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당나라의 상서우복야)] ||<-2> '''{{{#fff 당나라의 재상[br]{{{+1 蕭嵩 | 소숭}}}}}}''' || || '''{{{#fff 작호}}}''' ||<(> 난릉현자(蘭陵縣子) → 서국공(徐國公) || || '''{{{#fff 성}}}''' ||<(> 소(蕭) || || '''{{{#fff 이름}}}''' ||<(> 숭(嵩) || || '''{{{#fff 부친}}}''' ||<(> 소관(蕭灌) || || '''{{{#fff 출생}}}''' ||<(> ? ~ 749년 || || '''{{{#fff 국적}}}''' ||<(> 당(唐) || ||<|2> '''{{{#fff 재임}}}''' ||<(> '''{{{#ece5b6 당의 상서우승상}}}''' || ||<(> 733년 ~ 736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재상. 장수규를 등용함으로써 하서와 농우 일대를 안정시키고, 토번 왕국의 [[실뤄라]]를 이간계로 제거한 것으로 유명하다. == 생애 == 수염이 아름다웠고 몸가짐이 아름다웠고 훌륭했다. 처음에 회계(會稽) 사람인 하회(賀晦)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서 오군의 [[육상선]]과 동서가 되었는데, 당시 [[육상선]]은 낙양현위(洛陽縣尉)를 맡고 있었고 재상 [[육원방]]의 아들이었다. 그는 아직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나, 선주(宣州) 사람 하영(夏榮)은 육상선의 관상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육랑은 10년 내로 재상의 지위에 오를 것이지만, 소랑 한 가문의 귀함과 관직의 높음과 장수함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다. 705년 명주(洺州) 참군으로 기용되었고 자사 [[환언범]]의 기중을 받다가 하북 출척사(黜陟使) 강사도(姜師度)에 의해 판관으로 임명되었다. 710년에는 예천현위(醴泉縣尉)로 전임되었다가 중서시랑 육상선이 소숭을 감찰어사로 천거했고, 이듬해인 711년에 육상선이 먼저 재상 직위에 오르자 소숭을 전중시어사로 추천했다. 713년에 중서사인으로 승진하고 최림, 왕구, 제완과 동렬로 올랐으며, 비록 앞선 셋에 비해서 소숭은 학식이 천박했지만 자미령 [[요숭]]이 소숭을 칭찬했으며, 이후 소숭은 송주(宋州) 자사와 상서좌승(尙書左丞)을 역임하고 병부 시랑에 오른다. 727년 왕군착이 매년 토번을 공격하자, 이에 토번의 [[실뤄라|실낙라공록]]과 [[촉룡망포지]]가 과주를 함락시키고 자사 전원헌(田元獻)과 왕군착의 부친인 왕수(王壽)를 생포하여 성의 치중을 빼앗았으며, [[회흘]]도 하서 절도사 [[왕군착]]을 살해하여 하서와 농우가 진동하였다. 이에 현종은 소숭을 병부상서, 하서절도사, 판양주사(判凉州事)로 삼고 난릉현자(蘭陵縣子)에 봉하였다. 소숭은 배관(裴寬), 곽허기(郭虛己), 우선객(牛仙客)을 막부로 불러들이고, [[장수규]]를 과주 자사로 임명하여[* 장수규는 나중에 거란 전선으로 파견되어, 대당 강경파였던 [[가돌우]]를 주살하는 등 거란 전선에서 공을 세운다.] 하서, 농우 지역을 안정시켰으며, 반간계를 써서 결국 실낙라공록이 첸뽀[* 이때 첸뽀는 [[치데축찬]]이었다.]에게 주살당하면서[* 자치통감에는 주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토번 측 기록은 단순 낙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야사에는 암살당했다고 나온다.] 토번은 당에 대해 수세로 일관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728년 가을, 실말랑이 과주를 침공했지만 장수규에게 패한 데 이어 농우 절도사이자 선주(鄯州) 도독인 장지량(張誌亮)에게 격파당하였다. 8월, 소숭은 또 부장인 두빈객(杜賓客)을 파견하여 기련성(祁連城) 아래에서 토번군과 교전하여 적군을 대파하였다. 승전보가 전해지자 현종에 의해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임명된다. [[장열]]이 중서령에서 파직되고 4년 만인 729년, 중서령이 더해지고 하서 절도사를 겸했으며, 다시 금자광록대부, 집현전학사, 지원사가 더해졌고 수국사(修國史)를 겸하였으며, 서국공(徐國公)으로 진봉되었다. 당시 소숭의 아들인 소형(蕭衡)은 신창공주(新昌公主)에게 장가를 들어 부마도위가 되었고, 그의 부인은 현종으로부터 사돈모로 불릴 정도로 은총이 지극했다. 733년 시중 [[배광정]]이 병사하자 소숭은 [[한휴]]를 재상으로 추대하였다. 소숭은 한휴의 온화하고 차분하고 절제하는 성격을 마음에 들어하여 한휴를 천거했지만, 한휴는 재상에 오른 후 강직하고 아첨하지 않는 성품을 드러내며 소숭과 의견이 맞지 않았고 현종의 앞에서 소숭을 비난하기도 하여 한휴와 소숭은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현종은 두 사람을 함께 파직시키고 소숭을 상서우승상으로, 한휴는 공부상서로 전임시켰다. 736년, 태자태사로 임명되었다. 739년, 유주 절도사 [[장수규]][* 이 사람의 수하 중 하나가 후일 [[안사의 난|대란]]을 일으키는 [[안록산]]이다.]가 환관 우선동에게 뇌물을 준 죄[* 장수규의 부장 중 한 명이 거란 전선에서 패했음에도 이를 허위 보고하였다.]로 기소되었다. 소숭을 꺼리던 [[이임보]]는 그 틈을 타 소숭이 성 남쪽의 장원을 우선동에게 뇌물을 준 사실을 폭로했다. 이로 인해 소숭은 청주자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태자태사로 복권되었지만 다시 벼슬에서 물러났다. 소숭은 벼슬을 그만둔 후 집에서 여생을 즐기며 화초를 심고 유유자적하며, 집안이 부유하고 자손이 귀해 선비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749년 80여 세에 병사하여 개부의동삼사로 추증되었다. == 가계 == 소숭은 난릉 소씨 출신으로 [[양(남조)|양나라]]의 초대 황제인 [[무제(양)|무제]]의 후손이며, [[소통]]-[[소찰]]-[[양명제|소규]]-소순(蕭珣)-소균(蕭鈞)-소관(蕭灌)-소숭으로 계보가 이어진다. == 기타 == 성당 시기 명장이었던 [[왕충사]]가 소숭의 밑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 참고자료 == * 『[[구당서]]』 * 『[[신당서]]』 * 『[[자치통감]]』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749년 사망]][[분류:난릉 소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