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양서)] [include(틀:남사)] ||<-2> {{{#fff '''소량의 황족[br]임천정혜왕(臨川靖惠王)[br]{{{+1 蕭宏 | 소굉}}}'''}}} || || '''{{{#fff 시호}}}''' ||정혜(靖惠) || || '''{{{#fff 작호}}}''' ||임천군왕(臨川郡王) || || '''{{{#fff 성}}}''' ||소(蕭) || || '''{{{#fff 이름}}}''' ||굉(宏) || || '''{{{#fff 자}}}''' ||선달(宣達) || || '''{{{#fff 부황}}}''' ||문제(文帝) [[소순지]](蕭順之) || || '''{{{#fff 모후}}}''' ||태비 진씨(陳氏) || || '''{{{#fff 생몰}}}''' ||473년 ~ 526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양(남조)|소량]]의 황족으로, 추존 황제인 [[소순지]]의 6남이며, 초대 황제인 [[무제(양)|무제]] 소연의 이복동생이다. 사실상 양의 황족들 중 능력에 비해 가장 수혜를 받은 인물로 건국에 공이 그렇게 크지 않음에도 조정에서 유일하게 [[삼공|삼공(三公)]] 모두 역임했다. == 생애 == 473년 소순지와 진씨(陳氏) 사이에서 6남으로 태어났다. 신장이 8척으로, 수염과 눈썹이 아름다웠으며 몸가짐이 단정했다. 492년, 소굉은 [[제(남조)|남제]]에서 여릉왕부 법조행참군으로 임명되었고 태자사인으로 직위를 옮긴다. 495년, [[북위]]의 군대가 소굉의 형인 장사왕 소의가 진수한 양주(梁州)를 포위한다. 소굉은 군사 1천 명을 이끌고 양주를 구원하러 갔으나, 소의는 이미 북위의 군대를 격퇴하였다. 소굉은 이후 진안왕부 주부, 계양왕부 공조사를 역임하였다. 소굉의 형인 형양왕 소창이 시안왕 소요광으로부터 예우를 받았는데, 499년 소요광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소창을 핍박하여 남제의 수도인 건강으로 가도록 부추긴다. 당시 소연은 아우들에게 화가 미칠까 걱정하여 소굉은 사리에 밝으니 반드시 황제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며 당시 같이 있었던 남강왕 소위를 안심시켰다. 501년, 소연이 거병하자, 소굉은 신림(新林)에 당도하여 소연의 군대를 맞이하였고 보국장군으로 임명된다. 수도 건강이 평정되자 소굉은 서중랑장, 중호군으로 임명되었고, 석두수군사를 겸임하였다. 502년 소연이 남제의 마지막 황제인 [[화제(남제)|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양나라를 건국하니, 이가 양나라의 초대 황제인 [[무제(양)|양무제]]이다. 소굉은 양나라가 건국되자마자 임천왕으로 책봉되었고,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양남서주제군사, 후장군, 양주(揚州) 자사가 되었다. 504년에는 시중이 되고 중군장군으로 진호되었다. 505년, 무제가 북벌을 결의하면서 소굉은 도독남북연북서청기예사곽8주북토제군사로 임명되었다. 소굉의 군대는 낙구(洛口)에 당도하여 선봉대가 북위의 양성(梁城)에서 승리하고 위나라 장수인 조청(鼂清)을 죽였다. 이후 북벌이 길어지면서 소굉의 군대는 양나라로 되돌아온다. 507년, 소굉은 표기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임명되었고, 예전과 같이 시중이 되었고, 사도로 승진하였으며, 태자태부를 겸임하였다. 509년, 사지절, 도독양남서2주제군사, 사공, 양주 자사로 임명되었다가, 표기대장군으로 좌천되고 개부의동삼사와 시중을 그대로 받았다. 516년, 소굉의 생모인 태비 진씨가 죽자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중서감으로 복귀하였고 표기대장군, 사지절, 도독 등의 직위를 예전과 같이 받았다. 518년에는 중군장군으로 좌천되었다가, 520년에는 사지절, 도독양남서주제군사, 태위, 양주 자사로 옮겼고, 521년에는 기부상서를 겸임하였다. 소굉은 526년에 사망하여 정혜(靖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 전쟁을 무서워한 사령관 === >[[소굉|소낭(蕭娘)]]과 여모(呂姥)를 두려워하지 않지만 다만 합비(合肥)에 [[위예|위호(韋虎)]]가 있음을 두려워하네 >---- > '''『[[자치통감|자치통감(資治通鑑)]]』''' 소굉은 소연의 동생으로써 날카로운 무기와 기구를 가져 군대의 진용이 성대하여 북위의 군사들은 그것을 보고 수백년간 그런 군대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에 비해 소굉은 나약하고 겁이 많아 낙구(洛口)에 머무르던 중 선봉군이 양성(梁城)을 격파하자 부장들이 기세를 타서 들어가자 제안했지만 소굉은 두려움에 행동하지 못했다. 