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관직)] [include(틀:역대 백제 상좌평)] [목차] == 개요 == '''[[上]][[佐]][[平]]''' 5세기~7세기 사이에 존재했던 [[백제]]의 '''최고관직''', 오늘날로 따지면 ''''국무총리'''' 정도로 대응시킬 수 있다. 의미는 기존에 존재하던 백제의 고위귀족직 [[좌평]]들 중에서도 그들의 대표격으로 상좌평직을 [[전지왕]] 재위 3년인 [[408년]]에 설치한 것이다. 이후 백제 멸망기까지 운용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만 등장하며, 일본서기의 대좌평=상좌평 설로 보는 경우도 있다. 현재까지 상좌평 직위에 확인되는 인물들의 성씨는 국성인 [[부여씨]], [[대성팔족]]에 해당되는 해씨, 사택씨가 있다. 신라도 이와 같은 [[상대등]]이 있으나 후반으로 들어와서 집사부에게 밀리게 된다. == 역임자 == * '''[[부여신]]''': [[전지왕]]의 형제로 아신왕의 서자. 처음으로 상좌평 직위에 오른 인물로 408년에 임명되어 429년 10월 사망할 때까지 상좌평을 역임했다. * '''[[해수]]''': 406년 내법좌평으로 임명된 인물. 기록상 부여신이 사망한 이후인 429년 상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고위직에 임명된 것을 보면 전지왕을 옹립하거나 지지한 것으로 추정되며, 455년 이전에 정계에서 물러났거나 사망한 걸로 여겨진다. * '''부여문주''': [[개로왕]]의 아들 혹은 동생으로 후일 '''[[문주왕]]'''으로 즉위한다. 문주왕 즉위시기의 기록으로 보면 개로왕의 즉위(455년)와 함께 상좌평에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좌평직을 언제 그만두었는지는 불분명하나 계속 재임했더라도 475년 9월 [[장수왕]]이 백제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면서 개로왕이 문주왕에게 백제 왕위를 승계시키면서 물러났을 가능성이 높다. * [[사택기루]]: [[성왕(백제)]] 시기의 인물. 관직은 일본서기에 따르면 상좌평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같이 나온 중좌평 목례마나, 하좌평 목윤귀와 함께 등장하고 있어서 위의 상좌평들과 동일 관직이 아니라 삼좌평제를 운용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무령왕]] 시기부터 좌평 앞의 수식어가 사라지므로 이 시기에 6좌평 체제에서 상중하좌평 체제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 의자왕 대의 상좌평(가칭): 이름미상. 659년 여우 떼가 궁중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후 660년 [[백제멸망전]] 당시 상좌평이 제사에 쓸 가축과 음식들을 당나라 장군 소정방에게 많이 보냈다가 거절당했다는 기록이 끝이다. 상좌평=대좌평설을 신뢰할 경우 사택천복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 대좌평 == 이들은 상좌평이 아닌 '''대좌평大佐平'''으로 기록되는 인물들이다. 상좌평과 동일한 관직으로 추정하는 경우가 많다. * '''[[사택지적]]''': [[일본서기]]의 기록상 대좌평으로 기록되어 있다. * '''[[사택천복]]''': [[의자왕]] 시기의 인물.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에 당나라로 끌려갔다. <삼국사기>에는 대좌평으로 기록되어 있다. 항목 참조. === 유사 사례 === * 사택소명: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유민. 673년 음력 6월 사망했고 텐무 덴노가 그에게 대좌평 관위를 추증[* 기록상 백제에서는 좌평으로 활동했으며, 대좌평은 백제가 아니라 일본에서 추증해준 것이다.]해준 점을 보면 고위 귀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기타 == [[신채호]]가 저술한 [[조선상고사]]에서는 [[성충(백제)|성충]]이 상좌평을 역임한 것으로 나오는데 [[삼국사기]]는 그냥 좌평으로 기술되어 있어 상좌평이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삼국의 다른 최고 관직들인 고구려의 [[대막리지]], 신라의 [[상대등]](이벌찬)에 비하면 인지도가 가장 적다. == 같이보기 == * [[국상]] * [[대막리지]] * [[대보]] * [[상대등]] * [[대내상]] == 참조문헌 == * <노중국,4-5世紀 百濟의 政治運營;近肖古王代-阿莘王代를 중심으로(1994)> [각주] [[분류: 백제]][[분류:재상]][[분류:한국의 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