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백제의 유민]][[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몰년 미상]] 扶餘文思 생몰년도 미상 [목차] == 개요 ==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의 아들 융(隆)에게 이르기를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버렸고, 숙부는 자기 마음대로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泰)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백제]]의 왕족. [[의자왕]]의 손자로 [[부여융]] 또는 [[부여효]]의 아들이다. 여기서 부여효를 태자, 부여융은 왕자로 기록했고 문사는 '태자의 아들'이므로 효의 아들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효를 따라 [[웅진성]]으로 떠나지 않고 [[사비성]]에 잠시 남았다가 [[부여융]]과 상의하고 함께 뒤늦게 밧줄을 타고 탈출한다는 것이다. 원래 융이 백제 태자였다가 효가 태자 자리를 빼앗았다는 점에서 융과 효의 사이가 좋았을 이유가 없으므로 의아한 대목인데 이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부여문사가 부여융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만약 부여효의 아들이라고 보면 그만큼 백제멸망전 당시 상황이 예전의 악연 같은 건 신경쓰기 힘들 정도로 긴박했다는 것일 수도 있다. == 생애 == [[660년]] 사비성 전투에서 부여융과 함께 성을 빠져나와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 당시 의자왕은 태자 부여효와 함께 [[웅진성]]으로 파천한 상태였고, 2번째 왕자인 [[부여태]]는 칭왕해서 사비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부여태는 부여융과 부여문사 및 백성들의 이탈을 막지 못했고, 결국 [[소정방]]의 당군이 사비성에 올라와 깃발을 세우자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게 된다. == 기타 == * 《삼국사기》 <백제본기> 660년조에서는 부여효가 태자로 나오지만, 중국 측 기록에서는 [[부여융]]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 <소정방전>에는 '적손문사(嫡孫文思)', 《신당서》 <소정방전>에는 의자왕의 손자(義慈孫), 《자치통감》에서는 (부여)융의 아들 문사(隆子文思)로 등장한다.] * 부여융의 아들이 맞을 경우, [[부여문선]]과 [[부여덕장]]은 그의 형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