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한국의 역사)] [include(틀:북한의 최고통치기관)] ||<-3> {{{+1 {{{#fff '''북조선인민위원회'''}}}}}} [br] '''{{{#fff 北朝鮮人民委員會}}}''' [br] '''{{{#fff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 ||<-2> [[파일:북조선인민위원회 국기.svg.png|width=150]] || [[파일:소비에트 민정청.png|width=100]] || ||<-2> [[파일:북한 국기.svg|width=150]] || [[파일:北朝鮮人民委員會徽章.png|width=100]] || ||<-2> '''{{{#fff 국기}}}'''[* [[북한]]도 처음엔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했으나 1948년 7월 10일 이후에는 [[인공기]]를 국기로 제정하면서 태극기는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당시 [[소련/국기|소련 국기]]도 준 국기 수준으로 쓰였다.[br][[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width=100]]] || '''{{{#fff 국장}}}'''[* 1948년 7월부터 쓰였고, 그 이전에는 위의 국장이었다.] || ||<-3> [[파일:500px-Locator_map_of_North_Korea_1945-50.svg.png|width=100%]] || ||<-3> '''{{{#fff 1946년 2월 16일 ~ 1948년 9월 9일[br](2년 78일)}}}''' || ||<-2> '''{{{#fff 성립 이전}}}''' || '''{{{#fff 정부수립 이후}}}''' || ||<-2> '''[[소련군정|{{{#ffd700 소련군정}}}]]''' || '''[[북한|{{{#ff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fff 국가}}}''' ||<-2>[[애국가(북한)|애국가]][* 북한도 처음엔 [[Auld Lang Syne|올드 랭 사인]]의 [[애국가]]를 사용했다. 그러나 1948년 7월 이후 자신들만의 [[애국가(북한)|국가]]를 제정한다.] || || '''{{{#fff 위치}}}''' ||<-2>[[38선]] 이북의 [[한반도]] 부분 || || '''{{{#fff 수도}}}''' ||<-2>[[평양]](사실상) || || '''{{{#fff 정치체제}}}''' ||<-2>[[일당제]] [[사회주의]] || || '''{{{#fff 위원장}}}''' ||<-2>[[김일성]] || || '''{{{#fff 공용어}}}''' ||<-2>[[한국어|조선어]] || || '''{{{#fff 민족}}}''' ||<-2>[[한국인|조선인]] || || '''{{{#fff 종교}}}''' ||<-2>[[국가무신론]] || || '''{{{#fff 통화}}}''' ||<-2>[[조선 엔]], [[북한 원#s-2.1|소련 군표]],,(1946~1947),,[br][[북한 원]],,(1947~1948),,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태극기와_혹부리우스 (1).jpg|width=700]][* '영도자'라는 표현을 썼는데 현재의 [[문화어|북한 표준어]] 표기 방식과는 다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한과 북한의 언어 표기 방식은 공히 [[한글학회|조선어학회]]가 정한 조선말 표준어 모음에 기반했기에 거의 같았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직후 조선어 신철자법을 발표하면서 [[두음법칙]]을 폐지했기 때문에 현재 북한에서는 '령도자'라고 한다. 사진은 1948년 2월 8일 평양역 앞 광장에서의 조선인민군 창설식 모습으로, 잘 보면 김일성 사진 양옆에 '''[[태극기]]가 있는데,''' 사실 이는 [[8.15 해방]] 이후 북한 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는 북한도 태극기를 썼기 때문이다.] '''북조선인민위원회'''{{{-2 (北朝鮮人民委員會)}}}는 [[소련군정]]이 끝나자,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로동당]]에 의해 건설된 중앙정권기관이다. 사실상 [[정부]]로서 운영되었으며 현재 [[북한]] 정부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공식 건국일은 1946년이 아닌 1948년으로 인정되며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남북 분단]]의 근본적인 원인을 북측이 제공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 상세 == === 역사 === [[1946년]] [[2월 8일]], [[조선로동당]]이 개최한 '북조선 각 정당·사회단체·각 행정국 및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표 확대협의회'에 의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이 결정되었다. 다음날인 2월 9일 [[소련]]의 통제 하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다. 2월 15일에는 [[소련]]의 [[군정#군정청]]이 공식적으로 종식된다. 그러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설립 의도는 소련이 북한에 [[사회주의]] [[위성국]]을 세우려는 의도였고 김일성은 소련의 지시대로 행동한다. [[1947년]]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로 개칭되었다. 1946년 3월 8일부터 [[지주]]의 토지를 몰수, 분배하였고, 주요 산업들을 국유화시켜 [[사회주의]] 정책을 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가혹하게 진행되어 유산가와 지주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정의 지원아래 김일성의 지시로 강압적으로 시행되었다. 많은 수의 지주가 학살되거나 오지로 추방되었고 살아남은 수는 남한으로 월남하였다. 그 이후부터 남북간 접촉이 두절되었고, [[남북분단]]이 점점 현실화되어갔다. 또 [[미국]]-[[소련]]간의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동년 11월 3일, 인민위원회 선거를 했다. 1948년 2월 8일에는 사실상 북한의 군대인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1948년 7월에는 [[태극기]]와 [[Auld Lang Syne|올드 랭 사인]] [[애국가]]를 폐지하고 독자적인 [[인공기|국기]]와 [[애국가(북한)|국가]]를 가지게 된다. 1948년 8월 15일에는 [[남한]]의 [[미군정]]이 끝나면서 [[소련군]]이 철수했다.[* 다만 철군과정에서 장비들은 모조리 조선인민군에게 넘겨주었고 남침 준비를 위한 군사고문단은 철수하지 않고 남았다,] 1948년 8월 25일에는 최고회의 선거를 하였으며, 그해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한 [[북한]]이 수립되면서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계승된다. === 구성 === 상위에 북조선인민회의가 있었다. 북조선인민'''회의'''가 입법부였고, 북조선인민'''위원회'''가 행정부였다. 북조선인민위원회 외에도 각 자치단체별로 (도·시·군·구) [[도청(행정)|지역]][[시청|인민]][[군청|위원]][[구청|회]]가 있었다. 이는 현 북한에도 이어져, 도청·시청을 도인민위원회·시인민위원회라 하며, [[도지사]]와 [[시장(공무원)|시장]]을 도인민위원장과 시인민위원장이라 한다. 하지만 사실 북한에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행정부]]보다 [[최고인민회의|입법부]]가 우선이고, 입법부에서도 '''[[조선로동당|당]]'''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도·시인민위원회보다 도당위원회, 시당위원회가 더욱 힘을 발휘한다. == 여담 == * 향린교회 전(前) 담임목사 홍근수 목사의 형 홍동근 목사는 월남 전 1946년 11월 3일 인민위원회 선거에 반대표를 던졌다고 한다. == 관련 인물 == * [[강건(북한)|강건]] * [[김광협]] * [[김두봉]] * [[김무정]] * [[김원봉]] * [[김일성]] * [[강량욱]] * [[김책]] * [[남일]] * [[리승엽]] * [[박헌영]] * [[방호산]] * [[백남운]] * [[이극로]] * [[이반 치스차코프]] * [[조만식]] * [[최용건]] * [[최용달]] * [[최창익]] * [[허가이]] * [[허정숙]] * [[허헌]] == 둘러보기 == [include(틀:북한의 역사)] [[분류:1946년 설립]][[분류:1948년 해체]][[분류:북한의 역사]][[분류:20세기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