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티베트의 역사)] [include(틀:중국의 역사)] ||||||<:>{{{+1 {{{#ece5b6 '''백고대하국'''[br][[파일:백고대하.png|width=100]]}}}}}} || ||||||<:>[[파일:북송지도.png|width=300]]|| |||||| 요-북송 시대 때의 서하(西夏). 금나라 때도 별 차이가 없었다. || ||||||<:>[[파일:서하지도.png|width=300]]|| |||||| 세부 지도 || ||||||<:><#59412c> '''882년[* 882년 [[당나라]]가 [[이사공]]을 하국공에 책봉.]/1038년~1227년''' || ||<:><-2> '''성립 이전''' ||<:><#59412c> '''멸망 이후''' || ||<#1e90ff><-2> [[탕구트|'''{{{#fff 탕구트}}}''']] ||<#142a62> [[몽골 제국|'''{{{#fff 몽골 제국}}}''']] || ||<:> '''이칭''' ||||서하(西夏), 만비국(萬祕國),[br]방니정국(邦泥定國), 당올(唐兀), 당항(黨項) || ||<:> '''위치''' ||||중국 [[간쑤]], [[칭하이]], [[산시성(섬서성)|산시]], [[닝샤 후이족 자치구]], [[신장 위구르 자치구]], [[내몽골 자치구]] || ||<:> [[수도(행정구역)|'''{{{#ece5b6 수도}}}''']] ||||[[인촨|흥경부]](興慶府) || ||<:> '''정치 체제''' ||||[[군주제]] || ||<:> '''국가원수''' ||||[[황제]] || ||<:> '''국성''' ||||이(李) || ||<:>'''주요 황제'''||||[[경종(서하)|경종 외명낭조/이원호]][br][[숭종|숭종 이건순]][br][[인종(서하)|인종 이인효]] || ||<:> '''언어''' ||||[[서하어]][* [[중국티베트어족]]의 [[티베트버마어파]]에 속하는 언어였다.] || ||<:> '''문자''' ||||[[서하 문자]], [[한자]] || ||<:> '''종교''' ||||[[대승 불교]], [[도교]], [[유교]], [[이슬람교]] || ||<:> '''종족''' ||||[[탕구트족]] || ||<:> '''통화''' ||||보전(寶錢), 통보(通寶), 원보(元寶) || ||<:> '''현재 국가''' ||||[include(틀:국기, 국명=중국)][br][include(틀:국기, 국명=몽골)]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송]] 시대, 송나라 서북쪽에 있었던 [[티베트]] 계열의 [[탕구트족]]이 세운 왕조이다. 본래 탕구트족은 자신의 나라를 크고 높은 나라라는 '''대백고국'''(大白高國)[* phôn¹ mbın² lhiə tha²,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Western_Xia_1.svg|서하문자표기]]] 또는 '''대하'''(大夏), '''백고대하국'''(白高大夏國)이라고 불렀다. 또한 탕구트를 뜻하는 '''미으냐'''(mjɨ-njaa)라고도 했다. 탕구트어와 가까운 [[티베트어]]로는 '''미냑'''(, 彌藥)이었다. '''서하'''는 [[북송]] 쪽에서 부르던 이름이었는데, [[하나라]]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 지역을 정복하여 지배층이 탕구트족이고 피지배층이 [[한족]]인 서하국을 건국한다. [[1032년]]에 건국한 후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현재의 [[칭하이성]], [[간쑤성]], [[산시성(섬서성)|산시성]] 북부 일대를 직접 다스렸으며 200년 동안 중계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1227년]],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에 의해 [[멸망]]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역사 == === 민족 === 탕구트인은 《[[삼국지연의]]》에 자주 나오는 [[강족]](羌族)에서 갈라져나온 집단이었다. 