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800080> {{{#ffffff {{{+3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br]{{{-1 [[라틴어]]: Quintus Fabius Maxim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07년에서 203년 사이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미상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계급)|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아버지) || ||<#800080> {{{#ffffff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213년 || ||<#800080> {{{#ffffff '''전임''' }}}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br][[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800080> {{{#ffffff '''동기''' }}}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기원전 215년 집정관)|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800080> {{{#ffffff '''후임''' }}} ||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br][[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212년 집정관)|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귀족이자 장군. 아버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아들로서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거두었다. == 생애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아들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버지와 함께 [[한니발 바르카]]와 맞섰다. 기원전 217년 [[트리부누스 밀리툼]]에 발탁되어 [[독재관]]이 된 아버지를 보필했다. [[원로원]]이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는 문제를 지연시키자, 파비우스는 아들에게 로마로 가서 가족 영지를 팔아서 몸값을 마련하고, 로마군이 사로잡은 카르타고 포로와 한니발이 사로잡은 로마 포로를 교환하는 걸 원로원에 제안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아서 세간의 비난을 한몸에 받는 아버지가 걱정스러워서, 병사 몇 명을 희생시키더라도 전투를 벌여서 입지를 강화하자고 조언했다. 그러자 파비우스는 정색하면서 아들을 꾸짖었다. >"너도 그 몇 명과 함께 하고 싶으냐?"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 때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참여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카실리눔으로 탈출했다. 기원전 215년 집정관에 오른 아버지 밑에서 최고 [[조영관]]을 맡았으며, 이듬해 법무관으로 취임하여 루케리아의 아풀리아에서 2개 군단을 이끌었다. 기원전 213년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기원전 215년 집정관)|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올랐고, 아풀리아에서 로마 주력군을 이끌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버지가 말을 타고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자 "집정관과 거래할 게 있다면 말에서 내려서 다가와라"라고 [[릭토르]]를 통해 명령했다. 아버지 파비우스는 이를 순종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이 잘하고 있다며 칭찬했다고 한다. 그는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아르피 시를 비오는 밤에 기습 공격해 함락시켰다. 카르타고 수비대 5천 명이 항복했는데, 그중 1,000명의 스페인 병사는 자신들을 잡는 대신 나머지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고대 사료에 따르면, 그는 이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이후 아르피에 주둔한 부대의 지휘관을 맡았지만 몇년 간 국정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아마도 병마에 시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09년 다섯번째로 집정관에 오른 아버지 파비우스는 아들에게 에트루리아에서 시칠리아에 있는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에게 보낼 군대를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기원전 208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휘하 장군으로 활동했으며, 기원전 207년 여름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의 군대가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로마로 귀환하기를 원한다는 서신을 가지고 로마로 찾아갔다. 기원전 207년에서 203년 사이에 [[참척|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버지 파비우스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극도의 자제력으로" 슬픔을 억제했다고 하며, 자신이 직접 장례 연설을 하고 이를 나중에 출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