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오대십국 왕조)]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D6C97 0%, #a283ab 20%, #a283ab 80%, #8D6C97); color: #ece5b6" '''후진 초대 황제[br]{{{+1 고조 덕황제 | 高祖 德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석경당상상화.png|width=100%]]}}} || ||<-2> {{{#ece5b6 {{{-2 석경당 상상화[* [[명나라]] 시기의 간행본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실린 그림. 시대상에 맞게 그리면 명나라의 [[익선관]]을 쓴 모습이 아니라 절상건이나 전각복두를 쓴 모습이어야 한다.]}}} }}} || ||<|2> '''출생''' ||[[892년]] [[4월 20일]] || ||[[당나라|당]] [[산시성(산서성)|하동도]] [[뤼량시|태원부 분양리]][br](現 [[산시성(산서성)|산시성]] [[뤼량시]]) || ||<|2> '''사망''' ||[[942년]] [[9월 11일]] (향년 50세) || ||[[후진]] [[업성]][br](現 [[허베이성]], [[허난성]] 인근) || || '''능묘''' ||[[현릉]](顯陵) || ||<|2> '''재위기간''' ||'''{{{#ece5b6 초대 황제}}}''' || ||[[936년]] [[11월 28일]] ~ [[942년]] [[9월 11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석(성씨)|석(石)]] || || '''휘''' ||경당(敬瑭) || || '''부모''' ||부황 [[석소옹|헌조]][br]모후 효원의황후 || || '''형제자매''' ||5남 중 2남 || || '''배우자''' ||황후 이씨 || || '''자녀''' ||7남 1녀 (양자 2남) || || '''작호''' ||개국백(開國伯) → 개국공(開國公)[br]→ 조국공(趙國公) || || '''묘호''' ||'''[[고조]](高祖)''' || || '''존호''' ||영무명의황제(英武明義皇帝) || || '''시호''' ||성문장무명덕효황제[br](聖文章武明德孝皇帝) || || '''연호''' ||천복(天福, [[936년]] ~ [[942년]]) || || '''절일''' ||천화절(天和節)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후진]](後晉)의 건국자. == 초기 행적 == [[튀르크]]계 [[사타족]](沙陀) 출신으로 [[태원]] 출생이었다. 본래는 후당 [[장종]] [[이존욱]]을 도운 개국 공신이었다가, [[명종]] [[이사원]](李嗣源)의 가장 충실한 부하가 되어 그를 도와 많은 일을 하였다. 이사원은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부마]]로 삼을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 그 후 금군장관(禁軍長官)이 된 그는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와 북경유수(北京留守)를 겸하게 되었는데, 청렴하고 일을 잘해 많은 신망을 얻었다. 여기까진 꽤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 첫 번째 배반을 일으키다 == 문제는 장인인 명종의 사후부터 시작되었다. 명종의 아들 [[이종후]]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노왕(潞王) [[이종가]](李從珂)의 반란으로 몹시 위태로운 처지가 되었다. 이종후는 기병 50기만을 거느리고 간신히 도망쳐 위주(魏州)를 지나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던 석경당과 마주치게 되었다. 석경당은 명종 이사원의 사위고, 이종후는 이사원의 아들이라 자형과 처남 사이가 되니, 위급한 처지에 빠진 이종후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석경당은 사정을 듣자 한숨을 쉬면서 영 불안하게 굴더니, 위주 자사 왕홍지(王弘贄)와 상의해보고 말을 올리겠다며 우선 그 자리를 떴다. 둘이 만난 자리에서 왕홍지는 이렇게 말했다. >옛적에 파천하던 [[천자]]들은 병력 아니면 돈이라도 많았지요. 그런데 당금 천자가 가진 것이라곤 고작 졸병 50명 뿐인데 우리가 충성한들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솔깃해진 석경당은 이 말을 그대로 이종후의 심복인 궁전 고사 사수영(沙守榮)과 황가 시위 분홍진(奔弘進)에게 전했다. 화가 난 분홍진은 석경당을 매우 꾸짖었다. >황상께서는 선황 폐하의 아드님이고 그대는 선황 폐하의 사위가 아닌가! 