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감찰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감찰관)] ||||<#800080> {{{#ffffff {{{+3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카투스''' }}}[br]{{{-1 [[라틴어]]: Sextus Aelius Paetus Cat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미상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조부)[br]퀸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아버지)[br][[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형제)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98년 || ||<#800080> {{{#ffffff '''전임''' }}}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199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br][[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 || ||<#800080> {{{#ffffff '''동기''' }}} ||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 ||<#800080> {{{#ffffff '''후임''' }}} ||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br][[퀸투스 미누키우스 루푸스(기원전 197년 집정관)|퀸투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 생애 == 평민 가문인 아일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는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고 아버지는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썼다. 아버지 퀸투스는 사제단의 일원이었으며 기원전 217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사했다. 형제로 기원전 201년 집정관을 역임한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가 있었다. 기원전 200년 수석 [[조영관]]을 맡았고, 기원전 199년 식민도시를 조성하는 임무를 맡은 위원회의 일원이었으며, 기원전 198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플라미니누스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지휘관을 맡는 동안, 그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맡았다. 그 해 연말까지 갈리아인에게 파괴된 플라켄티아와 심각한 위협을 받은 크레모나의 피난민들이 도시로 돌아오도록 했다. 그는 원로원의 명령과는 달리 전임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199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의 2개 군단을 해산하기를 거부하고 2개 군단을 추가해 총 4개 군단을 편성했다. 하지만 정작 별다른 군공을 세우지 못했고,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가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행한 군사적 활동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라고 비평했다. 기원전 194년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그들은 당시 집정관이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정하고 로마에서 열린 검투 경기장에서 원로원 의원을 위한 특별 의석을 할당했으며, 3년 전에 건립된 유피테르 신전을 봉헌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최고의 민법 전문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와 관련해 풍자 시인 퀸투스 엔니우스는 그가 법 조항을 교묘하게 해석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판결이 내려지게 유도했다며 그에게 교활한 자라는 의미인 카투스(catus)라고 지칭했다. 이후 이 별명은 그의 아그노멘이 되었다. 그는 [[12표법]]에 대한 첫번째 주석서를 발간하는 등 법률에 관한 여러 저서를 집필했다고 알려졌지만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