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후삼국통일전쟁)] ||<-3><#C0C0FF><:> {{{+1 '''비뇌성 전투[br]非惱城 戰鬪'''}}} || ||<:><#C0C0FF> '''시기''' ||<-2> [[899년]] 음력 [[7월]] || ||<:><#C0C0FF> '''장소''' ||<-2>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안성시 죽주산성, 높이=224px, 너비=100%)]}}} [br] [[신라]] 비뇌성[br](현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구체적으로 비뇌성이 어디인지는 불명확하나 현재는 [[이도학]] 교수의 의견인 안성시 죽주산성([[기훤]]의 본거지)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죽산은 원래 안성이 아니라 다른 동네였는데 [[일제강점기]] 때 죽산군이 안성군에 합병돼 2023년 현재 안성시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죽산면으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 [[안성IC]]가 아니라 [[중부고속도로]] [[일죽IC]]로 나와야 한다. 경부고속도로 안성IC로 나오면 죽산면까지 갈 방법이 없다. 경부에서 죽산면으로 가려면 안성IC에서 빠져가지고 [[38번 국도]]를 한참 타야 한다.] || ||<:><#C0C0FF> '''원인''' ||<-2> 통일 신라 말기, 독립 호족 세력간의 충돌. || ||<:><#C0C0FF> '''교전세력''' || {{{+1 궁예}}} || {{{+1 양길}}} || ||<:><#C0C0FF> '''지휘관''' || '''[[궁예]]''' || '''[[양길]]''' || ||<#C0C0FF><:>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 ||<#C0C0FF><:>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C0C0FF> '''결과''' ||<-2> 궁예, 한반도 중부 지역 장악. || ||<:><#C0C0FF> '''영향''' ||<-2> 후고구려 건국, '''후삼국의 정립'''. || [목차] [clearfix] == 개요 == 899년에 벌어진 [[후삼국시대]]의 전투. 이 전투로 궁예가 한반도 중부 지역의 패자가 되고 양길의 세력은 몰락했다. 후고구려 건국의 기반이 되는 전투. == 발단 == [[원주시|북원]]에서 거병한 [[양길]]은 후삼국 시대 초기에 일어난 호족 중 상당한 세력을 쌓았다. 그 과정에서 [[기훤]]에게서 벗어난 [[궁예]]를 받아들이는데 '''이것이 모든 재앙의 시작이었다.''' 궁예는 동진하여 명주를 접수하고 서진하여 철원과 패서 지역까지 땅을 넓히고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신라]]에게 반기를 들고 독립 세력을 형성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진정한 의미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왕 칭호를 사용한 것은 901년이다. 견훤도 처음 왕을 칭하고나서 몇년 후에야 비로소 후백제를 건국했는데 견훤은 궁예보다 훨씬 빠른 892년에 이미 왕을 칭했으며 900년에 후백제를 세웠다.] 실제로 홀대했는지는 몰라도(딸을 준 것은 드라마에서의 창작.) 궁예의 원래 병력이 600명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애매하다. 나중에는 5,000명을 넘어서 만 단위까지 등장하지만 각종 호족들이 활개치던 초기에 이게 많은 병력인지 적은지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 다만 고려 후기 한 지방을 석권한 원수들의 사병이 500수준에, 고려 중앙정부를 먹어치운 최씨정권은 3000, 동북 정규군 세력에 여진족 병력까지 빨아먹은 [[이성계]]의 가별초가 3000이었음을 고려하면 일개 지방 군벌 입장에서 500-600은 절대 적은 숫자는 아니다. 