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삼성 라이온즈 감독)] [[파일:external/www.imaeil.com/20110620_092130000.jpg]] 徐永武 [[1934년]] [[5월 18일]] ~ [[1987년]] [[5월 26일]] >"'''어떻게 보면 서영무 감독님이야말로 아버지같은, 선수들의 아버지고, 또 경북 야구의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ㅡ [[배대웅]], [[김은식]] 작가가 서영무 감독에 대해 질문하자.[* [[삼성 라이온즈]] 때문에 산다 25페이지.] [목차] == 소개 == [[대한민국]]의 야구인. [[삼성 라이온즈]]의 초대 감독이자 '''대구야구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내야수]]로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와 [[경북대학교|경북대]]를 졸업한 후 공군 등에서 실업 선수 생활을 했지만, 현역 시절은 지극히 평범했다고 한다. 그러나 감독으로서는 제대로 능력을 발휘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모교인 [[대구 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의 라이벌 학교인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등학교]]의 감독으로 명성을 쌓았다.[* [[대구 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와 경북고는 정기전을 치르기도 한다.~~그런데 2000년 넘어서부터는 [[대구고등학교 야구부|대구고]] 야구부가 더 잘 나가는데.~~] 경북고 야구부는 총 20회 전국대회 우승을 기록했는데, 그 중 11번이 서영무 감독 아래서 이룬 것이다. [[임신근]], [[남우식]], [[황규봉]], [[이선희(야구)|이선희]] 같은 좋은 선수들을 이끌고 1970년대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등학교]]의 최전성기를 열었다. 그 때 얻은 별명이 '''그라운드의 [[제갈공명]]'''.~~[[조범현|조갈량]], [[염경엽|염갈량]]의 대선배님~~ 잠시 모교인 [[대구 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로 갔다가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로 복귀했던[*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 시절 훈련의 강도가 너무 높아서 일부 선수 및 학부모와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학생들과 화해하고 다시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로 복귀했다.] 1971년에 한국 고교야구사 불멸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서영무의 복귀 이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청룡기]] 우승, 문교부장관기 대회 우승,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화랑대기]] 우승[* 이 때는 다른 경기와 달리 준결승에서 1차례 패배했으나 패자부활전을 통해 재기,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봉황대기]][* 1971년이 초대 대회였다.] 우승, 그리고 황금사자기 우승까지 이루어내며 서영무 감독 복귀 직전 우승에 성공한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대통령배]]를 포함해 이 해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는 국내 고교야구의 전국 규모 5대 대회(화랑대기는 제외)를 독식하는 천하무적의 성적을 남긴 것이다. 이 해에만 서영무 감독은 무려 6개의 감독상을 휩쓸었을 정도.[* 이 중 5개가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 감독을 하면서 받은 것이고 1개는 [[대구 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 감독 시절에 받았다고 한다.] == 지도자 시절 == 서영무의 [[제자]]였던 선수들은 그는 대단히 엄격했고, 야구 실력뿐만 아니라 학생으로서의 기본 소양도 소홀하지 않도록 독려했던 스승으로 기억하고 있다. [[배대웅]]의 회고에 따르면, 선수들에게 수업시간에 잠이라도 잘 지언정 절대 빠지지 말고, 공책을 사주고는 그 날 배운 내용은 뭐라도 좋으니 꼭 몇 장씩 적어보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야구 성적만을 중시하는 요즘의 고교 감독들이나 별다른 대안을 마련하지도 않고 밍기적거리다 마지못해 [[고교야구 주말리그]]제를 시행한 [[높으신 분]]들이 배워야 할 부분. 