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북주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B190F 0%, #3B190F 20%, #3B190F 80%, #3B190F); color: #ece5b6" '''북주 제4대 황제[br]{{{+1 고종 선황제 | 高宗 宣皇帝}}}'''}}} || ||<|2> '''출생''' ||[[559년]] || ||[[북주]] [[산시성(섬서성)|무향군]] [[웨이난시|무향현]][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웨이난시]] 다리현) || ||<|2> '''즉위''' ||[[578년]] [[6월 21일]] || ||[[북주]] [[시안시|장안]][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사망''' ||[[580년]] [[6월 22일]] (향년 21세) || ||[[북주]] [[시안시|장안]] 황궁 천덕전[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 '''능묘''' ||[[정릉]](定陵) || ||<|6> '''재위기간''' ||'''{{{#ece5b6 북주 황태자}}}''' || ||[[572년]] [[5월 19일]] ~ [[578년]] [[6월 21일]] || ||'''{{{#ece5b6 제4대 황제}}}''' || ||[[578년]] [[6월 21일]] ~ [[579년]] [[4월 1일]] || ||'''{{{#ece5b6 북주 태상황}}}''' || ||[[579년]] [[4월 1일]] ~ [[580년]] [[6월 22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우문부|우문(宇文)]] || || '''휘''' ||윤(贇) || || '''부모''' ||부황 [[무제(북주)|고조]][br]모후 태제태후 || || '''형제자매''' ||7남 3녀 중 장남 || || '''배우자''' ||천원황후, 천대황후, 천중황후,[br]천좌황후, 천우황후 || || '''자녀''' ||3남 1녀 || || '''자''' ||건백(乾伯) || || '''작호''' ||노국공(魯國公) || || '''묘호''' ||'''[[고종]](高宗)''' || || '''존호''' ||천원황제(天元皇帝) || || '''시호''' ||선황제(宣皇帝) || || '''연호''' ||대성(大成, [[579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북조시대]] [[북주]](北周)의 제4대 [[황제]]이자 북주를 멸망으로 이끈 폭군이다. == 생애 == 무성(武成) 원년(559년)에 [[무제(북주)|무제 우문옹]]과 태후 이씨[* 이아자(李娥姿)]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2년 뒤인 보정(保定) 원년(561년)에 노국공(魯國公)으로 봉해졌다. 우문윤은 건덕(建德) 원년(572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무제 우문옹은 황태자로 책봉된 우문윤에 대해 그가 제위를 능히 감당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폐태자하려 했지만 그의 동생들이 나이가 어리고 그나마 유능한 편이라 관두었다. 또한 태자 우문윤은 술을 좋아하여 무제가 동궁으로 술을 가져가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무제는 사람을 보내 우문윤을 감시하도록 했지만, 우문윤은 자신을 꾸미고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한다. 부황인 무제 우문옹의 우려대로 선제 우문윤은 무제가 잘 다져놓은 나라를 고작 '''9개월 만에''' 잘 말아먹었다. 우문윤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엄청나서 무제가 붕어할 때도 슬퍼하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제에게 맞은 회초리(혹은 지팡이) 자국을 어루만지며 왜 늦게 죽었냐고(...) 고인드립에 패드립을 쳤다. 과연 [[수양제|아버지와는 다르게 사치와 폭정에]] [[호부견자|열을 올렸다.]] 이때 나이가 19살이었다. 