강족은 [[오호십육국 시대]] 때 일시적이나마 좁은 의미의 중원을 지배했다. 이후 강족은 크게 '''발강'''(發羌)과 '''당항강'''(党項羌)으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서남쪽에 [[토번]](티베트)을 세웠고, [[탕구트]]로도 불리는 후자가 [[간쑤성]], [[산시성(섬서성)|산시(섬서)성]] 일대로 이주하여 서하를 건국했다. 한편으론 탕구트인이 [[북위]]를 세운 [[탁발선비]]의 후손이라는 의견도 있다. [[송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인 《[[송사]]》에 의하면, 서하 황실의 선조는 '''탁발적사'''(拓拔赤辭)였는데, 그의 성씨인 '탁발'이 서기 4세기에 만주 북부에서 중원으로 남하하여 북위를 세운 탁발선비족의 부족명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 반박하는 의견도 있는데 성씨를 탁발씨로 한 건 자칭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티베트계, 그러니까 정확히는 강족계에 해당하는 민족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쪽이 더 유력하다. 실제로 서하어 역시 [[한장어족]]에 속했다. 물론 선비족의 영역이 지금의 칭하이 성 및 [[신장 위구르 자치구|신장]] 지역 일대를 점령하면서 티베트와 접하기도 했고, 강족과도 여러 접촉이 있었던 만큼 탕구트족 역시 일부 [[선비족]]들과의 혼혈도 있었거나 서로 접촉 및 동화되어 일부 탕구트족들이 선비화되거나 반대로 일부 선비족들이 탕구트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탁발씨를 자칭한 건 선비족의 영향(문화적 등)을 받아서 그렇다고 봐야 한다. [[수나라]], [[당나라]]의 황실이 선비족에서 나왔다고 해도 양 국가가 해외에서는 타브가치라고 불리며 선비족 국가로 보였지만 한족은 선비족 국가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과 비슷하다. === 건국 === [[1032년]], [[이덕명|조덕명(이덕명)]]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경종(서하)|조원호]]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그는 1038년에 조씨 성을 버리고 이씨로 성을 바꾼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수도는 영하(寧夏) 흥경부(현재의 [[인촨]])였다. 1041년, 동등한 황제국 관계가 된 것에 반발한 북송에 의해 '''[[호수천 전투]]'''가 벌어졌는데, 북송이 13,000명의 사상자를 내며 거하게 깨졌고, '''정천(定川) 전투'''에서 갈부민이 이끄는 서하군에게 9,000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다. 이후 3년간의 전쟁 끝에 화의가 맺어졌다. 이 당시 북송은 [[요나라|요]]와도 전쟁 중이어서 [[양면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서하와 북송이 화의에 나선 까닭은 전쟁을 마친 요가 서하와 북송 중에서 어느 한 편이 될 가능성을 양국 모두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서하가 화의를 제안하고 북송이 동의하여 1044년 북송이 서하에게 매년 공물을 보내는 대신 서하는 북송의 신하 나라가 되었다('''경력의 화의'''). 그래서 서하의 황제는 하국왕(夏國王)에 봉해졌고, 북송은 매년 [[비단]] 130,000필, [[은]] 50,000냥, [[차]] 20,000근을 보냈다. [[경종(서하)|'''경종''' 이원호]]는 또한 [[토번]]을 크게 물리치며 영토를 확장했고 서하 문자를 만들기도 했다. === 혼란기 === 하지만 서하는 곧 혼란을 겪는다. 