그 뒤 [[한양대학교]][* 이 때 본의 아니게(?) [[김재박]]을 두 번이나 퇴짜를 놓은 적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김재박]] 항목 참조.]와 [[서울고등학교 야구부|서울고]] 감독을 거쳐 프로 출범 직전에는 [[중앙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었다. 대구/경북 연고 구단으로서 삼성의 출범 당시 선수진은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와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 출신 선수들의 올스타 팀이었고, 그 결과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 출신에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 감독으로 명성을 떨친 서영무가 자연스럽게 팀의 창단 감독으로 영입되었다.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 취임 후 나름 코치 영입을 위해 노력했지만, '''당시 서영무는 당초 원했던 코치들 영입에 실패하였다.''' [[김성근]], [[조창수]], [[유백만]] 등과 접촉했지만, 모두 한 발 먼저 [[OB 베어스]], [[해태 타이거즈]], [[MBC 청룡]]에서 먼저 스카우트 했고 결국 프런트에서 정한 인물들로 코칭스태프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 야구부 시절 애제자인 [[임신근]]과 [[대구 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 후배이자 선수 겸 배터리코치로 영입한 [[우용득]]이었는데, 이 때부터 갈등의 조짐은 내재되어 있었다. 1982년 프로 원년에 압도적인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에이스 [[이선희(야구)|이선희]]를 혹사시키면서도 [[OB 베어스]]에게 [[1982년 한국시리즈|원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내주면서 구단의 신뢰가 흔들렸다. 시즌 종료 후 구단에서 [[임신근]] 코치를 해임하고 [[재일교포]]인 [[이충남]]을 조감독으로 영입했는데, 서영무는 이를 자신을 해임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 생각하고 [[이충남]]을 견제하기 위해 같은 [[재일교포]] 출신이자 [[이충남]]의 [[한큐 브레이브스]] 선배인 김호중(당시 [[서울고등학교 야구부|서울고]] 감독)을 투수코치로 불러들였다.[* 표면적으로는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이충남의 의사소통을 위해서라고 했으나 사실 파고들면 이충남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었다.] 그런데 김호중 코치는 구단 고위층이 [[이충남]] 조감독에게 지휘권을 주려는 것에 "시즌 초반에 감독 지휘권을 박탈하는 것은 무슨 경우냐?" 라며 크게 반발하면서 갈등을 일으켰고,[* 이 때 [[다혈질]]이던 김호중은 격분한 상태로 구단 고위인사 앞에서 이충남에게 "당신 그러면 못써! 일본에서 야구를 했으면 [[오야붕]]을 잘 모시는게 기본인걸 알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오야붕(서영무)을 제대로 받들기나 하고 감독 자리를 넘보는 것인가?! 이건 [[반란]]이야!" 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리고 서영무 감독의 복귀를 위하여 경기 때 선수들의 [[태업]]을 유도하였고, 이는 김호중의 삼성 코치 명줄을 단축시킨 큰 원인이 되었다(...).] 결국 1983년 시즌 초반에 해임당하고 말았다.[* 김호중은 해임 통보를 받은 후 주변 사람들에게 덤덤한 태도로 "자고 일어났더니 목이 떨어져 있더라"며 반 농담조로 말했다고 한다.] 이후 서 감독은 기어이 선수단 지휘 권한을 [[이충남]]에게 내주었지만 구단의 생각과 달리 팀은 연전연패가 이어지며[* 이충남은 한국어를 전혀 못 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선수들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팀이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다. 