선제 우문윤은 북주의 종실이자 자신의 숙부에 해당하는 우문헌(宇文憲)을 시기하여 주살했다. 우문헌은 선대 무제 우문옹의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선제의 시기를 받아 사후 억울하게 '양'(煬)이라는 악시호를 받아버렸다. 우문윤이 재위한 시기의 궁궐 공사는 삼국시대보다 규모가 더 했으며, 조정 신하들의 간언을 싫어하여 좌우의 신하를 보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찰했다. 또한 직언하는 신하에 대해서는 볼기를 치거나 파직을 시켰다. 선제의 사치와 폭정을 보여주는 또다른 일화로 북주의 종실 중에 우문온(宇文溫)이 있었는데, 선제는 그의 아내인 울지씨[* [[울지치번]](尉遲熾繁)]를 탐하여 이후 우문온을 죽이고 울지씨를 데려다 황후로 책봉했다. 선제 우문윤과 우문온의 계보를 살펴보면, 우문윤은 태조 우문태의 손자였으며 우문온은 태조의 큰형인 [[우문호#s-1|소혜공 우문호(宇文顥)]][* [[우문호]] 항목의 첫 번째로, 두 번째 항목(宇文護)의 아버지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한자 독음이 같다.]의 증손이었다. 즉 선제는 7촌 조카의 아내를 빼앗는 패륜을 저지른 셈이었다. 선제는 9개월 10일(...) 동안 폭정과 사치를 부리다가 갑자기 579년 4월에 7살인 어린 아들 정제(靜帝) [[정제(북주)|우문천]](宇文闡)에게 제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태상황]] 격인 천원황제(天元皇帝)로 자칭하며 음란사치하여 황후를 5명이나 두고, 주색잡기에 열중했다. 나랏일은 모두 황후 양씨[* 양려화(楊麗華)]의 아버지인 [[양견]](楊堅)에게 떠넘겼다. 황음무도해서인지 21살 나이인 580년 6월에 붕어했다. 정권을 장악한 양견은 결국 선제가 죽은 이후, 정제에게 [[선양]]을 시켜 북주를 멸망시켰다. 더 오래 살았더라면 황제의 폭정에 불만을 품은 세력에게 [[끔살]]당하거나, 직접 망국의 군주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21세로 요절해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어엿한 [[묘호]]와 [[시호]]까지 받았다. == 가족관계 == === 조상 === * 부: [[무제(북주)|무제]] 우문옹 * 모: 무황후 이씨 === 자녀 === * 황후: 천원황후 양씨 * 딸: 우문영아(宇文娥英) * 황후: 천원제후 주씨 * 장남: 정황제 [[정제(북주)|우문천]] * 황후: 천중황후 진씨 * 황후: 천좌황후 [[울지치번|울지씨]] * 차남: 송헌공 우문진 * 황후: 천우황후 원씨 * 후궁: 왕희 * 2남: 내왕(萊王) 우문연(宇文衍) * 후궁 황보희 * 삼남: 영왕(郢王) 우문술(宇文術) 선제 우문윤은 사치스럽고 음란하여 황후를 무려 5명이나 두었다. 울지치번은 상술하였듯 북주의 종실 일원이었던 우문온으로부터 빼앗아서 얻었다. 우문윤의 세 아들들은 모두 북주가 멸망한 뒤 수문제 양견에 의해 멸족되었다. == 대중매체에서 == 2018년 <독고천하>에 등장한다. 아버지인 무제 우문옹와 달리 총명하지 않다. 생모가 천한 출신이라 컴플렉스가 있었으며, 궁녀인 주만월을 임신시켰다. 즉위하자마자 부황 우문옹의 명령을 어기고 생모를 황태후로 봉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만 가까이 했으며 울지형의 손녀이자 우문온의 아내인 울지치번을 범하여 귀비로 봉하고, 울지형과 손을 잡아 우문헌을 죽였다. 또한 울지형의 지원아래 민가의 여자를 범하고 반대파를 주살했다. 황후이자 보정대신 양견의 딸인 양려화의 기를 누르려고 황후를 4명이나 추가로 책봉했다. 선황의 명령을 어기고 주만월의 아들 우문천을 태자로 책봉했으며 양려화에게 손찌검했다가 등극 8개월만에 아들 우문천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되었다. 2019년 <독고황후>에 등장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주서)] [include(틀:북사)] [[분류:남북조시대/황제]][[분류:559년 출생]][[분류:580년 사망]][[분류:산시성(섬서성) 출신 인물]][[분류:퇴위한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