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 ||<-2> '''{{{+1 司馬承[br]사마승}}}''' || || '''작위''' ||譙王) || || '''[[시호|{{{#ece5b6 시호}}}]]''' ||초민왕(譙愍王) || || '''성''' ||사마(司馬) || || '''이름''' ||승(承) || || '''자''' ||경재(敬才)[* 일설로는 원경(元敬)] || || '''가족''' ||부친: [[사마손]]^^(司馬遜)^^ || || '''생몰기간''' ||264년 ~ 322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서진]]의 황족이며 자는 자제(子悌)로 [[사마의]]의 동생인 [[사마진]]의 손자, [[사마손]]의 아들이다.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작위는 초왕(譙王). == 생애 == 광희 원년.[* 306년] [[혜제(서진)|진혜제]]가 낙양에 돌아온것을 맞이하여 유격장군에 임명되었다. 영가 연간에 [[유총(전조)|유초]] 한나라 군대가 서진을 침략하자 사마승은 몰래 남행하여 양양(襄陽)의 정남장군 산간(山簡)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영가 6년.[* 312년] 사마승이 도착했을 때 산간이 죽자 다시 남하하여 낭야왕 [[원제(동진)|사마예]]에게 의탁하였다. 건무 원년.[* 317년] 낭야왕 [[원제(동진)|사마예]]는 전년도 장안이 [[유총(전조)|유초]] 한나라 군대에 함락되고 [[민제(서진)|진민제]]가 포로로 잡히자 진왕(晋王)으로 불렸다. 진왕 사마예는 일찍이 [[석륵]]에게 죽임을 당한 [[사마수(초왕)|사마수]]의 봉국을 그의 삼촌인 사마승이 잇게 하였다. 태흥 원년.[* 318년] [[민제(서진)|진민제]]가 죽임을 당하자 진왕 [[원제(동진)|사마예]]가 황제로 즉위하고 사마승은 둔기교위(屯骑校尉)로 개배하고 국장군(國將軍)을 가보하고 좌군장군(左軍將軍)을 거느렸다. 뒤에 산기상시를 추가하였다. 태흥 3년.[* 320년] 8월 상주자사 감탁(甘卓)이 양주자사로 전출되자 [[왕돈(동진)]]은 그 후임으로 자신의 막료인 심충(沈充)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원제(동진)|진원제]]는 왕돈의 추천을 묵살하고 사마승을 상주자사로 임명해버렸다. 얼마 후 감탁과 사마승의 행동이 불온하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왕돈은 무창으로 돌아가 두 사람을 모두 죽였다. 후에 왕돈의 난이 평정되자 조정은 사마승에게 거기장군으로 추승하였고, 시호를 민(愍)이라 하였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서진의 계보도)] [각주] [[분류:서진의 황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