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국가재건최고회의 시대]] [[분류:쇼와 시대/사건사고]] [[분류:1961년/사건사고]] [[분류:실패한 쿠데타 및 반란]] [include(틀:사건사고)] [목차] == 개요 == '''삼무사건'''([[일본어]]: [ruby(三無事件,ruby=さんむじけん)])은 [[1961년]] 12월 12일에 적발된 [[일본육군사관학교]], [[일본해군병학교]] 출신 전직 [[장교]]들, 즉 당시 [[민간인]]들이 기도한 [[쿠데타]] 미수 사건이다. == 3무 == 왜 3무냐면 이 [[쿠데타]]를 기도한 육사 모임인 국사회(国史会)에서 내건 게 무세금, 무실업, 무전쟁(無税・無失業・無戦争)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극우]] 중심 [[일본]]의 부활을 기도했다. == 어설픈 쿠데타 계획 == 핵심 인원 7명 등은 대부분이 [[규슈]] 북부 출신이었다. 이들은 [[우익]] 단체 등과 결합하고 [[자위대]]에서 사격훈련을 받은 인원 등을 참가시킬 예정이었다. 희한한 건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서도 이 일에 참여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민단을 통해 [[대한민국 육군]]의 [[박임항]] [[소장(계급)|소장]]이 일정 부분 후원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박 [[장군]]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으로 일본에 지인이 많았고 [[M1 카빈]] [[소총]]을 지원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일본 국회]] [[속기]]록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일본에서는 이 일이 '''[[5.16 군사정변]]'''의 영향을 받았다는 인식이 강하다. 이들이 [[자위대]]에 가서 사격훈련을 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자위대에서는 부정한다. 당시에는 일본 정치인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군부에 끌려다녔던 기억 때문에 [[문민통제]]를 매우 중시했기 때문에 자위대 입장에선 여기에 엮이면 개발살날 테니 설사 관련이 있더라도 부정할 만도 하긴 했다. 당시 자위대는 문민 출신 방위청장관들이 강도 높게 관리했고 미군 스타일의 시스템을 받아들이면서 자체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게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통합막료장]]을 지낸 [[구리스 히로오미]]는 자위대법상 적을 만나도 총을 쏠 수 없어 현행법을 어기며 싸워야 한다는 초법규 발언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질되었다. 이 부분은 2000년대 들어서 법제상으로 완전히 정리되었다. 어쨌거나 [[한국군]]의 현역 육군 장군이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 일본의 [[좌파]]들 사이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원인이기도 하다. --[[김옥균]]의 반대 버전-- 한국에선 당시 보도통제로 인해 이 사건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일본 경찰|경시청]]에서 이들을 털고 보니 쿠데타에 쓰려던 장비도 [[일본도]]와 [[소총]] 몇 정이 전부였고 체포된 인원도 13명에 불과해 대체 뭔 생각으로 쿠데타 같은 거창한 걸 하려 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의아해했다. 쿠데타라기보다는 자기들을 일종의 [[신선조]]로 생각했다는 시각도 있다. [[파일:external/blog-imgs-13.fc2.com/sakurai03.jpg]] 이중 가장 계급이 높았던 인물은 사쿠라이 도쿠타로(桜井徳太郎, 1897-1980)로 육군 [[소장(계급)|소장]] 출신이었다. 그는 [[불기소처분]]을 받았고 1966년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Taku_Mikami.jpg]] 미카미 타쿠([ruby(三上卓, ruby=みかみたく)], 1905-1971)는 [[5.15 사건]]에 참여해 총리를 살해했다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5년 뒤에 [[가석방]]되었던[* 농담이 아니라 5.15 사건 당시 주범으로 2번째로 높았던 처벌이 고작 15년이었다.] [[일본군 해군]] [[중위]] 출신이었다. 그는 1950년에도 밀수 사건을 일으켜 5년간 복역했다. 