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이집트 파라오)]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DB76B 0%, #DECD87 20%, #DECD87 80%, #BDB76B)" {{{#A0522D '''고대 이집트 제25왕조 제2대 파라오[br]{{{+1 셰비쿠}}}[br]𓆷𓃞𓇿𓂓 | Shebitku'''}}}}}}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셰비쿠 두상.jpg|width=100%]]}}} || ||<-2> '''이름''' ||셰비쿠(Shebitku) || ||<-2> '''출생''' ||미상 || ||<-2> '''사망''' ||기원전 705년 || ||<-2><|2>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 ||기원전 714년 ~ 기원전 705년[br]'''(약 9년)''' || ||<-2> '''전임자''' ||[[피이(쿠시)|피이]]|| ||<-2> '''후임자''' ||[[샤바카]] || ||<-2> '''부모''' ||[[아버지]] : [[피이(쿠시)|피이]] || ||<-2> '''배우자''' ||아르티 || ||<-2> '''무덤''' ||엘-쿠루 18번 피라미드 || [목차] [clearfix] == 개요 == [[쿠시 왕국]] 나파타 시대 4대 왕이자 [[고대 이집트]] 제25대 왕조 2대 [[파라오]]. 전 파라오 [[피이(쿠시)|피이]]가 시작한 이집트 정복을 완수한 인물이다. == 행적 == 기원전 3세기 세라피스 제사장이자 <이집트 역사>의 저자 [[마네토]]에 따르면, [[샤바카]][* 마네토는 사바콘(Sabacôn)이라고 명기했다.]가 이집트 정복을 달성하고 끝까지 저항한 바켄레네프를 불태워 죽인 뒤 8년간 집권했으며, 셰비쿠[* 마네토는 세비초스(Sebichôs)라고 명기했다.]가 뒤를 이어 14년간 통치했다고 한다. 학계는 오랫동한 마네토의 기록에 따라 [[피이(쿠시)|피이]] 사후 샤바카-셰비쿠 순으로 집권했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2016년과 2017년에 쿠시 왕국의 이집트 지배에 관한 고고학적 연구 결과, 실제로는 정반대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제라드 브로크먼은 2017년 논문에서 샤바카의 [[카르나크 신전]] 비문의 상단 가장자리가 셰비쿠의 비문 왼쪽 가장자리 부근에 조각된 점을 볼 때, 셰비쿠가 먼저 집권하여 비문을 세웠고 샤바카가 뒤이어 집권하여 비문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이집트 학자 클라우스 주르만은 2016~2017년에 셰비쿠와 샤바카가 세운 카르나크 비문들을 재조사한 결과, 셰비쿠의 상형 문자 비문이 샤바카의 비문 이전에 조각된 것이 분명하다며 브로크먼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여기에 프레데릭 파라우도(Frederic Payraudeau)는 아비도스 [[아문]] 신전에서 "아문 신의 아내"로서 활동하던 여사제 셰페누페트 1세가 셰비쿠의 통치 기간 동안에 자신의 이름으로 오시리스-헤카제트 예베당의 문벽과 외부에 부조를 새겼고, 그녀와 함께 여사제를 맡았던 아메니르디스 1세는 샤바카의 재위 기간에야 단독 여사제로서 등장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결정적인 증거는 엘 쿠루에 있는 쿠시 왕실 피라미드의 건축적 특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피이와 세비쿠의 피라미드에는 코벨 지붕이 세워진 개방형 매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던 반면, 샤바카, [[타하르카]], [[타누타멘]]의 피라미드와 이후의 모든 왕실 피라미드에서는 완전 터널식 매장실이 설치되었다. 이는 피이와 세비쿠의 시대에 일반적이었던 매장 양식이 샤바카 집권 후 변화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로 볼 때, 셰비쿠가 샤바카보다 먼저 등극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또한 마네토가 서술한 이집트 정복자는 샤바카가 아니라 셰비쿠일 것이다. [[파일:셰비쿠의 기증비.jpg]] 셰비쿠는 피이 왕의 정복 전쟁 이후에도 계속 버티던 바켄레네프 등 하이집트 통치자들을 모조리 제압해 이집트 통일을 달성했다. 그는 이집트 문화를 존중했으며 이집트 신들을 받든 신전들에 상당한 재물을 기부했다. 멤피스에서 발견된 기증비는 그가 [[호루스]]와 [[하토르]]에게 새 항아리 2개를 바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의 뒤에는 파베토스의 호루스 사제이자 나일강 삼각주 동부 지역 통치자인 파트제네프가 서 있다. 셰비쿠는 파라오의 왕관을 착용한데 비해, 파트제네프는 리비아 [[베르베르]] 부족의 양식인 수평 깃털을 착용했다. 1999년 [[이란]]의 탕이바르 유적지에서 사르곤 2세가 기원전 706년에 건립한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에 따르면, 아시도드(Ashdod)의 왕 이마니(Iamani)는 사르곤 2세의 위세를 두려워해 멜루하로 도망한 뒤 그곳에서 "도둑처럼 은밀하게 살다가" 멜루하의 왕 샤파타쿠(Shapataku = 셰비쿠)에게 체포되어 양손을 수갑을 찬 채 사르곤 2세 앞으로 끌려왔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셰비쿠는 기원전 706년 무렵에도 생존했으며, 아시리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주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후에 샤바카가 뒤를 이었으며 무덤은 쿠시 왕국 본토의 나파타 공동 묘지인 엘 쿠루에 피라미드 형식으로 건립된 것은 분명하다. 셰비쿠의 무덤인 엘-쿠루 18번 피라미드에는 인간의 유골이 남아있는데 셰비쿠 본인의 것으로 추정한다. 209~216번 무덤에는 생전에 그가 길렀던 말들이 집단매장되었다. 그는 피이의 딸이자 자신의 누이인 아르티와 결혼했다. 그녀의 이름은 카르낙의 하르마케트 동상 밑에 언급되었으며, 엘 쿠루-6 묘지에 안장되었다. 둘 사이에 자식을 보지는 못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분류:쿠시 왕]][[분류:파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