아무튼 궁예가 커지자 양길은 주변 호족들을 규합하여 비뇌성에서 궁예와 전면전을 벌이는데…. == 전면전, 그리고 궁예의 승리 == 당시 궁예의 영토는 명주 대부분 + 삭주[* 강원도 영서 지방] 북부 + 한주[* 경기도 + 황해도] 북부였고, 양길의 영토는 삭주 남부 + 한주 남부 + 명주 남부였다. 궁예가 명주 북부를 장악한 후 약 4,000명의 병사를 모았다는 대목이 나오고, 이후 서진해서 영토는 3배 이상이 되었으므로 1만명 이상은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양길 역시 본인의 전 병력을 동원했기에 병력 면에서 궁예보다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비뇌성 전투는 궁예의 대승으로 끝났다. 이후 청길, [[신훤]] 등이 궁예에게 항복하면서 궁예는 남한강 유역(한주 남부와 삭주 남부)를 장악했으며, 904년에 웅주까지 석권하며 세력을 한반도의 절반까지 키웠다. 한반도 중부 지방의 패권이 완전히 갈리면서 [[관도대전]]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후 궁예가 양길 등의 세력을 완전히 흡수하며 후백제와의 전투에서도 승승장구하는 것도 비슷하다. == 후폭풍 == 이후 초적에서 출발한 호족들은 사실상 자취를 감추고, 남은 호족들도 후백제의 [[견훤]] 이외에는 자기 영토 보존이나 잘해야 옆 호족을 공격하는 정도만이 남았다.[* 일반적으로 후삼국 시대 지도에서는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 3대 세력만 딱 그려놓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일개 지역 정도를 차지한 중소 세력은 여럿 더 있었다. 그 중 일부는 [[아자개]]나 [[왕순식]]처럼 3국에 예속된 반 독립 세력인 경우도 있고, 후가야 세력이나 [[왕봉규]]처럼 따로 노는 경우도 있었다.] 한반도의 패권을 위해 싸우는 호족은 이제 왕을 칭한 [[궁예]]와 견훤만 남았다. 이로써 후삼국이 완전히 정립되는 전투다. 이렇게 양길의 밑에 있다가 양길을 밀어낸 궁예는 약 20년 뒤, 자신의 수하였던 [[왕건]]의 쿠데타로 양길이 그러했듯이 권력에서 쫓겨나 죽음을 맞는다. == 그 외 == * [[경기도]] [[안성시]] 기솔리에 위치한 쌍미륵사(雙彌勒寺)의 미륵불 2기는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궁예]]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http://news.joins.com/article/17201713|##]] * 흥미롭게도 이곳은 궁예가 세상에 처음 나와 섬긴 [[기훤]]의 본거지 죽주(안성시 죽산면)였다. 즉 궁예는 적지이지만 지세를 속속들이 아는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것과 같았고, 이 사실을 감안하지 않은 양길의 전략적 실책을 볼 수 있다. * 후삼국의 형성 과정에서 더없이 중요한 전투임에도 사료의 기록이 지극히 부족한게 아쉬운 전투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전투 양상이 어땠는지, 심지어 패배한 양길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기록 부족으로 정확히 알 길이 없다. == 관련 연구 == * 이도학, 궁예(弓裔)의 북원경(北原京) 점령(占領)과 그 의의(意義), 2007 * 정성권, 弓裔와 梁吉의 전쟁, 비뇌성 전투에 관한 고찰, 2012 * 송영대, 궁예의 영역 확장과 임진강, 2022 == 대중매체의 등장 == 드라마 [[태조 왕건]] 33회에 등장한다. 그 이전 양길은 스스로 죽주를 바치며 투항해 온 궁예를 높이 사서 애지중지하던 막내딸 [[미향]]을 주어 사위로 삼고 잘 대우했다. 