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송(남조)/인물]][[분류:387년 출생]][[분류:421년 사망]][[분류:진군 사씨]] [include(틀:송서)] ||<-2> '''{{{+1 謝瞻[br]사첨}}}''' || || '''성''' ||사(謝) || || '''이름''' ||첨(瞻 / 檐) || || '''자''' ||선원(宣遠) / 통원(通遠) || || '''생몰''' ||387년 ~ 421년 || || '''출신'''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 || '''부친''' ||사중(謝重) || || '''조부''' ||[[사랑(동진)|사랑]] || || '''증조부''' ||사거(謝璩)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 [[송(남조)|유송]]의 관료로 자는 선원(宣遠) 혹은 통원(通遠)이다. == 상세 ==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출신으로 387년 사중(謝重)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첨은 6살의 나이에 글을 잘 지어서 자석영찬(紫石英讚)과 과연시(果然詩)를 지어 당대의 선비들이 모두 사첨의 글을 찬탄하고 사첨을 기이하게 여겼다. 처음 안서장군(安西將軍) 환위(桓偉)의 참군(參軍), 초대(楚臺) 비서랑(秘書郞)을 지냈다. 사첨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숙모인 유씨(劉氏)가 사첨을 길렀으며, 형제들이 모두 자신의 어머니처럼 숙모를 따랐다. 유씨의 아우인 유유(劉柳)가 오군(吳郡) 태수로 부임할 때 누나를 같이 데리고 갔는데, 사첨은 그들을 거스르지 못하고 직무에서 물러난 뒤 동행하였으며, 건위장군(建威將軍) 유유의 장사가 되었다. 뒤에 진군장군(鎭軍將軍) 유유, 대사마(大司馬) 낭야왕(琅邪王) 사마덕문의 참군을 역임하고 주부(主簿)로 전임되었으며, 안성상(安成相), 중서시랑(中書侍郞), 송국(宋國) 중서시랑, 황문시랑(黃門侍郞), 상국부(相國府) 종사중랑(從事中郞)을 지냈다. 사첨의 아우인 사회가 당시 송대(宋臺)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있었는데, 사회는 총애와 대우가 이미 두터웠고 팽성(彭城)에서 수도로 돌아와 가족들을 맞이할 때 빈객들이 골목에 넘쳐났다. 집에 있던 사첨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서 사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 명성과 지위가 아직 높지 않은데 사람들이 여기까지 이르렀구나. 우리 집안은 청렴결백과 겸양을 가풍으로 삼고 정사에 간여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교유하는 사람들은 친척이나 친구뿐인데, 너는 결국 권세가 조정을 기울였으니 이것이 어찌 가문의 복이겠는가? 사첨은 다시 대나무 울타리로 문을 가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런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 그리고 팽성으로 돌아갈 때 사첨은 유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신은 본디 한미한 선비로 부친과 조부의 지위는 이천석을 넘지 않았습니다. 아우의 나이가 이제 막 서른이 되었지만 품은 뜻과 행실은 평범하고 천박하지만 대부(臺府)에서는 영현하고 현달한 지위에 있는데, 복이 지나치면 재앙이 생기므로 머지 않아 들어맞을 것입니다. 특별히 사회를 폄관하여 쇠락한 집안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사첨은 유유에게 여러 차례 요청하여 사첨을 오흥군태수로 삼았다가 다시 사첨이 주청하여 이에 예장군태수로 삼았다. 사회가 혹여 조정의 기밀을 사첨에게 이야기한다면 사첨은 친구에게 이를 말하며 웃음거리로 삼아 사회가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게 했다. 사회가 결국 유유를 보좌하여 공을 세우며 지위와 권세가 더욱 커지자, 사첨은 점점 더 두려워했다. 421년, 사첨은 예장군에서 병에 걸렸지만 치료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사첨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한 사회가 사첨을 찾아오자, 사첨은 사회를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나라의 대신이 되었고 또한 군사적인 중책을 맡고 있는데, 먼 곳에서 오면 반드시 의심과 비방을 낳을 것이다. 과연 사첨의 말대로 사회가 배반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뒤에 사첨이 병이 위중하여 수도로 돌아갈 때 [[고조(유송)|고조]]는 사회가 금군을 관장하고 있었기에 출궁하여 숙박하지 못하게 했으며, 사첨에게는 영군부(領軍府) 동문에 있는 남군공주(南郡公主)[* [[동진]] [[명제(동진)|명제]]의 딸이었다.]의 남편 양분(羊賁)의 옛 저택에 살게 했다. 그러자 사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조상이 남긴 낡은 오두막이 있는데 어찌하여 이곳에 살 수 있겠는가! 또한 사첨은 임종할 때 사회에게 다음의 서신을을 전했다. >나는 다행히 몸을 보전하여 산기슭에 묻힐 수 있으니 이 또한 원망하겠는가? 아우는 스스로를 격려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자 집안을 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