3 || [[도두왕]] || ? ~ 68년 || [[고구려]]에게 항복[br]77년 부여 군주으로서 고구려에 조공 || ||<-7><#dcdcdc> .[br].[br]. || || ? ||<|3> 북부여 || [[부여왕#s-2|□왕]] || ? ~ ? || 서기 49년 한나라에 조공을 보냄 || || ? || [[시왕(부여)|시왕]] || ? ~ ? || || || ? || [[부태왕]] || 2세기 || 167년에 현토를 공격함. || ||<-7><#dcdcdc> .[br].[br]. || || 1 ||<|6> 북부여 || [[위구태왕]] || ? ~ ? || 공손도 가문의 여자와 혼인함. || || 2 || [[간위거왕]] || 2세기 ~ 3세기 || || || 3 || [[마여왕]] || 3세기 || 간위거왕의 서자.[br]간위거왕이 적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뒤를 이음. || || 4 || [[의려왕]] || ? ~ 285년 || 마여왕의 아들. 6세에 즉위함. || || 5 || [[의라왕]] || 286년 ~ ? || || || 말대 || [[현왕(부여)|현왕]] || ? ~ 346년 || 마지막 군주? || 부여는 494년에야 완전히 멸망했으나, 현왕 이후로 세력이 급속히 쇠약해져[* 현왕을 포함한 왕족들이 모두 전연으로 끌려갔다.] 현왕을 사실상 마지막 군주로 친다. 이후 [[부여울]](餘蔚)[* 현왕이 끌려간 뒤에 낳은 아들로 보인다. 서기 384년 전연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잔왕]](孱王)[* '잔(孱)'의 뜻은 '잔약하다, 나약하다'다.] 등이 기록에 보이나 계보가 확실하지 않다. === 종합 === * 기록상 군주들의 재위기간 년도 사이에 공백이 많다. || 대수 ||
왕호 || 성명 || 재위 기간 || 비고 || || || [[동명왕]] || 동명(東明) || || || ||<-5><#Dcdcdc> .[br].[br]. || || 1대 || [[해모수|모수왕]] || 해모수(解慕漱) || || || || 2대 || [[해부루|부루왕]] || 해부루(解夫婁) || ? ~ B.C 60년 || 가섭원 천도. 이칭 [[영품리왕]] || || 3대 || [[금와왕]] || 해금와(解金蛙) || B.C 60년 ~ B.C 24년 || || || 4대 || [[대소왕]] || 해대소(解帶素) || 기원전 20년 경 ~ 22년 || || ||<-5><#Dcdcdc> .[br].[br]. || || || [[부여왕#s-2|□왕]] || 해□(解□) || ? ~ ? || || ||<-5><#Dcdcdc> .[br].[br]. || || || [[시왕(부여)|시왕]] || 해시(解始) || ? ~ ? || || || || [[부태왕]] || 해부태(解夫台) || 2세기 || 167년에 현도군을 공격함. || || || [[위구태왕]] || 해위구태(解尉仇台) || 2세기 || 공손도 가문의 여자와 혼인함[br][[구태]]와 동일인이라면 [[대방군]]의 초대 군주 || || || [[간위거왕]] || 해간위거(解簡位居) || 2 ~ 3세기 || || || || [[마여왕]] || 해마여(解麻余) || 3세기 || 간위거왕의 서자. 간위거왕이 적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뒤를 이음. || || || [[의려왕]] || 해의려(解依慮) || ? ~ 285년 || 마여왕의 아들. 6세에 즉위함. || || || [[의라왕]] || 해의라(解依羅) || 286년 ~ ? || || || || [[현왕(부여)|현왕]] || 현(玄) || ? ~ 346년 || 마지막 군주?[* [[의라왕]]의 재위는 백제 [[책계왕]]과 동시에 시작되고, [[현왕(부여)|현왕]]의 재위는 백제 [[계왕]]과 동시에 끝난다. 따라서 이 둘이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조손 관계일 것이다.] || || - || [[여울|울왕]] || 여울(餘蔚) || ? ~ ? || [[후연]]의 부여왕 책봉 || ||<-5><#Dcdcdc> .[br].[br]. || || ?? || [[잔왕]] || ? || ? ~ 494년 || 마지막 군주? || == 계보 == ||<-999>