지금 황상께서 천하에 믿고 의지하는 이가 그대뿐인데 배신을 하겠다는 것인가! 사수영은 석경당을 죽이려고 칼을 뽑아 달려들었고, 석경당의 위사 역시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어 싸우다 둘 다 죽었다. 이 모습을 본 분홍진은 몹시 노해 자결을 택했다. 석경당은 곧바로 심복인 [[유지원]](劉知遠)[* 후한(後漢)의 고조(高祖)가 된다.]을 보내 50명의 병사들을 단숨에 정리해버렸고, 본인은 낙양으로 달려가 이종가에게 항복했다. 그 사이 왕홍지는 이종후를 잡아다 가두었고, 이종가는 이종후는 물론이고 이종후의 아내와 아들들까지 학살했다. 석경당은 자신을 믿어준 황제의 후손을, 자기 손으로 죽게 만든 것이다.[* 이게 뒤늦게 마음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훗날 석경당은 황제가 되고 나서 이종후를 민황제(閔皇帝)로 추존했다.] == 석경당이 쏘아올린 [[연운 16주|작은 공]] == 이종가는 석경당이 먼저 굽히고 들어와서, 이종후를 죽이고 황제가 되는 데 성공했지만, 사실 석경당과는 이전부터 사이가 영 좋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석경당의 군사들에게 조서를 내려서 위문하였는데, 석경당의 부하들이 석경당에게 만세를 외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의 만세는 황제에게만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종가 입장에서는 불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석경당을 천평군 [[절도사]]로 좌천시켰다. 하지만 석경당은 석경당대로 이종가를 위협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종가의 주변에 심복을 많이 만들어놓아서 그의 동태를 두루 살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에 흩어진 재산을 모으고, 군비를 확충하며 만만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자신에게 인사 좌천의 명령이 떨어지자 심복 [[유지원]]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유지원은 말했다. >우리에겐 정예부대가 있으니 지형을 점하고 싸우면 반드시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 하지만 모사인 상유한(桑維翰)은 의견이 달랐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거란]]과 가깝습니다. 만약 우리가 거란 군주를 대왕으로 모시고 구원을 청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이면 지원군이 올 터이니, 어찌 근심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석경당은 그게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스스로 [[요나라]]에 칭신하는 것을 넘어서 [[요태종]] 야율요골의 아들이 되기를 간청하는 상주문을 거란에 보내는 짓을 벌인다. 그때 '''석경당은 47세, 요태종은 37세'''였다.(...) 아들보다 열 살 어린 아버지가 탄생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 심지어 석경당은 후대에까지 악영향을 끼칠 엄청난 선택을 하고 마는데,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 16주]]'''를 거란에게 '''무상으로 넘겨주기로 한 것.''' 이에 유지원은 어이가 없어 참다 참다 석경당한테 간언을 올려 이를 만류했다. >'''신하의 예도 모자라서 아들과 아버지의 예를 맺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도움을 원한다면 재화와 보물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어찌 땅까지 내주시려고 하십니까?''' 하지만 석경당은 그 간언을 전부 무시했고, 자신의 제안을 그대로 강행했다. 전부터 연운 16주를 노리던 요태종은 석경당의 제안에 신이 나서 가을이 되면 군대를 이끌고 가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과연 가을이 되자 요태종은 약속대로 무려 5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남하해왔다. 당시 석경당은 이종가와의 싸움에서 몹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었는데, 요태종의 요군 5만이 이종가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단숨에 전세를 뒤바꿔버렸다. 