그는 [[청년일본의 노래]](또는 쇼와 유신의 노래)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http://youtu.be/MMAkREdMNgo|#]] [[파일:external/5e6a820f45652819a1e517ad507e0b582fdc0f4f9402e35dfbe60881ec5a9105.jpg]] [[파일:external/pbs.twimg.com/BGmc9u2CAAAi9O5.jpg]] 당시 주동자 중 25세로 가장 어렸던 사메지마 마사즈미(鮫島正純)는 정치인 바바 겐지의 [[보좌관]]이었다. 이후 출가하여 [[이케구치 에칸]](池口恵観)이란 법명을 쓰고 있다. [[아베 신조]] 등 정치인과 친분이 있어 나가타초[* 나가타초는 일본 국회의사당이 있는 곳으로 보통 언론에선 '일본의 제도권정치'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한국의 [[여의도]]와 같다고 보면 된다.]의 괴승([ruby(永田町,ruby=ながたちょう)]の[ruby(怪僧,ruby=かいそう)])이라고 불린다. 성향이 굉장히 괴상한 인간인데[* 이어질 이야기를 요약하면 재일교포들과 친하면서도 반한을 외치는 우익과도 곧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일단 [[야쿠자]]과도 유착되었으며 본인의 입으로는 종교를 차별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든 상담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재일 한국인]]들과도 꽤 친분이 있어서 [[허영중]]은 그의 제자라고 불리고 제자 중 [[아라이 타카히로]], [[가네모토 도모아키]] 등 [[한국계 일본인]]도 있다. 곤노 겐이치[* 今野健一. 1936-2014. 사이비 과학과 [[UFO]] 관련 저술가이다.]나 [[코이케 카즈오]](小池一夫, 1936-)도 그의 제자로 불린다. 그러면서도 정치적으로 [[극우]]파들과도 친해서 [[아베 신조]]가 1차 내각에서 도망치듯 사임해 욕을 바가지로 먹던 시절에 그를 옹호했고 [[2012년]]에 이시카와 신사에서 [[항공막료장]] 출신 [[극우]] 정치인인 [[타모가미 토시오]]와 '''신관불승합동대동아성전제'''[* [ruby(神官仏僧合同大東亜聖戦祭,ruby=しんかんぶっそうごうどうだいとうあせいせんさい)]。]라는 제목의 [[아스트랄]]한 축제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케구치 에칸이 주지[* 일본에선 법주(法主)라고 한다.]로 있는 사찰인 에보시야마 최복사(烏帽子山最福寺)에는 [[북한]]의 [[김일성]]을 찬양하는 '''김일성주석관세음보살'''[* [ruby(金日成主席観世音菩薩,ruby=きんにっせいしゅせきかんぜおんぼさつ)]。]이 존재한다(...). || [[파일:external/chinakorea.blog3.mmm.me/1311692.jpg|width=100%]] || || '''김일성주석관세음보살'''([ruby(金日成主席観世音菩薩,ruby=きんにっせいしゅせきかんぜおんぼさつ)])의 모습이다. || 이케구치 에칸은 [[방북]]도 몇 번 했고 [[2012년]]에 [[김일성]] 탄생 100년 당시에 [[북한]]에서 열린 축제에 참석했다. 거기다 자기네 절 명의로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건물을 사들이고 나서 다시 임대해 주려고 했다. 성향을 도저히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보면 전체적으로 이 문서의 내용도 얇은 썰 정도만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사건이 일어난 일본에서조차 이 사건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2016년에야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논픽션 잡지기사나 책들만이 일부 나왔을 뿐인데[* 이중에서 2001년에 나온 논픽션 '혁명'이 가장 유명하다.] 2016년에 최초로 재판기록을 이용하여 삼무사건에 대한 논문을 내놓은 일본 역사학자 후케 타카시로(福家崇洋)는 이러한 논픽션 기사들에 대해서 출처조차 없어서 선행연구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평가한 바가 있다. == 대중매체 == 1978년에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황제가 없는 8월"이 제작되었다.[* 작중에 [[5.16 군사정변]]과 [[1973년 칠레 쿠데타]]가 잠시 비추는 것을 보아서는 해당 사건들도 모티브로 삼은 모양이다.]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자위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캐스팅이 화려한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