북위 조정에서 원영에게 형만과 함께 소굉을 공격하라 명을 내리자 소굉은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몰라하며 부장들에게 의견을 물으며 어떻게 할지를 논의했다. 그러던 중 부장 여승진(呂僧珍)이 퇴각을 간언하자 소굉은 맞장구를 치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이를 듣던 부장들은 난리가 나서 유담(柳惔)은 “우리 큰 무리가 다가가면서부터 어느 성(城)이 항복하지 않았다고 어찌 곤란하다고 여기십니까!”라 말했고 배수(裴邃)는 “이번에 출행을 한 것은 본디 적을 찾는 것인데, 어찌 그들을 어렵다고 피합니까!”라 말했으며 마선번(馬仙琕)은 “왕께서는 어찌 나라를 망치는 말을 하십니까! 천자께서는 경내를 쓸어버릴 것을 왕께 위촉하였으니, 한 자를 앞으로 나가다가 죽는 일은 있을지언정 도리어 한 치를 물러나 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 했고 창의지(昌義之)[* 나중에 양나라 희대의 대첩 [[종리 전투|종리(鍾離)]]에서 활약하는 인물로 [[위예]]와 함께 양나라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인물이다.]는 소굉의 말에 노하여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빳빳해지며 말했다. “여승진(呂僧珍)은 머리를 벨만 합니다! 어찌 백만의 군사를 가지고 나가서 아직 적을 만나지도 아니하고, 멀리서 풍문만을 보고 급히 돌아가려 하니, 무슨 면목으로 성스런 주군을 뵐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주승용(朱僧勇)과 호신생(胡辛生)은 소굉의 앞에서 칼을 뽑으며 “물러나고 싶으면 스스로 물러나시오. 하관(下官)은 앞을 향하다가 죽음을 받겠습니다.”라 말했다. 즉 자리에 있던 이들 중 소굉과 여승진을 제외한 모두가 진군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수많은 부장들의 질타를 받은 여승진은 사과를 하며 “전하께서는 어제부터 바람 병이 발동하여서 마음이 군대에 있지 않아 크게 기가 꺾일까 아주 두려우니, 그러므로 군사를 보전하려고 돌렸을 따름입니다.”라 했는데 이는 소굉이 얼마나 전쟁을 두려워하고 겁이 많은 것을 알 수있는 기록이다. 이에 북위의 군사와 백성들은 소굉과 여승진에게 부녀자들이 착용하는 두건과 머리장식을 보내고 노래를 지어서 불렀는데 이것이 바로 상단에 위치해 있는 노래이다. 이에 여승진은 탄식하며 “시흥(始興)과 오평(吳平)으로 하여금 거느려 돕도록 하였다면 어찌 적에게 이처럼 모욕을 당하겠는가!”이라 말했다. 때문에 여승진은 배수를 파견해 모욕을 씻으려 하였으나 소굉은 고집을 부리며 “사람과 말 가운데 앞으로 가는 것은 머리를 베라!”라 군중에 명을 내렸다. 위의 [[양대안]]은 원영에게 “양인(梁人)들은 양성(梁城)을 이긴 이후로 오랫동안 군대를 전진시키지 않으니 그 형세를 볼 수 있는데, 반드시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왕께서 만약 나아가 낙수(洛水)를 점거하면 저들은 스스로 도망하여 패할 것입니다.”라며 공격을 추진했는데 원영은 “[[소굉|소임천(蕭臨川)]]이 비록 어리석으나 그 아래에는 훌륭한 장수인 위예와 배수의 무리가 있으니 아직 가벼이 할 수 없다. 의당 형세를 관찰하고 교전하지 마라.” 즉 소굉은 훌륭한 부하들을 이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소굉은 이것에 멈추지 않고 폭풍우가 치자 몇명의 기병과 함께 군영을 이탈하여 도망쳤으며 장수와 병사가 소굉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자 모두 흩어져서 돌아왔는데, 갑옷을 버리고 창을 던져서 물과 육지를 가득 채웠으며, 병자와 피로한 노인을 버려서 죽은 사람이 5만에 가까웠다. === 사치를 일삼던 황족 === > 나의 재주는 너보다 백 배 많지만 이 일을 맡고서는 오히려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너는 무엇 하려는 사람인가? 나는 한(漢) 문제(文帝)처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네가 어리석다고 생각할 뿐이다. >---- > '''『[[자치통감|자치통감(資治通鑑)]]』''' 어느날 소굉의 첩의 동생 오법수(吳法壽)가 사람을 죽이고 소굉의 집에 숨었는데 소굉은 그를 꾸짖지 않고 숨겨주었다. 