특히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종가 휘하의 장군들과 병사들도 모두 황제를 배신하고 석경당에게 투항했을 정도. 결국 패배한 이종가는 가족들과 함께 누각에 불을 질러 분신 자살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원래는 성 전체에 불을 지르려 했으나 황후가 만류하여 누각에만 불을 질렀다.] 후당도 그렇게 멸망하고 말았다. == 치욕의 재위 == 후당을 멸망시킨 석경당은 즉위식을 거행하여 정식으로 황제가 된다. 요태종은 석경당을 중원의 황제로 만들어주겠다며 신하들과 함께 그의 즉위식에 참석하여 손수 책봉식을 거행했다. 이 책봉식에서 요태종은 직접 석경당에게 옷을 입혀주었는데, 당연히 거란식 의복이었다. 중국의 황제가 다른 나라, 그것도 이민족 황제에게 굽실거리며 거란옷을 입고 책봉되는 상황이었는데, [[당나라]] 때 이미 황제가 책봉 간섭을 받거나 아우 나라 노릇을 한 적은 있으나[* 한나라의 건국자 [[한고제]]도 [[백등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흉노의 아우가 된 바 있다.] 이런 전례는 없었다.[* 심지어 이후에도 없었다. 가장 초라할 때가 [[남송]] 초기, 남송 황제가 [[금나라]]와 군신관계 맺고 책봉 받으며 세공을 바치던 때이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금나라가 남송 황제에게 [[여진족]] 의복 입히고 책봉식 하지는 않았다. 그나마도 [[해릉양왕]]의 개뻘짓과 그 뒤에 남송의 공격 기타 이런저런 문제들로 인해 새로 즉위한 [[금세종]]은 군신관계를 숙질관계(숙부-조카관계)로 완화, 세공을 세폐로 변경(세'공'의 공은 바친다는 의미다.) 세폐 감축 등을 내세워 남송와 화평을 맺었다.] 황제가 된 석경당은 약속대로 요나라에 세공을 바쳤다. >천복 연간에 서역西域의 중 말라襪羅가 진에 와서 조회朝會하였는데 화복火卜을 잘하였다. 얼마 후 고조高祖에게 하직하고 고려에 유람하기를 청하였다. [[고려]] 왕 왕건은 그를 심히 예우하였다. 이때 거란이 [[발해]]의 지역을 병탄한 지 몇 년이 되었다. 왕건이 조용히 말라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본디 우리의 친척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에게 잡혀갔다. 내가 중국 조정을 위하여 거란을 쳐서 그 지역을 취하고 또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니, 대사는 돌아가서 천자에게 말해 기일을 정하여 양쪽에서 습격하게 해달라.” 하였다. 이에 말라가 돌아가서 낱낱이 아뢰었으나 고조는 회답하지 아니했다. >속통전續通典 중 >처음 고려 왕건이 군사를 써서 이웃나라를 멸망시키고 자못 강대해졌다. 호승胡僧 말라襪羅를 통하여 고조(석경당)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우리와 혼인한 나라입니다. 그의 왕이 거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조정과 함게 그들을 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고조는 회보하지 않았다. > >출제出帝가 거란과 원수가 됨에 이르러 말라襪囉가 다시 말하였다. 출제가 고려로 하여금 거란의 동쪽 변경을 어지럽혀 거란의 세력을 나누고자 하였으나, 마침 왕건王建이 죽고 아들인 왕무王武가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라 칭하며 표表를 올려 상喪을 알렸다. > >11월 戊戌에 왕무를 대의군사 고려왕大義軍使 高麗王으로 삼고, 통사사인 곽인우通事舍人 郭仁遇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거란을 공격하도록 조지詔指로서 깨우쳤다. (거란이 이를 알까 두려워하여 조명詔命의 형태를 띠지 않고 조지詔指로서 이를 깨우쳤을 뿐이다) > >곽인우郭仁遇가 그 나라에 이르러, 고려의 군사가 매우 약하여 지난번 말라襪囉의 말이 단지 왕건王建의 과장일 뿐이며 사실은 감히 거란과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았다. 곽인우가 돌아가자 왕무는 다시 다른 이유를 들어 해명하였다. >[[자치통감]] 중[[http://contents.nahf.or.kr/id/NAHF.edeah.d_0003_0010_0020_0030#self|#]] 사실 거란이 쳐들어오기 전에 [[태조(고려)|왕건]]이 [[발해]] 멸망 후 거란 견제를 위해서 석경당에게 함께 거란을 양면에서 치자는 제안을 했지만 석경당이 그냥 무시해버렸다. 