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미관계]][[분류:미국의 외교]][[분류:외교공관]][[분류:관저]][[분류: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분류:중구(서울)]] ---- [include(틀:대한제국 내의 외교공관)] ---- ||<-5>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131호 ||<|2> ← || '''132호''' ||<|2> → || 133호 || || [[동아일보]] 사옥 || '''미국 공사관''' || 사현사 석불좌상 || ---- ||
[[파일:구한말 미국공사관.png|width=100%]] || || 19세기 말 ~ 20세기 초 즈음의 미국공사관[[https://blog.naver.com/ohyh45/20147859018|#]] || || [[파일:현재 미국공사관.png|width=100%]] || || 미국공사관의 현재 모습[[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08110600065|#]] || [목차] [clearfix] == 개요 ==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에 위치한 [[미국]]의 옛 [[공사관]]이다. ||<-2><#39386e> || ||<#fff>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width=100%]] ||<#fff> [[파일:미국 국장.svg|width=100%]] || || 조선 · 대한제국 수교 시기의 [[성조기]] || 미국 국장 || == 역사 == 1883년([[고종(대한제국)|고종]] 20년) [[한미관계#s-3.1|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미국]]은 서양 국가 최초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미국 정부는 첫 [[공사]]로 루시어스 하워드 푸트를 파견했다. 푸트 공사 일행은 자신들이 머물고 근무할 [[공사관]]을 [[한성부|한성]]에 설치했다. 처음에는 잠시 박동의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묄렌도르프]] 집에 두었다가 통역관 [[윤치호]] 등에게 새 공사관 부지를 알아보게 했고, 곧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에 있는 민계호, 민영교([[명성황후]]의 친족들)의 집을 2,200[[미국 달러|달러]]에 사들여 그곳으로 옮겼다. 민계호 집은 건물 125칸, 빈 공간 300칸, 민영교 집은 건물 140칸, 빈 공간 150칸 규모였으며 이외에도 주변 가옥을 몇 채 더 매입해 미국공사관 영역을 조성했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773.html|#]] ||
[[파일:1880년대 후반 미국공사관.png|width=100%]] || || 1880년대 후반 미국공사관[[https://blog.naver.com/ohyh45/20147859018|#]] || || [[파일:수옥헌과 미국공사관.png|width=100%]] || || 1899년에 [[아펜젤러]]가 촬영한 [[덕수궁 중명전|경운궁 수옥헌]](맨 왼쪽)과 미국공사관(맨 오른쪽). 맨 왼쪽의 흰 탑이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이다. || [[서양]] [[외교공관]] 중 처음으로 생긴 미국공사관의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 입주를 계기로, 정동은 [[한성부|한성]] 내 [[서양인]]들의 터전이 되어갔다. 1897년([[건양]] 2년)부터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인근의 [[덕수궁|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거주했고, 점점 경운궁의 영역을 넓히면서 미국공사관은 경운궁에 둘러싸인 모습이 되었다. 1900년([[광무]] 4년) 즈음에 부분적으로 개수했고, 실내도 고쳐지었다. 그리고 행랑도 만들었다. ||
[[파일:구한말 미국공사관2.png|width=100%]] || || 19세기 말 ~ 20세기 초 즈음의 미국공사관[[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OrgFilePopup.do?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5&content_id=cp071001750001&content_seq=11|#]] || 미국공사관 건물은 다른 나라 [[공사관]]들과 차이점이 몇 가지 있었다. '''처음부터 [[을사늑약|단교]] 때까지 쭉 [[한옥]]이었고 자리도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조선]]의 [[전통]]을 존중한다는 뜻이 아니었고(...) 본국에서 지원을 적게 해줬기 때문이다.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에 [[공사관]]을 마련한 첫 미국공사 푸트는 [[미국]] [[정부]]에 [[양식|서양식]] 건물을 짓게 돈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에서는 자금을 주지 않았다. 푸트가 이유로 든 것이 ‘[[모자]]가 천장에 닿는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국무장관은 ‘실내에서 모자를 안 쓰는 것이 조선 풍습으로 안다’고 답하며 거절한 것. 표면적인 이유는 저렇지만 [[아웃 오브 안중|미국이 조선에 큰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한옥을 수리해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773.html|#]] [[한옥]] 청사에 대해 [[외교관|공사관 직원]]들의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 [[선교사]], [[의사]] 출신 [[호러스 뉴턴 알렌]] [[공사]]는 자신들의 공사관이 다른 나라 공관보다 초라한 것에 상당한 불만을 가졌고, 이에 대해 자신의 책 《조선의 이모저모(Things Korean)》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른 열강들은 각자 자신들의 대표자가 살 곳으로 미국공사관보다 훨씬 더 허세부린 건물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한때 조선 고관이 살던 진기한 모양의 아름다운 '''[[방갈로]]'''를 계속 사용했다. ...(중략)... 