정작 경종은 말년에 태자의 아내, 즉 자신의 며느리를 취하는 바람에 1048년, 태자의 원한을 사 태자에게 암살당하고 그 태자도 처형된 탓에 막내아들인 [[의종(서하)|이양조(의종)]]가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문제는 의종이 너무 어렸던 탓에 섭정을 받아야 했는데 그 모친인 몰장태후가 친인척들을 등용해 정사를 어지럽히는 등 국정을 농단했다는 것. 1056년, 외간 남자와 사통하다가 또 다른 사통하던 사람에게 원한을 사서 죽음을 당했지만 그녀의 오빠인 몰장와방이 혼란을 수습하여 몰장씨 일가의 전횡은 이어진다. 하지만 몰장와방도 1061년, 의종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끝내 역으로 살해된다. 그렇게 하여 외척의 영향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1068년에 개혁정책을 펼치던 의종이 전쟁 도중 날아온 화살에 맞아 급사한다. 결국 또다시 어린 황제인 [[혜종(서하)|이병상(혜종)]]이 즉위하고 이번에는 태후 양씨가 섭정하고 또다시 외척 시기가 열리며 이 와중에 혜종은 한번 폐위되었다가 다시 즉위하기도 했다. 게다가 혜종 역시도 의종 못지않게 단명한다. 이 시기에는 서하가 북송의 국경을 침공해 북송이 접경 무역을 중단하거나, [[충악]]이 외명산 부락을 투항시킨 데 이어 북송 조정의 승인도 없이 수주성을 점령하자 서하가 보안군을 습격해 보안군이 많은 피해를 입고 1071년 충악이 나올성을 축조하였으나, 북송의 축성에 분노한 서하에 의해 무녕성을 빼앗기는 등 서하와 북송 간에는 산발적인 충돌이 잦았다. 1073년 왕소가 하황 일대를 수복한 뒤, 1081년 이병상이 양태후에 의해 억류되자 이를 이용해 북송이 [[오로벌하| 5개의 진로로 서하를 공격하였으나]] 명령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고 난주를 수복했던[* 희하로는 희하난회로로 바뀜] [[이헌(북송)|이헌]]의 군대가 영주에 오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군량 보급 문제로 인해[* 서하의 양태후가 [[청야전술]]을 통해 군량 보급을 끊어 놓았다.] 실패했다. 이후에는 북송이 1082년 [[서희(북송)|서희]], [[심괄]]로 하여금 영락성을 신축하여[* [[충악]]이 수원 부족을 이유로 영락성 신축을 반대했으나 신종은 이를 강행하였다. 이로 인해 원한을 품은 충악은 영락성이 공격을 받고 있음에도 이를 방관했다. 서하군이 영락성을 공격할 즈음 충악은 이 와중 죽고 만다.] 서하를 공격하려 했으나 오히려 서하의 역공을 받아[* 서하군은 이헌, [[심괄]]의 원군이 영락성을 돕는 걸 막았다.] 성이 함락되고 서희도 난전 중 전사했고 송 신종은 신료들 앞에서 통곡하였으나 서하도 경제적인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 전성기 === 이렇게 외척의 전횡은 계속되었고 이 와중에 이번에는 [[숭종|이건순(숭종)]]이 즉위하지만 그 역시도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태황태후 양씨가 섭정한다. 이 시기, 서하는 국력이 약해져 북송과의 전쟁에서도 피해를 입는 등 침체되어 있었다. 1099년, 친정을 시작한 숭종이 양씨 일가를 숙청하면서 나라를 안정시킨다. 이후 숭종은 관료제를 정비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며 비단길을 장악하고 요나라-금나라 교체기를 안정적으로 지나가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1139년에 사망한다. 송 신종 시절 서하와의 전쟁에 패해 하황을 토번에 넘겨주고 서하가 북송의 국경을 침범하는 등 서하와 북송 간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다. 이후 북송 휘종 시기 [[왕후(북송)|왕후]]의 지휘 하에 하황을 수복한 뒤 황두회흘까지 점령하면서 농우도호부를 세우는데.[* 왕후는 1106년에 죽었다.] 이후 환관 [[동관(북송)|동관]]이 서하와의 전쟁에 관여하게 된다. 여기서 비록 동관이 패한 걸 승전으로 허위 보고하였던 것도 있지만, 서하 북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정강의 변 시기, 서하는 북송이 점령했던 영토들 일부를 점령한다.[* 하황 일대는 서하, 금이 동시 관할하게 되었다.] 