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조선)] [목차] == 개요 == 단재 [[신채호]]가 독자적으로 주장한 학설. [[조선상고사]]와 전후삼한고에 나타난다. == 설명 == 신채호는 상고사에 대해 종래와는 완전히 독자적인 학설을 폈다. [[단군조선]]이 대[[단군]]인 [[진한]]이 중앙인 진조선을 다스렸고 부단군인 [[마한]]과 [[변한]]이 각각 변방인 막조선과 번조선을 다스렸다고 했다.막조선의 영역은 [[만주]] 남부와 [[한반도]]이며, 번조선의 영역은 난하 일대에서 [[요동]]까지, 진조선은 [[하얼빈]]을 포함한 북만주 일대를 다스렸다고 했다. == 비판 == 하지만 단재는 삼조선이 존재했었다는 실증 근거를 조선상고사에서는 제시하지 않고 전후삼한고에서 그 근거를 제시하였는데, 그 근거가 관련 사서의 한문을 오독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해당 구절을 보면,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 - 《[[사기(역사책)|사기]]》 조선열전 >(일찍이 연나라의 전성시대에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여기에 붙은 주석으로 >"燕嘗略二國以屬己也" >(연나라가 일찍이 두 나라를 공략하여 복속시켰다) 그런데 嘗略에 대한 해석이 조금 이상한데 嘗略은 복속시키기 전에 본격적인 침략이 아닌 반응을 보려고 슬쩍 침략해 본 것으로 생각된다 라는 말이 원래는 "[[진번국|진번]]과 [[고조선|조선]]을 공략하였다"라고 해석해야 당시의 시대상[* [[연나라]]의 전성기, 이 때 고조선은 연나라에 패해서 많은 영토를 잃고 주요 근거지 또한 [[요동]]에서 [[평양]]으로 이동하였다.] 등을 보았을 때 말이 맞는데, 이걸 그만 "진·번조선을 공략하였다"라고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였고, 삼조선설은 사실상 여기서 도출된 것이기 때문에 현재 한국의 사학계는 단재의 삼조선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삼조선설에서 신채호는 [[기자조선]]을 번조선의 왕조로 보았으며, [[위만조선]] 역시 기자조선을 잇는 번조선의 한 왕조로 보았다. == 세종실록지리지에서 == >...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舊都)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의 41대 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王儉城)【곧 평양부(平壤府)이다.】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의〉 조명(詔命)을 잘 받들지 아니하매, [[한무제|한나라 무제(武帝)]] [[기원전 109년|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진번군|진번(眞蕃)]]·[[임둔군|임둔(臨屯)]]·[[낙랑군|낙랑(樂浪)]]·[[현도군|현도(玄菟)]]의 4군(郡)으로 정하여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현토와 낙랑은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곳인데, 소제(昭帝) 시원(始元) 원년에 임둔·낙랑으로써 동부 도호(東府都護)를 설치하였다.” 하였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변한(卞韓)은 낙랑 땅에 있다.” 하였다. >---- >[[세종실록지리지|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平壤府) 中.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삼조선이 나온다. 전조선([[단군조선]]), 후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을 하나로 묶어 부르는 말로, 신채호의 삼조선설과는 아주 다른 개념이다. == 같이보기 == * [[고조선]] * [[신채호]] * [[진번국]] [[분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