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ruby(Серг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се́нин,ruby=Sergei Alexandrovich Yesenin)] || ||<-2> [[파일:세르게이예세닌.jpg|width=50%]] || || 국적 || [[러시아 제국]] > [[소련]] || || 직업 || 시인 || || 생년 || [[1895년]] [[10월 3일]] || || 몰년 || [[1925년]] [[12월 28일]] || [목차] == 개요 ==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시인. == 생애 == [[랴잔]] 출신이며 1910년대 시인으로 등단했고,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계속 활동하던 도중에 소련 정부의 초청으로 방문해 무용을 가르치던 [[이사도라 덩컨]]과 교제한 뒤 1922년에 결혼했다. [[푸가초프]]의 난을 배경으로 다룬 시를 1921년에 쓰기도 했고 주로 자연을 주제로 다룬 시를 썼다. 이 때 예세닌은 25세였고 덩컨은 44세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잘 풀리지 않았는데, 평소에 우울증을 앓던 예세닌은 우울증을 술로 풀려다가 알코올 중독까지 겹쳤고 덩컨도 원래 결혼에는 관심이 없다가 소련에서 예세닌에게 반해서 결혼한 터라 연애할 때도 자주 다퉜다.[* 예세닌과 덩컨은 소련에서 만나기 전까지 저마다 연애 경험이 있었지만 모두 헤어졌고, 덩컨은 감독 고든 크레이그, 재벌가 패리스 싱어 사이에서 낳은 딸 데어도르, 아들 패트릭도 있었으나 소련으로 오기 전에 프랑스 파리 세느 강에서 자동차 추락사고로 잃었다.] 결혼 후에도 상황이 바뀌진 않았고, 덩컨이 [[미국]] 순회 공연을 떠날 때 예세닌도 따라갔으나 거기서도 알코올 중독 문제를 일으켰으며 소련인과 결혼하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의심을 받던 덩컨도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소련에서도 [[스탈린]]이 집권할 무렵이라 당에서도 예세닌을 좋게 보지 않았으며[* 예세닌의 출신 성분은 빈농이라 나쁘지 않았으나, 당에서는 그의 창작 성향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결국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부부는 별거했다. 덩컨은 잠시 소련을 찾은 뒤 쭉 프랑스에서 머물렀고, 예세닌은 소련으로 돌아가서 요양하다가 [[레프 톨스토이]]의 손녀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톨스타야(1900~1955)[* 톨스토이의 9번째 자녀인 안드레이 르보비치(1877–1916)의 딸.]와 재혼했으나 얼마 뒤 [[레닌그라드]]에서 자살했다.[* 덩컨과 정식으로 이혼하진 않았으므로 법적으로 예세닌은 사망 시점까지 덩컨과 부부였다.] == 참고자료 == * <나의 삶 My Life>: 덩컨의 자서전은 소련행 직전까지만 다루지만, 한국판에서 부록으로 예세닌 관련 내용을 포함한 덩컨의 말년도 다룬다. * <불멸의 여인들>: 김후. 청아출판사(2009년) 중에서 덩컨 관련 내용. * <자작나무>: 박형규. 써네스트(2011년). 국내에 번역된 예세닌 서정시 선집 및 포함된 연표. [[분류:러시아의 시인]][[분류:러시아 제국/인물]][[분류:소련/인물]][[분류:1895년 출생]][[분류:1925년 사망]][[분류:랴잔주 출신 인물]][[분류:러시아의 자살한 인물]][[분류:자살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