이후 즉위한 인종 이인효 역시도 선정을 펼쳤다. 특히 인종은 인재를 등용하는 데 민족을 가리지 않았고 과거제를 전격적으로 시행하였으며 동시에 율령 정비에 힘썼고 문묘를 정비하고 불교를 후원하는 한편 실록 편찬에도 힘을 기울이는 등 숭종보다는 내치에서 더 많은 업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서하의 전성기는 딱 여기까지였다. === 멸망 === 고려가 동쪽에서 요와 북송 사이 3자 구도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서하는 서쪽에서 요, 북송과 함께 3자 구도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다만, 북송과 더 친한 고려와 달리 서하는 요나라와 더 우호적인 사이였다. 서하의 황후 중에는 숭종의 황후처럼 요나라의 야율씨 황족도 여럿 있었다. 이 때문에 서하는 북송 말기까지 칭신을 하면서도 북송과 언제 깨질지 모르는 긴장 어린 관계를 유지했다. 한족의 북송과 거란족의 요가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한 후에는 금과도 관계를 유지했다. 1194년 '''[[환종]]'''이 [[금나라]]에 의해서 하국왕(夏國王)에 책봉된 것이 그 사례이다. 이렇게 서하는 요나라에서 금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에는 어찌저찌 줄을 잘 갈아타서 멸망을 피해갈 수 있었지만 인종 시기부터 강해진 몽골이 제대로 대처하기도 전에 성장한 데다 인종도 이를 어찌하지도 못한 채 1193년에 사망한다. 문제는 인종의 뒤를 이은 환종 이순우가 몽골이 성장하는 것을 뻔히 보고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아 몽골의 침공 때 제대로 당했고 이후 서하는 멸망 때까지 황제가 시도때도 없이 바뀌는 혼란기에 접어든다. 인종 사후 서하는 겨우 30년밖에 유지되지 못했는데 그 기간 동안 무려 다섯명의 황제가 있었다. 숭종과 인종 시기가 좀 극단적으로 길기는 하지만(둘 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된 탓도 있지만 그래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어도 죽었을 때 나이는 평균적인 수명 수준은 되었다) 둘 다 합쳐서 100년은 넘고 이원호 사후의 혼란스럽던 의종과 혜종 시기도 합쳐서 30년을 넘는다는 걸 감안하면 이 시기의 혼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해 준다. 게다가 황제가 바뀔 때마다 몽골에 대한 외교적 방침이 바뀌는 바람에 지속적으로 침공을 겪는 원인이 된다. 위구르족을 복속시킨 칭기즈 칸은 양종 시기에 1차 정벌에 나섰는데 선봉대가 패배하고 수도를 포위한 후 황하를 이용해 수몰시켜버리려 하나 성공시키지 못하고 철수한다. 이후 양종은 몽골에게 항복하고 황녀를 보내면서 무릎을 꿇게 된다. 그리고 황위를 찬탈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른 신종은 친몽골적 태도를 보이며 몽골의 금나라 공격에 지원군을 보내는 등 열심히 줄을 선다. 하지만 서하 내부의 반몽골적 태도와 원래 친선관계였던 금나라에게 등을 돌리는 것에 거부감도 높았던 터라 몽골의 추가지원 요청을 거부하고 황위마저 자신의 아들인 헌종에게 넘기고 퇴위한다. 그렇게 제위에 오른 헌종은 조정의 여론에 따라 금나라와 화친하고 몽골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하는데 결국 호라즘 정복 이후 몽골은 서하를 멸망시키기로 하며 서하에 대한 전면공격을 감행한다. 원정 도중 칭기즈 칸은 부상을 입게 되는데 이에 몽골에서는 서하에게 항복을 권유하지만 서하는 비웃으며 사신을 면전박대하며 내쫓는다. 이에 빡친 칭기즈 칸은 공격을 더욱 더 강화시켜 성을 하나하나 점령하며 수도 코앞까지 진격한다. 