물론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왕건의 야심을 고려할 때 그 의도를 경계했을 수도 있지만 석경당의 행보를 볼 때 그냥 거란에 대적할 생각 자체를 안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석경당 본인의 조카 대에 괜히 거란에게 저항하다 망한 걸 생각해보면, 그리고 고려도 당시 갓 통일된 터라(석경당이 황제로 즉위하던 해에 고려는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시대]]를 마감시켰다.) 내정을 정비해야 했으며 후진도 당시 남쪽에 [[오월(오대십국시대)|오월]], [[남당]], [[남한(오대십국시대)|남한]] 등의 십대 국가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해볼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애초에 거란 견제는 석경당과는 비교도 안되는 후당의 이존욱조차도 그저 거란의 침공을 물리친 정도로 끝냈지 거란을 역으로 침공하는 건 못했다. 실제로 왕건의 아들 [[혜종(고려)|왕무]] 때 이런 고려의 군사력도 사실은 뻥이라는 게 그대로 후진의 사신에게 드러나서 '오랑캐가 힘도 없으면서 뻥친다'고 중국 사관에게 욕을 푸짐하게 먹는다.(...) 우습게도 그렇게 원하던 황제가 된 석경당은 유지원이 자립하고 [[토욕혼]]이 이반한 후에 조덕균, 안중영 등의 [[번진]]들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그들의 반란을 진압못하는 것을 요나라 조정에게 책망을 받게 되자[* 토욕혼은 요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저항하는데 유지원이 그들과 내통한 것을 알게 되어 요나라 측이 유지원을 처벌하라고 항의한 것이다. 문제는 석경당이 다른 번진들의 반란을 진압한다고 유지원의 세력까지 제압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근심하다 승하하고 만다. 황제가 된 뒤 고작 6년 만이었다. 후계자 아들 석중예는 어리다는 명분으로 형의 아들 [[출제]] [[석중귀]]에게 찬탈당하고 이어 석중귀조차 거란에 적대하다 패함으로써 후진은 멸망한다. == 평가 == >대사를 꾀하는 초기에 [[거란|오랑캐]]를 불러 원조를 받아, 이때부터 오랑캐의 기세가 강해졌고, 백성들이 이로 인해 재앙에 빠졌다. [[석중귀|후사]]에게 이르러,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좀처럼 끝나지 않고, 군대를 부려도 지키지 못하였으며, 온 겨레가 사로잡혔다. >---- >[[구오대사]](舊五代史) 중 자기를 믿어준 황제를 무려 두 번이나 배신한 데다 즉위 이후도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기병 양성의 요충지인 장성 이남의 연운 16주를 거란족에게 통째로 넘겨 진시황 이래 북방이민족의 침략을 막는 최전방의 보루인 만리장성 방어선을 무력화시킨 것 때문에 전통적인 한족 중심 사관에서는 항상 평가가 박했다.[*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아예 매국노를 뜻하는 '[[한간]]'(漢奸)으로 규정하며 맹비난한다.] 다른 [[오대십국시대]]의 군주들(특히 개국군주)은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면이 한두 개쯤은 있었다. * 후량 태조 [[주전충]]은 군사적 능력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당태종]]과 [[측천무후]]가 그렇게 찍어눌러도 버티면서 [[위진남북조시대]] → [[수나라]] → [[당나라]] 내내 심각한 적폐가 되었던 [[문벌귀족(중국)|문벌귀족]]을 제거하고 수도를 [[카이펑시|개봉]]으로 천도해 [[송나라]]로 대표되는 중국 [[근세]]로 가는 기틀을 열어주었으며, 약자인 민중을 생각하는 마음도 있기는 했던 사람이었다. * 후당 태조 이극용 또한 [[황소의 난]] 진압에 큰 공을 세웠고 한때는 주전충보다도 더 거대한 세력을 일구었다. 그러나 실수와 악재가 겹쳐 유능한 인재를 연달아 셋[* 이존효, 강군립, 설아단.]이나 죽이고 나중에는 유인공의 배신에 화가 나 공격했다가 대패하는 등 말년에는 실패만 거듭했다. * 후당 장종 이존욱은 주전충을 꺾고 [[야율아보기]][* 이존욱도 아버지의 뒤를 이은 후 후량이 침공하자 이를 막기 위해 거란을 끌어들인 적이 있었는데 석경당과는 달리 본인이 나서서 제대로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야율아보기가 하늘이 내가 여기에 이르지 못하게 하려는 거냐며 한탄했을 정도.]를 물러나게 하는 등 군사적 능력도 출중했다. 