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 [include(틀:서진의 계보도)] ||<-2> '''비릉도왕(毗陵悼王)[br]{{{+1 司馬軌 | 사마궤}}}''' || || '''[[작위|{{{#fff 작위}}}]]''' ||비릉왕(毗陵王) || || '''[[시호|{{{#fff 시호}}}]]''' ||도(悼) || || '''[[성씨|{{{#fff 성}}}]]''' ||[[사마|사마(司馬)]] || || '''[[휘|{{{#fff 휘}}}]]''' ||궤(軌) || || '''[[자(이름)|{{{#fff 자}}}]]''' ||정칙(正則) || || '''부모''' ||부황 [[무제(서진)|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br]모후 무원황후(武元皇后) [[양염]](楊艶)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대]] [[중국]]의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위(삼국시대)|조위]]의 인물. 자는 정칙(正則). [[진(사마씨)|사마진]]의 초대 [[황제]] [[사마염]]의 장남. [[사례(중국)|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 생애 == [[양염]]이 관상을 잘 보는 사람에게 존귀하게 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사마소]]가 [[사마염]]과 결혼시켜 양염이 사마염의 총애를 받아 사마궤를 포함한 3명의 아들과 [[딸]] 3명을 낳았다. 처음에 기도위로 임명되었는데, 이로 인해 [[진서]]에서 처음에 기도위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사마소가 권력을 잡고 있었기에 조부의 ~~[[인맥|빽으로]]~~ 위광으로 벼슬자리에 임명되었거나 서진이 건국되고 사후에 [[추증]]된 것으로 보인다. [[참척|2세에 죽었고]] [[시호]]는 도(悼)다. [[사마충]]의 형이기 때문에 259년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고 2살 밖에 살지 못한 점으로 미루어보면 늦어도 259년 또는 260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어 [[서진]] 건국 이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진서 혜제기에는 291년 5월 비릉왕 궤가 [[사망|훙]](薨)했다고 나오는데, 이는 상술한 사마의와 혼동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89년에 사마의(司馬儀)[* 사마염의 조부 [[사마의]]와는 독음 기준 동명이인으로 초왕 [[사마위#s-1]](司馬瑋)의 아들이다.]가 비릉왕의 [[작위]]를 계승했다. == 사후 == 사마궤가 오랫동안 살았다면 사마염의 장남이기 때문에 [[서진]]의 [[태자]], 그리고 더 나아가 사마염의 후계가 되어 [[황제]]가 [[그러나 이 사진이|될 수 있었겠지만]], [[요절]]했기에 차남 [[사마충]]이 실질적인 장자로써 태자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팔왕의 난]], [[영가의 난]]으로 '''[[서진]] [[멸망]]과 [[오호십육국]]의 [[나비효과|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사마염의 아들)] [include(틀:서진의 계보도)] [[분류:조위의 인물]][[분류:하내 사마씨]][[분류: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