결국 몽골군의 공격을 못 버티고 헌종 사후 제위에 오른 말제가 직접 항복하기를 청하고 잠시 항복을 위해 수습하고 있는 시간 동안 말에서 낙마한 칭기즈 칸이 사망하였는데, 그의 유언이 [[사망 플래그|'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서하인을 한 명도 남기지 말라']] 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몽골은 서하의 수도를 공격하고 함락시키면서 그렇게 서하는 멸망했다. === 멸망 이후 === 하지만 이후 임시 대칸에 오른 [[툴루이]]는 서하인을 모두 죽이지는 않았다. 서하인이 많이 학살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적지 않은 서하인들이 [[몽골]] 제국에 흡수되었다. 서하의 요새 중 하나가 카라호토( )인데 몽골어 이름이며, 탕구트어로는 '검은 강'을 뜻하는 zjɨr²-nja¹. 한자로는 흑성(黑城), 흑수성(黑水城)으로 불린다. 이 요새는 몽골이 교역상의 이유로 보존한 덕분에 서하인들은 카라호토에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서하 출신 장수 차간(察罕, ?~1255)은 몽골군을 이끌고 [[남송]]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후 서하인의 후손 중 일부는 안후이 성 근처에서 살다가 원나라가 멸망한 뒤에 [[한족]]에 흡수되어 소멸했다. [[명나라]] 중기인 16세기 초까지 서하 문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카라호토에서 명맥을 이어나가던 서하인들은 1372년 명 태조 [[주원장]]의 지시로 카라호토를 침공한 풍승(馮勝)의 명나라군에 의해 멸망했다. 이 당시 카라호토는 소빙기에 접어들면서 주변 오아시스가 소멸하기 시작하여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 쳐들어온 풍승은 둑을 쌓아서 카라호토로 들어가는 수로를 차단해버렸다. 결국 카라호토는 명군의 공격으로 함락되고 명군이 서하인들을 남김없이 학살하면서 서하인들은 사라졌다. 사라진 서하의 탕구트인들과 가장 가까운 민족으로는 중국 쓰촨 성, 간쑤 성, 칭하이 성 등지에 사는 [[강족]](羌族)이 있다. 다만 서하의 [[DNA]]적 특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중국 중앙 텔레비전]] 보도). == 역사서 == 서하인 자신들이 남긴 서하의 역사서는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20세기 초에 [[둔황]]에서 아우렐 스타인(Aurel Stein)과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서하의 탕구트 문자로 기록된 문헌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표트르 코즐로프(Пётр Козлов)가 카라호토를 발굴하면서 탕구트 문헌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들 문헌들은 대부분 불교 서적이었다. 현존하는 역사서가 전혀 없어 '처음부터 역사서 편찬 같은 것을 안 한 건가' 라는 의혹이 일기도 하지만 중원의 왕조를 모방하여 황제국의 제도를 갖춘 나라가 역사를 기록하지 않을 리는 없다. 일찍이 [[인종(서하)|인종]] 시기에 한림학사원(翰林學士院)을 설치하고 [[실록]]을 편찬하게 했으며 1225년에는 나세창(羅世昌)이라는 신하가 관직을 그만둔 후 《하국세차》(夏國世次)라는 역사서를 저술한 바 있다. 하지만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칭기즈 칸의 유언에 의해 자행된 서하인 대학살 기록이나, 옛 서하의 강역 내에 남아 있는 황폐화된 유적들을 보아 종합해보면, 전쟁과 방화 등의 난리로 인해서 사서들이 모두 유실됐을 가능성이 있다. 현존 사서가 없기 때문에 서하의 역사에 대해서 서하인들이 남긴 '''서하문자'''로 기록된 편지, 비문, 문집 등을 활용하거나 송나라에서 남긴 기록, 몽골인들이 남긴 기록 등을 참고하여 연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하의 역사나 문화를 연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대표적으로 서하 역사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부분은 《[[송사]]》 <하국전>(夏國傳)이 있다. 