그러나 내정에 실패해 자신을 따르던 신하들에게도 버림받고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후당 명종 이사원의 치세는 내치와 외치에서 준수한 성과를 거두어 오대 국가들 중 드물게 안정적인 시기였다. * 후한 고조 [[유지원]]은 거란 군대를 몰아내고 중원을 다시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 후주 태조 [[곽위]]는 치세를 안정시키며 [[세종(후주)]]에게 제위를 물려줄 정도의 안목도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아들이 모두 죽어서 직계에게 물려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자기 처조카의 그릇을 알아보고 망설임 없이 후계자로 삼았다. 시영을 후계자로 삼은 곽위의 유언은 '''"아무런 걱정도 없다."'''였다.] 후주 세종 시영은 천하의 반 정도를 제압해놨고 오대를 제외하면 최강국이던 [[남당]]도 후주에 패배하며 세력이 꺾였다. * 송 태조 [[조광윤]]은 찬탈로 시작했지만 찬탈 과정도 다른 왕조들에 비하면 꽤 온건하게 지나갔으며 무엇보다 '''500년 넘게 지속된''' 찬탈 후 전 왕조 몰살을 중단시켰으며 오히려 전 왕조에 [[단서철권]]을 내려 적극적으로 보호했고 공신들을 숙청하기는 했지만 배주석병권이라고 조용히 병권만 내려놓게 하고 아무도 안 죽이고 적당히 대접해주는 것으로 끝냈다. 그리고 과거제를 실시하고 사대부를 키우기 시작하는 등 내정에서 큰 업적을 거두었고 외정으로는 북한과 오월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제압해 오대십국시대의 종결을 앞당겼다. 이후 단명하지 않고 북송과 남송을 합쳐 300년 넘게 이어지게 되었다. [[요나라]]에 넘긴 연운 16주는 거란이 중원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요충지를 잃은 중원은 내내 거란에 시달리며 [[송나라]] 시기까지도 그중 2개 주만 간신히 되찾는데 그치고 만다. 송나라는 건국 당시부터 요나라라는 강국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였는데 거기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인물. 이러한 한족 문명의 열세는 비단 요나라 시기에 끝난 게 아니라 [[금나라]], [[원나라]]까지 이어졌다. 금나라의 발흥 이후 [[북송]]의 몰락 및 [[칭기즈 칸]], 원나라의 흥기까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중국사 전반을 한족의 입장에서는 나쁜 의미로 바꿔놓은 인물이다. [[https://shanghaicrab.tistory.com/16153549|#]] 연운 16주는 이후 명나라가 몽골을 초원으로 내쫓는 과정에서 되찾게 된다. [[유주(중국)|유주]](계, 탁 등), [[삭주]] 등의 연운16주가 얼핏 보기에는 중원 전체의 입장에서 결정적인 면적의 영토가 아닌 것 같지만, 중요한 것은 넓이가 아니라 그곳의 지형이다. 원래 중국의 한족 왕조들은 험준한 방어 요충지를 성벽으로 이어서 건설하였는데 이게 바로 [[만리장성]]이었고, 이후로 이 만리장성을 의지해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방어해 왔는데 연운 16주는 그 만리장성 바로 이남에 위치한 곳들이다. 즉, '''[[하북]] 평야 지대를 방어하는 노른자로 비유될 정도의 중요한 지정학 요충지, 지형적 방어물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지역은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인 말의 집산지로 이곳을 잃음으로써 유목 민족의 대규모 기병 편제에 보병 중심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대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요, 금, 원 등 유목민족 국가들이 이후로 아무런 저항 없이 중원으로 쳐내려올 수 있었을뿐더러 이 지역에서 나는 물자를 바탕으로 이전까지의 유목 연맹 국가의 한계를 넘어선 중앙집권화까지 가능하게 해준 지역이다. 거기에 더해 [[시황제|진시황]] 이후로 1,000년 넘게 중국 고대사를 관통하며 내려 온 보물 중의 보물인 [[전국옥새]]까지 사라지게 만들었으니 중국인들 입장에선 [[한간|용서할 수 없는 인물]]인 셈이다. ~~물론 남아있었는들 문화대혁명을 견딜 수 있었을지 의문이지만~~[* 만약 계속 현존해 있었다면 문화대혁명 이전에 [[장제스]]부터가 어떻게든 확보하고 [[국부천대]]하면서 가져갔을 것이다. 천자의 상징인 만큼 중국 역사의 여러 나라를 거쳐서 이어져 왔을 물건을 장제스가 관심을 안 뒀을 리가 없을 테고 실제로도 원나라가 만든 '대원전국옥새'라는 모조품 유물을 가져와 고궁박물원에 소장하고 있으니. 