그러다가 이미 궁예의 사람이 된 [[은부(태조 왕건)|은부]]의 계략에 넘어가 [[환선길(태조 왕건)|환선길]], [[이흔암(태조 왕건)|이흔암]], [[복지겸(태조 왕건)|복지겸]] 같은 핵심 장수들을 전부 내주어 명주(현 강원도 [[강릉시]])를 치게 했는데 궁예는 명주의 김순식에게 항복을 받아낸 다음 함께 간 장수들을 모두 포섭해 독립해 이후 철원과 송악(지금의 [[개성시]])을 비롯한 [[패서]]지역 전체를 차지해버렸다. 결국 [[양길]]과 양길을 배신하고 나온 [[궁예(태조 왕건)|궁예]]의 군대가 두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였는데, 첫 번째 전투는 28회 축령산(현 경기도 [[가평군]])에서 양길이 먼저 선제 공격을 벌여 궁예 휘하의 신훤과 원회[* 드라마에서 이 둘은 본래 기훤 휘하의 장수였으나 기훤의 야만성과 무모함에 질려 기훤을 죽이고 궁예 밑으로 온 것으로 나온다.]를 단칼에 베어버렸을 정도였으나 [[왕건(태조 왕건)|왕건]]의 기만 전술로 인해 사위 하나를 잃고, 아우 명길마저 다치게 되었다. 이후 나라를 선포한 궁예가 한강 유역을 얻기 위해 왕건을 시켜서 남진하려고 할 때 양길과 마주친 곳이 바로 이 비뇌성이 있던 죽주로 양길이 잔여 세력을 모으면서 끌고 오자 궁예는 왕건을 지원하려고 [[은부(태조 왕건)|은부]]와 부장 [[금대(태조 왕건)|금대]]와 함께 직접 내려와 두번째로 양길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 사이 다른 부장이던 [[염상(고려)|염상]]은 은부와 [[종간(태조 왕건)|종간]]의 지시로 송악으로 돌아와 미향을 죽이려고 했지만 강비에게 들켜 실패하고 만다.] 극 초반에 궁예는 몇 차례 화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전투를 치렀는데, 퇴각하는 척하면서 양길의 군대를 유인해 우여곡절 끝에 격파하였고, 왕건의 장수들(유금필, 신숭겸, 박술희)에게 남은 사위와 아우 명길을 잃은 양길은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이 두 차례의 전투에서 비록 졌지만, 양길이 언월도를 잘 쓰는 맹장으로 등장해 제법 화려한 전투 씬을 연출했고, 그의 용맹은 초반에 화려한 전투신을 벌였던 견훤과 궁예의 결투를 넘어 [[여포]]를 떠올리게 한다. 궁예가 그 용맹에 감탄해, 잠시나마 살려줄까 생각했을 정도였으나 끝내 말을 안 듣으니 금대가 목을 베도록 해 처단했다. 금대에게 베이기 전 양길이 [[궁예]]에게 [[왕건(태조 왕건)|‘뿌리는 데로 거두는 것이 세상사 이치니라.너 또한 나와 같은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느냐’]]고 저주를 퍼부으면서 죽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그것이 나중엔]] [[고려|실제로 일어난다.]] 사실 [[복지겸(태조 왕건)|복지겸]]이 자신을 포섭하는 궁예에게 그가 타락해 초심을 잃으면 주저없이 처단하겠다고 암시를 했었지만, 궁예는 나중에 뜻이 어긋나면 나의 목을 베라며 이를 가볍게 여긴다. 또한 양길과 궁예 간에 벌어진 이 전투들은 극 중 왕건이 군사적 역량을 드러낸 첫 무대이기도 하였다. 비뇌성 전투 이후 34화 양길의 본거지였던 북원(현 강원도 원주시)과 죽주를 비롯한 양길의 잔여 세력들은 은부와 종간의 지시로 인해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그 전부터 [[종간]]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던 양길의 딸 미향은 결국 충격을 받고 환청이 들릴 정도로 정신병에 걸린 상태에서 순행 중 궁예에게 광기를 부리다가 명주에서 머물 때 은부가 강경책으로 문을 막은 처소에 환청을 듣으면서 스스로 불을 지르게 되고 41회 질식사 하는 바람에 중이 된 미향의 아들과 함께 궁예의 트라우마 중 하나가 되었다. 만화 [[태조 왕건]]의 경우 궁예와 결투를 벌여서 진 후 깨끗하게 자살한다. == 관련 문서 == * [[전투 목록/한국사]] * [[한국사]] [[분류:후삼국시대/전투]][[분류:안성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