특히 서영무와의 갈등으로 어수선해진 팀 내 분위기를 다잡는 데에는 치명적이었다.] [[삼성 라이온즈]] 사장 이수빈과 부단장 김삼용이 사퇴하였고, [[중앙일보]] 사장 이종기가 구단 사장을 겸임하고 중앙일보 편집국 부국장 겸 체육부장 노진호가 구단 이사로 부임한 후 서 감독은 지휘권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한번 망가진 팀 분위기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고, 이충남과의 관계도 더욱 불편해지며 서 감독은 [[1983년]] [[5월 25일]] 전격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김시진]]이라는 최고의 [[에이스]]와 걸출한 타자 [[장효조]]를 영입했음에도 지난해 15승 트리오인 이선희, [[권영호(야구선수)|권영호]], [[황규봉]]이 나란히 부진의 늪에 빠지면서 마운드가 붕괴되는 바람에 팀 성적도 하위권을 기록하고 말았다. == 현장 은퇴 이후 == 감독에서 물러난 후, [[이건희]] 구단주에게 받은 위로금 3천만원을 처남이 운영하던 [[대구광역시|대구]] 소재 1급 차량 정비공장에 투자하여 동업하다 곧 야구계에 복귀했다. [[1984년]] [[OB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갈등을 빚을 때[* [[김영덕]] 감독의 이적 문제를 두고 [[김성근]]과 [[김영덕]]의 대립(원래 삼성에서 감독 제안을 처음 받은 것이 [[김성근]]이라고 한다. [[김영덕]]이 결과적으로 가로챈 모양새가 되면서 갈등이 빚어진 것.)으로부터 시작된 양 팀의 감정 싸움은 [[김일융]]의 영입 문제, 선수들간의 난투극까지 겹치면서 급기야 1984년 후기 리그에서 [[롯데 자이언츠]]와 상대하기 위해 져주기 파동에까지 이른다.] 삼성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박용민 단장의 요청으로 서영무는 OB 베어스 구단 관리이사로 영입된 것이다. 임무는 친정팀이던 삼성에 대한 전력 분석이었다. 그러나 양 구단 간의 치열한 전쟁 아닌 전쟁 와중에 정신적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은 그는 [[1984년]] [[5월 11일]] OB와 삼성의 대구 경기를 앞두고 OB의 원정 숙소인 수성관광호텔에서 선수들의 방을 배정해주던 도중 갑자기 뇌졸중으로 졸도하여 [[경북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식물인간]]으로 3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1987년]] [[5월 26일]] 오전 7시 5분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향년 53세.[[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1974&yy=2011|관련 기사]] == 여담 == * [[KBO 리그]] 사상 첫번째 트레이드이자 현금 트레이드 방식의 팀 이적 사례가 된 서정환의 1983년 해태 이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서정환]]이 밝히기를, [[오대석]]에게 밀려 백업 내야수 신세였던 [[서정환]]이 서영무 감독에게 강하게 자신을 트레이드 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서 감독은 "알았다. 그렇다면 네가 가고싶은 팀을 알아서 찾아보거라" 라며 허락했고 [[삼미 슈퍼스타즈]]와 [[해태 타이거즈]]를 놓고 서정환은 고민하다가 해태를 택했다. * 프로야구 초창기에 지방 경기 취재를 간 야구 [[기자]]들은 서울로 돌아올 때 종종 구단 버스 신세를 지는 일이 많았는데, 서영무 감독은 버스 안에서 기자들과 심심풀이로 [[고스톱]]을 치곤 했다. 서 감독은 고스톱을 치면서 입버릇처럼 "난 애들이 아직 어려서 돈을 많이 따야 한다" 라고 했지만, 대부분 기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아마도 기자에 대한 나름의 예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 1983년 시즌이 끝나고 [[OB 베어스]]로부터 구단 관리이사 직을 제의받은 서영무는 평소 막역하게 지내던 야구 전문기자 '''홍순일'''에게 어떻게 할지 조언을 구했는데 홍 기자는 딱 잘라서 "나 같으면 안간다. 대구 야구의 [[대부]]라는 분이 어떻게 OB의 녹을 먹을 수 있는가. 이것은 대구 야구의 수치이다" 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OB의 간청을 못이겼는지 서영무는 결국 OB 관리이사 직을 받아들였고, 이후 서영무가 쓰러지자 누구보다도 애석해한 사람은 바로 홍순일 기자였다고 한다.[[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soonil39&logNo=120090524538&navType=by|출처]]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야구감독]][[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1934년 출생]][[분류:내야수]][[분류:1987년 사망]][[분류:대구상원고등학교 출신]][[분류:경북대학교 출신]][[분류:삼성 라이온즈/역대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달성 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