허나 이 옥새가 국부천대 이후에 발견되었다면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숨겨서 [[마오쩌둥]] 사후에 비로소 다시 공개되는 경우가 아닌 한 전술한 대로 문화대혁명 때 파괴를 면치 못했겠지만 말이다.] [[원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는 몽골계 중국인들, 조상이 [[청나라]]의 지배민족이었던 현대 [[만주족]]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석경당 본인이 원나라의 [[보르지긴]] 왕조 및 청나라의 아이신기오로 왕조와 달리, 한족을 지배하는 [[사타족|이민족]] 군주로서 [[거란|또 다른 이민족]]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고 더 나아가 [[후당|자신이 속했던 중국 왕조]][[연운 16주|의 영토]]를 [[거란|그 또다른 이민족]]에게 들어바침으로써 [[후진|자신이 세운 왕조]]가 2대 만에 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석경당이 이민족 출신 중국 황제로서 참으로 답이 없는 모습을 보인 탓에, [[하나의 중국]]을 추구하며 중국의 이민족계 정복왕조 창업군주들을 [[중화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하는 [[중국공산당|공산당]]과 [[중국국민당|국민당]]에서조차 석경당만큼은 어떤 식으로든 결코 좋게 평가하지 않고 있다. 진시황의 중국 통일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입장에서, 상술한 것처럼 전국옥새가 사라지는 원인을 제공한 석경당은 도저히 좋게 평가할 수 없는 최악의 창업군주인 셈이다. [[범튀르크주의]]에 입각하여 동아시아의 튀르크계 군주들을 높이 평가하는 [[튀르키예]]에서도 석경당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하다. [[흉노]], [[돌궐]], [[위구르 제국]]의 창업군주들이 튀르키예에서 튀르크 민족의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과 달리 석경당은 튀르키예에서 튀르크 민족의 중국 지배를 빨리 끝나게 만들어버린 암군으로 취급받는다. 만약 석경당이 거란 같은 외세의 힘 없이 스스로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군주로서의 역량도 명군 수준이었다면 튀르키예의 범튀르크주의자들에게 흉노, 돌궐, 위구르 제국 시절 동아시아 튀르크 민족의 영광을 되살린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았을 텐데, 석경당은 그렇게 [[튀르키예인|먼 친척뻘 민족]]에게까지 명성을 떨칠 기회를 본인의 무능함으로 날려먹었다고 볼 수 있다.[* 헌데 사실 어차피 오대십국시대 나라들은 다 단명한지라 이 비판이 100% 유효하지는 않다. 그리고 실제로도 석경당의 후진 이후 세워진 후한의 건국자 유지원 자신은 한나라 황실의 후손이라 자칭했지만 실제로는 [[사타족]] 출신으로 유추된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석경당의 실책은 범튀르크주의자들에게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엄청났지만 말이다.] 거란족의 후손인 [[다우르족]]의 경우 한국인들에게 있어서의 [[삼대오물]]과 비슷하게 석경당을 거란족의 영웅이라고 조롱한다.[* 헌데 일부분은 삼대오물보다 더하다. 삼대오물도 미담 정도는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진지하게 석경당을 존경하는 건 아니다. 외세의 힘을 빌려 승승장구하면서 여러 문제점을 만들어낸 탓에 결국 본인이 세운 왕조가 본인 사후에 오래가지 못하고 망했다는 점에서 [[오삼계]]와 [[자롱 황제]]의 선배격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오삼계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고 군사적 능력도 나쁘지 않았으며, 자롱 황제는 상대가 먼치킨이라는 점이나 자기 근성은 있었고 본인 이후 3대 후에야 굴욕을 당했을뿐더러 그 후에도 베트남이 공화국이 되기 전까지 명목상으로나마 [[응우옌 왕조]]가 계속 이어진 걸 생각해 보면 석경당이 더 심하다.] == 둘러보기(계보) == [include(틀:구오대사)] [include(틀:신오대사)] [[분류:오대십국시대/황제]][[분류:892년 출생]][[분류:942년 사망]][[분류:한간]][[분류:뤼량시 출신 인물]][[분류:튀르크계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