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돌궐]][[분류:아시아의 칸국]][[분류:7세기 멸망]]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estern_Gokturk.jpg|width=600&align=center]] [목차] == 개요 == 西突厥 583년 ~ 657년 [[돌궐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이후, 서쪽에서 세력을 일구었던 돌궐 카간국. 초창기에는 중국 북쪽 지역의 [[동돌궐]]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지만 이후 완전히 분열되었다. == 역사 == [[동로마 제국]]의 기록에는 '''이스테미 야브구'''[* '야브구'는 중국 역사서에 ‘엽호'(葉護)로 적혀 있다. 그러니까 실점밀엽호. 제2인자라는 호칭이라고 한다.](𐰃𐰾𐱅𐰢𐰃𐰴𐰍𐰣 혹은 Istämi)라고 하는 실점밀(室点密)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돌궐의 기반을 세운 이리가한(일릭 카간) 토문(투멘)이 죽자 이스테미가 서돌궐의 가한이 되었고, 토문의 아들인 목간가한(무칸 카간 : 木杆可汗)이 [[동돌궐]]의 가한이 되었다. [[철륵]]의 남은 부족을 박살낸 뒤 바스밀(Basmil), [[카를룩]](𐰴𐰺𐰞𐰸)등의 부족도 제압했으며,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샤한샤]]이던 [[호스로 1세]](انوشیروان)와 동맹을 맺고 [[에프탈]]을 끝장낸 후, [[아무다리야 강]]을 국경으로 삼아 [[실크로드]]에서 끗발을 날렸다. 돌궐은 [[실크로드]] 교역에 관심을 가져 소그드 상인 마니악이 이끄는 사신단을 사산 왕조에 파견했지만 사산 왕조는 돌궐의 실크로드 교역 개입을 거부하고, 사신단이 갖고 온 비단을 공개적으로 불태움으로써 모욕을 주었다. 이에 돌궐은 사산 왕조를 경유하지 않는 교역로를 만들기 위해 568년 마니악을 [[동로마]]에 보내 [[콘스탄티노플]]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 황제에게 비단을 파는 이야기를 했는데, 돌아갈 때 [[제마르코스]]라는 동로마 장군이 따라와 서돌궐 카간인 디자불로스를 만나고 돌아가기도 했다. 동로마 측 기록에 따르면 제마르코스는 서돌궐 측으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고, 사산 왕조에서 온 사신들을 일부러 동로마 사신들이 보는 앞에서 박대했다고 한다. 이후로도 동로마와 서돌궐은 꾸준히 교류해서 6세기 후반의 역사가 메난드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568년부터 576년까지 서돌궐에 다섯 번 정도 사신단을 파견했고 규모는 100명 단위가 넘었다. 627년에는 양국 연합군이 티플리스(지금의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를 포위 공격하기도 했다. 서돌궐이 실제로 완전히 동돌궐과 분열된 것은 '''아파 카칸'''(Apa Qagan) 때였다. 아파 카칸의 본명은 다르빈이었는데, 동돌궐의 무칸 카칸이 죽고, 형인 [[타발가한|타스파르 카간]]도 죽은 뒤에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모친이 돌궐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동돌궐의 제5대 군주가 된 인물은 [[사발략가한|샤폴루 카간]](사발략가한)이었는데, 이스테미의 아들 타르두를 서돌궐의 카간으로 임명했다. 그때 아파 카간은 당분간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사발략가한|샤폴루 카간]]은 수나라를 공격했는데, 마침 반란이 일어나서 재미도 못보고 돌아와야 했다. [[사발략가한|샤폴루 카간]]은 아파 카간을 반란의 주동자로 몰았다. 그리고 이번엔 사산 왕조와 맞붙기 시작했는데, 일단 두 나라는 에프탈을 멸망시킬 당시 국경으로 타협한 [[아무다리야 강]](옥수스 강)에서 대치했으나 서로 신경전이 끊이지 않았다. 588년 결국 샤바에게 대군을 이끌게 하고 한번 쳐들어갔으나 사산 왕조의 장군 [[바흐람 추빈]](Bahrām Chobin)[* 정작 바흐람 추빈은 나중에 본국에서 권력을 잃고 서돌궐로 망명했다.]의 공격을 받고 샤바는 전사했다. 619년에는 사산 왕조가 [[동로마 제국]]과 치열하게 다투는 틈을 타 [[이스파한]]까지 공격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근성의 서돌궐은 627년 동로마 제국의 [[이라클리오스]] 황제와 손을 잡고 또 공격을 단행하여, 이번에는 사산 왕조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사산 왕조는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지휘하에 있던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서돌궐이 멸망하고 가한(카간)이 죽었으나 군주만 죽은 것이지 서돌궐 자체가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당나라도 군주만 죽이고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사서에서는 가한 사망 이후 서돌궐이 멸망한 것으로 나오나 서돌궐의 영토에는 돌기시(투르기스, 튀르기쉬)가 이미 존재하여 우쉴리의 지도하에 투르판과 쿠샤 지역으로 밀려온 온-오크 부족 전체를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그에게는 ‘바가 타르칸’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또한 서돌궐의 부족들이 서로 통합하여 돌궐 제2카간국을 건국했다. 서돌궐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했고, [[위구르 제국]]이 건국되었다. == 역대 가한 == [include(틀:역대 돌궐 가한)] || '''대수''' || '''왕호''' || '''휘''' || '''재위기간''' || || 1대 || [[아파가한]] || 대라편 || 579 ~ 587 || || 1대 || [[달두가한]] || 점궐 || 577 ~ 603 || || 2대 || [[이리가한]] || ? || 603 ~ 604 || || 3대 || [[이궐처라가한]] || 달만 || 604 ~ 611 || || 4대 || [[사궤가한]] || 사궤 || 610 ~ 618 || || 5대 || [[통엽호가한]] || ? || 618 ~ 630 || || 6대 || [[을비발라사엽호가한]] || 咥力特勤 || 630 ~ 632 || || 7대 || [[해리필돌육가한]] || 이숙막하설 || 632 ~ 634 || || 8대 || [[사발라질리실가한]] || 동아설 || 634 ~ 639 || || 9대 || [[을굴리실을비가한]] || ? || 639 || || 10대 || [[을비사발라엽호가한]] || 薄布特勤 || 639 ~ 642 || || 11대 || [[을비사궤가한]] || ? || 642 ~ 653 || || 12대 || [[사발라가한]] || 아사나하로 || 651 ~ 657 || 638년 사발라질리실가한(東)에게 [[을비돌육가한]](西)이 반기를 들어 서돌궐이 동•서로 분열된 이후 을비돌육가한이 642년에 일시 통일했다가 바로 약화되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튀르키예 민족의 역사)] [include(틀:카자흐스탄의 역사)] [include(틀:수서)] [include(틀:튀르키예 관련 문서)] [include(틀:아제르바이잔 관련 문서)] [include(틀:우즈베키스탄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