이를 눈치챈 소연은 소굉에게 오법수를 집에서 내놓게 하였고 후에 엎어서 죽였다. 남사(南司)에서 소굉의 관직을 면직시키라고 상주하니, 소연이 주석을 달아서 말하였다. “소굉을 아끼는 것은 형제로서 사사롭게 친한 것이고, 소굉을 면직시키자는 것은 제왕 된 사람이 법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상주한 것이 옳다.” 후에 소굉은 면직되었고 그 후에도 계속 문제를 일으켰지만 소연은 그때마다 소굉을 꾸짖기만 하고 사면해주었다. 소굉은 사치스럽고 참람(僭濫)하기가 지나치고 재물을 모으면서 만족할 줄 몰랐다. 창고는 거의 100칸에 이르렀는데 내당의 뒤에 있었으며 문과 자물쇠가 아주 엄하여 어떤 사람이 갑옷과 무기가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비밀리에 보고하였다. 소연이 우애(友愛)에 있어서는 아주 두터워서 특별히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다른 날 음식을 잘 차려서 소굉의 애첩인 강씨(江氏)에게 주며 말하였다. “마땅히 너에게 가서 즐겁게 연회를 열 것이다.” 다만 옛날 친구인 사성(射聲)교위 구타경(丘佗卿)을 데리고 가서 소굉과 강씨와 더불어 많이 마시고 반쯤 술에 취한 다음에 말하였다. “내가 지금 걸어서 네 후원에 있는 방에 좀 가 보아야겠다.” 즉시 수레를 불러서 당(堂)의 뒤로 질러가게 하니 소굉은 소연이 그의 뇌물로 받은 재물을 볼까 두려워서 안색이 공포에 질려 두려워하였다. 소연은 속으로 이를 더욱 의심하고 이에 방마다 다 검사하니 전(錢) 백만을 한 무더기씩 쌓아놓고 황색 표지로 이를 표시해 두었으며, 1천만 전을 한 개의 창고로 하여 자색으로 표시해 두었는데, 이와 같은 것이 30여 칸이나 되었다. 소연이 구타경과 더불어 손가락을 굽혀서 헤아려 보니 보인 전(錢)이 3억여 만이었고, 나머지 집에는 포와 견(絹), 사(絲), 면(棉), 칠(漆), 밀(蜜), 저(紵), 랍(蠟) 등 잡화를 쌓아 두었는데, 다만 창고에 가득한 것만 보았지 얼마인지는 몰랐다. 소연은 비로소 무기가 아닌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아육(阿六)아 너의 생계(生計)가 대단하구나.” 마침내 다시 대단히 많이 마시다가 밤이 되었고, 촛불을 들고서 돌아왔다. 형제는 바야흐로 돈독하고 화목하게 되었다. 소굉은 도하에 수십 개의 저택을 가지고 있었는데, 돈을 걸어놓고 문서를 담보하였고, 매번 전지와 저택, 점포를 계약문에 올려놓았으며, 기한이 되어서는 담보를 붙인 주인을 몰아서 그의 집을 빼앗으니, 도하와 동부에 사는 백성들은 직업을 잃은 사람이 하나가 아니었다. 훗날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사마광(司馬光)]]은 이렇게 평했다. > 소굉은 장군이 되어 3군(軍)을 뒤엎어 버렸고, 신하가 되어서는 대역죄에 관련되었는데, 고조로서는 죽일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 옳았습니다. 몇 십일 사이에 다시 삼공으로 삼으니 형제간의 은혜는 실로 두텁지만 제왕(帝王) 된 사람의 법도는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 사서의 초점 == [[양서(역사책)|양서]]와 [[남사]], [[자치통감]]에서 소굉에 대해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가가 다른데, 양서에서는 소굉에 대해 그의 관용적인 성격과 효성스러운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남사와 자치통감에서는 소굉의 전쟁을 두려워하는 면모와 사치를 일삼는 면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굉은 성품이 관화하고 돈후하였으며 주에 20여 년 동안 있으면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덕망 있는 인물이라고 칭하였다. >---- >『양서(粱書)』 == 가족관계 == 7명의 아들로 소정인(蕭正仁), 소정의(蕭正義), [[소정덕]], 소정칙(蕭正則), 소정립(蕭正立), [[소정표]], 소정신(蕭正信)이 있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소순지의 아들들)] [[분류:양(남조)/황족]][[분류:473년 출생]][[분류:526년 사망]][[분류:난릉 소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