'''부여'''(북부여)[* 한국 사서에 등장하는 부여왕.] || ||<#997000><-4>'''1. [[해모수|{{{#ffffff 모수}}}]]''' || ||<#997000><-2>'''2. [[해부루|{{{#ffffff 부루}}}]]''' ||<-2><#FFC0CB> [[동명성왕|주몽]] || ||<-2><#997000>'''3. [[금와왕|{{{#ffffff 금와}}}]]''' ||<#FFC0CB> [[고구려/왕사]] ||<#FFC0CB> [[백제/왕사]] || ||<#997000>'''4. [[대소왕|{{{#ffffff 대소}}}]]''' ||<#997000>'''1. [[갈사왕|{{{#ffffff 갈사왕}}}]]''' || || ||<#997000>'''2. {{{#FFFFFF ?}}}''' || || ||<#997000>'''3. [[도두|{{{#ffffff 도두}}}]]''' || ||<-999>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부여왕''' || ||'''1. [[동명왕|동명]]''' ||<-2><#dcdcdc><|3> || ||<#FFFFFF> {{{#ffffff .}}} [br]{{{#ffffff .}}} [br] {{{#ffffff .}}} || ||<-3>?. [[부여왕#s-2|해□]] || ||<-3><#FFFFFF> {{{#ffffff .}}} || ||<#ffc0cb>? .[[시왕(부여)|해시]] ||<-2><#dcdcdc> || ||<#FFC0CB>?. [[위구태왕|해위구태]] ||<#dcdcdc> ||?. [[부태왕|해부태]] || ||<#FFC0CB>?. [[간위거왕|해간위거]] ||||<#dcdcdc><|12> || ||<#FFC0CB>?. [[마여왕|해마여]] || ||<#FFC0CB>?. [[의려왕|해의려]] || ||<#FFC0CB>?. [[의라왕|해의라]] || ||<#FFFFFF> {{{#ffffff .}}} || ||?. [[현왕(부여)|현(玄)]] || ||<#FFFFFF> {{{#ffffff .}}} || ||[[부여울]] || ||<#FFFFFF> {{{#ffffff .}}} [br]{{{#ffffff .}}} [br] {{{#ffffff .}}} || ||?. [[잔왕]] || == 번외 == * 《[[제왕운기]]》에서 '부여(扶餘) 부마대왕(駙馬大王)'이라는 인물이 언급되는데, [[위구태왕]]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항목 참조. == 기록 == * 49년에 후한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 111년에 부여왕이 낙랑을 공격했다. * 121년에는 고구려 [[태조대왕]]이 마한과 예맥의 수천 기병을 인솔해 현도군을 포위할 때 부여왕이 아들인 위구태로 하여금 20,000여 명을 거느리고 주와 군과 힘을 합쳐 그들을 격파했다. * 136년에 부여왕이 직접 후한을 방문했다. * 156년 ~ 181년 사이 선비족 [[단석괴]]가 영토를 확대하면서 선비족과 접경하였다. * 167년 부여왕인 [[부태왕]]이 현도군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 174년 후한과 국교를 재개했다. * 190년 ~ 204년 사이에 [[공손도]]의 종녀와 [[위구태왕]]이 혼인하면서 유대를 강화했다. * 220년 ~ 226년 사이에 [[읍루]]가 부여의 지배에서 벗어났는데, 부여가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복속시킬 수 없었다. * 240년 ~ 247년 사이에 일어난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당시, 부여는 조위군에게 군량을 제공했다. * 285년에 모용선비부가 동쪽으로 부여를 공격하자 의려왕이 자살했고 그의 자제들은 도망가 옥저로 들어갔다. * 346년 [[전연]]의 침공을 받고 [[현왕]] 등 50,000명이 전연으로 끌려갔다. * 410년 '[[동부여]]'로 기록된 세력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의해 정벌당했다. * 457년 [[북위]]에 사신을 파견했다. * 494년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고구려에 들어가 [[문자명왕]]에게 나라를 바치고 항복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한국사의 역대 왕조 및 지도자들)] [[분류: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