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조선의 인물. == 생애 ==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따르면 선우식은 [[명나라]] [[홍무제|홍무]] 연간(1368~1398)에 중령별장을 지낸 선우경(鮮于京)의 7대손으로, [[평안도]] [[태천군|태천]]에서 거주하다 평양으로 이주했다. 선우식은 평양에서 기자를 모신 [[숭인전]] 인근에 10여년간 거주했다. 늦어도 [[선조(조선)|선조]] 때부터 평안도 사람들은 선우씨를 [[기자(중국)|기자]]의 후손으로 여기고 전묘의 참봉을 지내왔다. 이를 국가적 행사로 키운 것은 [[광해군]] 때였다. 1611년 평안감사 최관은 파발을 보내 기자전에서 천여 년간 끊어진 제전을 이어야 한다고 아뢨고, 좌우 신하들 역시 동의해 선우식은 [[숭의전]]의 예처럼 기자에 제사를 지내는 봉사손으로 낙점됐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선우식은 정6품의 숭인감(崇仁監)으로 임명되고 그 자손들이 참봉을 세습했다. == 가족관계 == 선우식의 후손 숭인감 선우흡(鮮于洽)은 [[정묘호란]] 때 적에 잡혀갔는데 그들에게 항복하고 빌붙었다는 이유로 관직을 잃었다. 평안감사 김기종은 선우흡의 아들 선우백(鮮于栢)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대신들은 '아비를 버리고 자식에게 관직을 줄 수는 없다.'라며 다른 선우씨로 교체하게 했다. 『연려실기술』에서 인용한 『하담파적록』에는 그 이후의 일화가 남아있다. 평안감사 김시양이 선우경(鮮于慶)이라는 사람을 데려오니 조정에서는 그가 적손인지 지손인지를 알아보게 했다. 그런데 김시양은 '멀고 아득한 명족의 후예가 원손인지 지손인지 알 수 없다'며 '성이 [[선우(성씨)|선우]]라서 그 이름에 따른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따르면 이후의 전감들이 선우식의 후손인지는 알 수 없다. [[분류:조선의 관리]][[분류:태원 선우씨]][[분류:태천군 출신 인물]][[분류: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