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薛居正[br]설거정''' || || '''시호''' ||문혜(文惠) || || '''성씨''' ||설(薛) || || '''이름''' ||거정(居正) || || '''자''' ||자평(子平) || || '''생몰''' ||912년 ~ 981년 || || '''출생''' ||후량(後梁) 개봉부(開封府) 준의현(浚儀縣) || || '''부친''' ||[[설인겸]](薛仁謙) || || '''국적''' ||[[후량]](後梁) → [[후당]](後唐) → [[후진]](後晉) [br] →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後漢) → [[후주]](後周) → [[북송]](北宋) || || '''주군''' ||[[태조(송)|송태조]][br][[태종(송)|송태종]]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송]]의 명신이자 역사가로 자는 자평(子平). [[오대십국시대]]의 역사를 다룬 [[구오대사]]를 편찬한 인물이기도 하다. == 생애 == === 초기 생애 === 설거정은 912년 [[오대십국시대]] [[후량]]의 수도인 개봉부(開封府) 준의현(浚儀縣)에서 [[설인겸]](薛仁謙)의 아들로 태어났다. 설거정은 [[후당]] 청태 원년(934년)에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자, 설거정은 견추문(遣愁文)을 지어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자신의 심정을 담았는데, 견추문을 본 사람들은 견추문에 숨은 특별한 뜻을 이해하였고, 기거사인 유도(劉濤)는 설거정에게 재상의 기량이 있다고 여겨서 그를 강력히 추천한다. 설거정은 유도의 추천 덕에 다음 해인 935년에 진사로 급제한다. === 후진 시기 === 후당이 멸망하고 후진이 들어선 뒤, 설거정은 유수응(劉遂凝)의 벽소를 받아 유수응의 종사(從事)가 되었다. 유수응의 형인 유수청(劉遂淸)이 국가의 재정을 관리하면서 설거정을 염철순관(鹽鐵巡官)으로 삼도록 상주하여 설거정은 염철순관이 되었다가, 개운 원년(944년)에는 탁지추관(度支推官)이 되었다. 재상 이숭(李崧)이 염철(鹽鐵)에 대한 사무를 겸임하면서 다시 추관으로 삼도록 주청하였으며, 대리시직(大理寺直)이 더해졌고 우습유(右拾遺)로 승진하였다. 또한 상유한이 개봉부윤(開封府尹)으로 재임할 때 다시 설거정을 판관으로 삼도록 주청하기도 했다. === 후한 시기 === 건우 연간 초, 사홍조(史弘肇)가 시위친군(侍衛親軍)을 거느렸는데, 사홍조의 위세와 권력이 유지원을 뒤흔들 정도였고 사홍조의 성격도 잔인하고 제멋대로였기에 감히 사홍조의 뜻을 거스르려는 이들이 없었다. 이런 가운데 사홍조의 부하 관리가 한 백성이 염금(鹽禁)을 어겼다고 고발하자, 설거정은 사안이 부실하다고 의심하여 사홍조의 부하에게 고발당한 백성을 불러 힐문하였다. 그리고 설거정이 힐문하니 관리와 백성 사이에 개인적인 원한이 있고 관리가 백성을 무고했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설거정은 문제의 관리를 체포하여 국문하고 처벌을 내렸다. 사홍조는 비록 매우 분노하였으나 설거정은 사홍조에게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 북송 시기 === 960년, 조광윤이 후주의 마지막 황제인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고 [[북송]]을 건국하여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북송의 초대 황제인 [[태조(송)|태조]]이다. 북송이 건국된 뒤, 설거정은 호부시랑으로 임명되었다. 태조가 [[이균]]과 [[이중진]]을 정벌할 때, 설거정은 수도에 남아서 정무를 맡았으며, 얼마 안 있어 지허주(知許州)를 맡았다. 설거정은 962년에 입조하여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를 맡았으며, 임시로 공거를 담당한다. 967년, 이부시랑이 더해졌다. 972년, 설거정은 감수국사가 되어 오대사를 편찬하라는 칙령을 받들어 [[구오대사]]를 편찬하였고 1년 만에 완성한다. 973년, 문하시랑, 평장사(平章事)로 임명되었다. 976년 태조가 죽고 [[태종(송)|태종]]이 즉위한 뒤, 설거정은 좌복야와 소문관대학사가 더해졌고, 979년에 태종을 따라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을 정벌한 뒤에는 사공이 되었다. 981년 설거정은 단사(丹砂)를 복용하다가 병에 걸렸고, 정사에 대한 의견을 상주할 때 자신이 병에 걸렸음을 깨닫고 갑자기 조당을 빠져나온다. 조당을 빠져나온 설거정은 물을 마신 뒤에 관리의 부축을 받고 중서성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말을 할 수 없었고 단지 저수기를 가리키며 물을 가져와달라고 부탁한다. 주변의 사람들이 물을 가져왔지만 설거정은 물을 마시지 못하고 쓰러졌으며, 연기를 뱉은 끝에 결국 가마를 타고 자택으로 돌아갔는데, 곧바로 사망하였다. 태종은 설거정의 비보를 듣고 슬퍼하여 3일 동안 폐조하였고 설거정에게 태위, 중서령을 추증하였으며,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내렸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중국의 역사가]][[분류:카이펑시 출신 인물]][[분류:912년 출생]][[분류:981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