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일본 제국의 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1895년 출생]][[분류:1975년 사망]][[분류:가나자와시 출신 인물]][[분류:정5위]] [include(틀:일본군/장성급 장교)] [include(틀:일본군의 전쟁범죄)] [include(틀:일본군 삼간사우)] ||<-2> [[파일:attachment/사토 겐료/사토.jpg]] || ||이름 || 사토 겐료(佐藤賢了/さとう けんりょう)|| ||출생 || [[1895년]] [[6월 1일]] || ||출생지 || [[이시카와현]] || ||사망 || [[1975년]] [[2월 6일]] || ||학력 || [[일본]] [[육군사관학교]] || ||군복무 || [[일본제국]] [[육군]] || ||최종계급 || [[중장]] || ||소속 || [[삼간사우]] || [목차] == 개요 == [[일본제국 육군]] 장성으로 최종 계급 중장. [[삼간사우]]의 멤버 중 하나다. == 경력 == [[1917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 [[1925년]]에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미국 주재를 거쳐 일본 육군성 군무과 국내반장을 맡았다. 육군성 내부에서 경력이 풍부한 지미파로 알려졌던 사토는, [[1938년]] 3월에 열린 [[국가총동원법]] 심의에서 국가총동원법 위원회의 육군성 설명원 자격으로 법안 마련에 당시 자신의 견해를 섞어 오랜 시간 동안 연설하였는데, 이에 반발한 다른 의원이 사토의 단독 연설을 멈추게하려 하자, "입 다물어라!"(...)라고 발언하였다. 이 발언이 문제가 되어 위원회는 해산되었고, 당시 육군대신이었던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가 사죄하는 사태로 번졌으나, 사토에게는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1943년]],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사했을 때에는 [[미드웨이 해전]]의 실패를 거론하며, "[[국장]]에 적당하지 않다"라고 [[도조 히데키]] 총리에게 말했으나, 도조는 육군과 해군의 조화를 우선시하고 그의 말을 무시하였다. 사토는 후에 [[삼간사우]]라고 불렸던 도조 히데키 측근 사우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 패전 이후 == 일본의 패전 이후, 사토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아 복역하였다. [[A급 전범]] 중 가장 늦게까지 갇혀있었고, [[1956년]] 3월 31일에 석방돼 지금의 도쿄 퍼실리티 서비스인 도큐관재(東急管財) 사장을 맡았다. 또, 자신의 체험이 기초가 되어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참가해 화제가 되었고, 죽기 직전까지 면담자에게 [[태평양 전쟁]]이 [[성전]]이었다는 주장을 하여 물의를 빚었다. 장남은 육군에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항공자위대]]에 입대해 [[소장(계급)|소장]]까지 승진하였고, 차남은 간사이 전력(関西電力) 근무, 3남은 [[와세다대학]] 교육학부 교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