광활한 잔디밭이 있고 나무가 우거진 넓은 부지가 있어서 편하고 예술적인 거주지를 만들었지만, '''공사관 건물은 다른 나라가 세운 큰 건물에 비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https://blog.naver.com/minsu977/221243266679|#]]'''...(후략)... 반면 [[궁내부]] 찬의관 겸 [[외부]] 고문을 지냈던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는 만족스러워 했고, 자신의 회고록인 《비외교적 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에 이렇게 써두었다. >'''미국공사관은 서울에서 가장 편한 곳 중 하나이다.''' 다른 공사관, 영사관 건물들은 유럽건축물을 본따 지은 것들로 칙칙하고 어두운 느낌을 주었다. 이밖의 다른 공관들은 한옥을 고쳐 지은 것이었으며, 한옥은 고치기 매우 편리한 구조였다. '''그것은 잘 다듬은 화강암 기초 위에 튼튼하게 세운 건물이었다.''' 벽은 진흙 또는 벽돌이어서 '''기후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으며''', 육중한 참나무나 밤나무 대들보로 받친 지붕은 수 톤의 흙으로 채워서 높이 올리고 그 위에 기와를 놓아 '''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강추위가 침범하지 못했다.''' ...(후략)...[[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71001750001|#]] ||
[[파일:앨리스 방한 당시 미국공사관.png|width=100%]] || || 1905년 주 대한제국 미국공사관을 방문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큰딸 앨리스 루스벨트[[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OrgFilePopup.do?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5&content_id=cp071001750001&content_seq=7|#]] ||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일본 제국|일제]]가 [[을사조약|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여 한국과 [[미국]]의 [[국교]]는 끊겼다. 당시 [[미국]]은 [[일본 제국|일본]]에 굉장히 우호적이었고 이미 그해 7월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대한제국 합병을 인정했다. 그래서 을사늑약 직후 제일 먼저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옛 미국공사관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까지 [[영사관]]으로 기능했다. ||
[[파일:미국영사관 정문.png|width=100%]] || || 일제강점기 주 경성 미국영사관 정문[[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OrgFilePopup.do?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5&content_id=cp071001750001&content_seq=12|#]] || [[8.15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에 [[한국]]과 [[미국]]은 [[한미관계#s-3.5|재수교]]했다. 영사관은 [[주한미국대사관]]으로 승격했으나 [[을지로]] 옛 미쓰이물산 경성지점 건물로 옮겨갔고[* 1968년 [[주한미국대사관]]이 [[세종대로]] 현재 자리로 옮겨간 후 미국문화원이 되었다가 현재는 그레뱅 뮤지엄으로 쓰이고 있다.]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의 옛 건물은 미국대사관저가 되었다. 이후 대사관에 대한 내용은 [[주한미국대사관]] 문서 참조. || [youtube(o3BxlrDOgEs)] || ||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제작한 미국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o3BxlrDOgEs|#]] || 1976년 5월에는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 대사관저 부지 내에 현대건축기법으로 지은 새로운 [[한옥]] 관저를 지었다. 1974년 처음 신축 계획할 때 [[미국 국무부]]에서는 완전한 [[양식|서양식]] 건물로 지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 [[주한미국대사]]였던 필립 찰스 하비브 (Philip Charles Habib)가 아주 강력하게 한옥으로 짓기를 주장했다고. 그래서 새 관저의 별칭이 하비브하우스(Habib House)이다. 단, 완공할 때 하비브 대사는 이미 물러나있었다.[* 완공 당시 대사는 리처드 스나이더(Richard Lee Sneider).] ||
[[파일:보수전 미국공사관.png|width=100%]] || || 보수 전 미국공사관[[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317&ccbaKdcd=21&ccbaAsno=01320000&ccbaCtcd=11|#]] || 이후 기존의 대사관저는 [[게스트하우스]], 영빈관으로 쓰였다. 2001년 4월 6일에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받았고, 2003년부터 2004년에 복원, 수리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른다. == 건물 == * 이미지는 [[http://archive.much.go.kr/data/JD008/folderView.do?jobdirSeq=529|여기]]에서 볼 수 있다. == 여담 == * [[1895년]](고종 32년) 11월 28일[* 음력 1895년 10월 12일.]에 친미 · 친러파가 [[일본 제국|일본]]의 위협을 받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을 [[경복궁]]에서 구출해 미국공사관으로 데려가려다 실패한 사건이 일어났다. 자세한 내용은 [[춘생문 사건]] 문서 참조. == 매체에서 == * 2018년 [[tvN]]에서 방영한 《[[미스터 션샤인]]》에서 주인공 [[유진 초이]]([[이병헌]] 분)의 근무지로 나온다. 실외 촬영은 [[충청북도]] [[청주시]]에 있는 운보의 집[* 화가 [[김기창]]이 살았던 집이다.]에서, 실내 촬영은 [[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선샤인랜드의 한성전기회사 세트 2층에서 했다. == 같이 보기 == [include(틀:아관파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