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운대 28장)] [include(틀:후한서)] 傅俊 (? ~ 31) [목차] == 개요 == 양한교체기의 인물로, 자는 자위(子衛). 예주 영천군(潁川郡) 양성현(襄城縣) 사람이다. [[운대 28장]] 중 한명으로 서열 21위에 속한다. == 생애 == [[광무제|유수]]가 형 유연(劉縯)과 함께 용릉(舂陵)에서 [[경시제]] 유현(劉玄)을 추대하고 세력을 뻗쳐 영천군을 점령해나갔다. 당시 부준은 영천군 산하 어떤 현(縣)의 정장(亭長)으로 근무하면서 유수의 군대를 영접하니, 유수는 그를 자신의 교위로 삼았다. 양성을 지키던 신나라의 관리는 이 소식을 듣고 부준의 모친과 동생, 친척들을 전부 잡아다 멸하였다. 부준은 유수를 따라다니며 신나라와 싸웠고, [[곤양대전]]에서 왕심(王尋)을 격파할 때 공을 세워 편장군에 임명되었다. 유수가 낙양을 공략하러 떠나자 부준은 별동대를 이끌고 경(京)과 밀(密) 땅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유수는 매우 기뻐하며 그의 전공을 치하하고 고향 양성으로 돌아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그의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이후 유수가 경시제의 견제를 받아 하북을 정벌하러 떠났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부준은 자신의 빈객 10여 명을 거느리고 서둘러 북으로 달려가 한단(邯鄲)에서 유수와 합류했다. 유수는 부준에게 영천 출신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매 정벌마다 따르게 하였다. 건무 원년(25년), 유수가 황제에 즉위하자 부준을 시중(侍中)에 임명하고 이듬해에 곤양후(昆陽侯)로 봉하였다. 하지만 부준은 군사를 거느리고 전장에 나가는 것을 훨씬 선호하고 관리로서 조정에 남아 공무를 보는 것을 불편해하였다. 건무 3년(27년), 광무제와 종군하여 등봉(鄧奉)의 난을 무사히 진압하였다. 당시 여구(黎丘)에서 초여왕을 자칭한 군벌 진풍(秦豐)이 호왈 10만여 무리를 모아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광무제는 부준을 적노장군에 임명하고 정남대장군 [[잠팽]] 휘하에 배속시켜 진풍 토벌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잠팽은 부준에게 따로 별동대를 주어 강동 지역을 경략하게 하니, 부준은 적들을 상대로 승승장구하여 양주(揚州)를 완전히 평정하고 다시 잠팽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건무 5년(29년), 잠팽은 수 차례 진풍과 격전을 벌인 끝에 대승을 거둬 진풍을 여구성에 몰아넣고 포위하였다. 광무제는 친히 순시를 와 포위망을 살펴보고는 진풍의 세력이 약소해졌다고 판단해, 건의대장군 [[주우(건의대장군)|주우]]로 하여금 잠팽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그리고 잠팽과 부준에게 따로 명을 내려 이릉(夷陵)에서 할거 중인 군벌 전융(田戎)을 토벌하라 하였다. 부준은 잠팽을 따라 강릉(江陵)에서 영격하러 나온 전융의 군대를 대파하고 전융의 처자와 전융군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승전 후 잠팽은 진향(津鄕)에 주둔하면서 각 지역에 항복을 권유하는 한편, 부준과 편장군 방맹(龐萌)에게는 군사를 주어 계속 남진하게 하였다. 건무 7년(31년), 광무제의 부름 받고 군대를 돌려 수도 낙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수도에 귀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였다. 시호는 위(威).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부창(傅昌)은 훗날 무호후(蕪湖侯)로 전봉되었으나 당시 황제였던 [[장제(후한)|장제]]에게 봉지인 무호가 가난하다며, 돈 50만 전을 받는 대신 관내후(關內侯)로 깎아달라 징징거렸다가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관내후로 강등되었다. [[분류:후한의 인물]][[분류:한나라의 공신]][[분류:31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