그 외 《[[요사]]》와 《[[금사]]》에 서하에 대한 기록들을 남긴 게 전부인데 전기 서하의 기록은 요사에 많고, 후기 서하의 기록은 금사에 많다. == 군대 == [include(틀:역대 중국/대만의 군사조직)] [[고려]]가 거란을 주적으로 대치하게 되면서 적은 인구에 어마어마한 무리를 한 걸로 유명한데 서하는 200만에서 아무리 높게 잡아도 300만 선으로 추정되는 인구로 거란은 물론 인구 1억 송과도 적대했다. 서하는 고려조차 뛰어넘은 군사 사회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중국측인 송나라 사료에 기록된 서하의 군대는 최대 50만인데 이러면 서하 인구를 500만으로 잡아도 인구 10%, 생산가능인구의 절반이 군인이었다는 뜻이다. 특히 서하는 남자의 나이가 15세 이상이 되면 모두 어른으로 간주하고, 군인이 될 의무를 적용시키는 [[징병제]] 국가였다. 그래서 송이 기록한 서하군의 총인원 수는 50여만 명이나 되었다. 다만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송이 주장하는 50만 군대는 명백한 과장이며 실제 서하의 병력은 많이 동원해야 30만이며 동원 가능한 병력은 15만~18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하군은 젊고 용감한 사람을 전투병으로 삼았고, 겁이 많거나 나약한 사람은 후방에서 농사를 지어 식량을 지원하도록 배려했다. 물론 이는 말 그대로 다 끌어모은 숫자고 한번에 동원가능한 전력은 이보다 적었겠지만 엄청난 무리임은 분명했다. 성인 남성들을 다 동원하고도 모자라서 당시로선 드물게 [[여군]](女軍)이 정규편제로 존재했다. 전근대에 양성평등 같은 게 아니라 압도적인 물량의 송과 적대관계로 장기간 전쟁을 하는 바람에 남성인구 다 끌고가도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들 여군을 '''마괴'''(麻魁)라고 불렀으며, 이들은 송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철요자'''(鐵鷂子)라는, 직역하면 전갈 기병 정도되는 기병종도 존재했는데, 말과 탑승자의 갑옷을 하나로 묶어 탑승자가 전투 중에 죽어도 말은 계속 전진해 적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특이한 병종이었다. 이 병종은 나중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철기병'''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 '철요자(鐵鷂子)'라는 병종은 서하의 고유 병종이라고 할 순 없다. 마찬가지로 중기병을 다수 운용한 유목제국인 거란족의 요나라에서도 말과 기수를 묶어 낙마를 통한 전투력 저하를 막은 병종이 있었고, 이들과 교전하던 금나라 역시 '''괴자마'''라는 비슷한 병종을 남송과의 전투에서 운용했다. 1998년에 저술된 《서하의 군사, 과학, 그리고 기술》에 적힌 바로는 기병, 전차, 궁병, 포병, 수륙양용군을 포함한 군사적 기술을 통해 요, 금, 송 등 당대의 중국 왕조들 사이에서 동등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보통 서하군은 10일 이내로 전투를 끝내는 속전속결을 선호했고, 그래서 병사들이 휴대한 식량도 10일분을 넘기지 않았다. 서하인들은 말을 잘 다루고 굶주림과 갈증과 더위와 추위를 잘 견뎠으며, 전황이 불리하면 재빨리 후퇴하여 남은 전력을 보존했다. 서하군에는 전쟁 포로들로 구성된 특수 부대인 '''금생'''(擒生)도 있었는데, 이들의 인원수는 총 10만 명이었다. 대개 '금생'은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한족]]들이었고, 간혹 [[거란족]]이나 티베트(토번)족도 있었다. 이밖에도 서하군은 주변의 이민족들 중에서 활쏘기와 말타기에 뛰어난 자들을 5,000명 뽑아서 '''육반직'''(六班直)이라 부르며, 매달 쌀 2석을 급료로 주었다. 서하군에는 [[외인부대]]로 복무하는 외부 동맹군도 있었는데, 횡산(橫山)에 사는 [[강족]](羌族)의 일파인 '''산와'''(山訛)였다. 《송사》를 보면 이들 산와족은 전투에서 서하인들보다 월등한 용맹성과 기량을 보여, 서하군보다 훨씬 강력했다고 평가받았다.[*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06~207쪽] == 문화 == [[파일:서하 중국.jpg|width=700]] 서하 황릉의 봉분 [[파일:서하 능 중국.jpg|width=700]] 서하 능의 특이한 석상 서하 또는 서하의 정체성을 가졌던 탕구트족들이 자신들의 역사책을 기록하지 못하다보니 그만큼 서하 제국과 탕구트족들의 문화가 어땠는지 알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나마 서하 문자들이 존재했고, 다는 아니지만 일부분 해독되는 중이라서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벽화, 도자기, 칠기, 목제나 석제, 금속제품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더욱 많이 알려지기도 한 점도 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한자를 참고로 한 서하 문자가 대표적이며, 불교와 유교, 토속신앙 중심의 문화가 발전되었다. 불교를 많이 믿다 보니 불화와 대장경들도 남겼다. 건축물은 일부 탑들과 성터, 그리고 서하 황릉이 있다. 서하 황릉은 "동양의 금자탑([[피라미드]])"이라고 불리며, 현재는 흙으로 쌓인 모습이지만 과거에는 여기에 탑처럼 생긴 큰 건축물을 세웠다. 다른 북방 [[유목민]] 및 기마민족들처럼 '''[[변발]]'''을 하기도 했다. 탕구트족 고유의 문화를 중심으로 하여 송, 요, 금, 티베트, 위구르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그 외 서역의 여러 민족들의 문화들도 존재했다. 특히 서하는 주류 민족인 탕구트족 외에도 한족, 몽골족, 위구르족, 거란족, 티베트족이 살고 있는 다민족 국가였다. 인구는 학자들이 추정하기를 200만이며 전성기 시절의 인구도 300만으로 서하는 인구가 300만을 넘긴적이 없다. 왜냐면 서하의 영토가 초원과 사막이 많은 척박한 지역이라서 생산력이 낮아 인구 증가율이 낮았으며 계속된 전쟁으로 인구의 소모가 심했기 때문이다. [[https://zh.wikipedia.org/wiki/党項#/media/File:西夏男供養人像.png|서하의 관료인들]] == 고려와의 관계 == 서하와 [[고려]]와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의 교역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6690|#]] == [[/왕사|왕사]] == * [[서하/왕사]] == 매체에서 == * [[슈토헬]] - 칭기즈 칸이 서하와 금나라를 정복하는 와중에 서하 문자를 보호하려는 사람들을 다루는 [[만화]]. * [[선더포스Ⅵ]] - 뜬금없이 [[서하 문자]]가 많이 나온다. 그뿐. * [[징기스칸 4]] - 시나리오 1에서 흥경과 돈황 두 도시를 보유한 국가로 나온다. 서하가 멸망한 이후 시나리오에서는 돈황은 몽골 제국, 원, 명의 도시로 남아 있지만 흥경은 몽골에게 완전히 폐도 되면서 빈 땅으로 남아있다. * [[회전사]] - [[홍콩]]의 [[손위군]]의 만화로, 배경이 서하국이다. * [[천룡팔부]] - 서하국의 황후로 이추수가, [[허죽]]의 정인으로 은천공주가 나온다. * [[돈황]] - [[11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 장군재상 - 서하와 [[송나라]]의 대결을 다루는 드라마. * [[크루세이더 킹즈 3]] - 1066년에 등장한다. 2대 황제 [[의종(서하)|의종]]이 나온다. == 같이보기 == * [[탕구트]] - [[6세기]] 무렵부터 [[14세기]]경까지 중국 북서부를 중심으로 활약한 민족. * [[서하 문자]] - 탕구트족 계통의 국가인 서하(西夏)에서 쓰인 [[표의문자]]. == 둘러보기 == [include(틀:송사)] [include(틀:요사)] [include(틀:금사)] [[분류: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