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후궁]][[분류:1525년 사망]] [include(틀:조선의 후궁(환조 ~ 연산군))]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조선 세조의 후궁[br]{{{+1 소용 박씨 | 昭容 朴氏}}}'''}}} || || '''출생''' ||미상 || || '''사망''' ||[[1465년]] [[10월 3일]]^^([[음력]] [[9월 5일]])^^ || || '''휘''' ||덕중(德中) || || '''부모''' ||미상 || || '''배우자''' ||[[세조(조선)|세조]] || || '''자녀''' ||'''슬하 1남''' 장남 - 아지(阿只, {{{-3 1459 ~ 1463}}}) 요절 || [목차] [clearfix] == 개요 == [[소용 박씨]](昭容 朴氏, ? ~ 1465년 음력 9월 5일)는 조선 세조의 후궁이다. 이름은 덕중(德中)이다. 정3품 소용으로 봉해졌다가 후에 죄를 짓고 내인으로 강등되었으며, 추문으로 인하여 교수형에 처해졌다.[* 세조실록 37권, 세조 11년 9월 5일 기유 2번째 기사] == 생애 == 원래 [[세조(조선)|세조]]가 즉위 전 잠저에 있을 때 첩으로 맞이하였다. 이후 계유정난으로 [[세조(조선)|세조]]가 즉위하자 후궁이 되어 정3품 소용에 봉해졌다. 1459년(세조 5년) 왕자 아지(阿只)를 낳았으나, 아지는 1463년(세조 9년) 음력 11월 24일 밤 4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세조실록 31권, 세조 9년 11월 24일 무인 1번째기사] 이후 [[세조(조선)|세조]]는 [[소용 박씨|박씨]]를 찾는 일이 뜸해졌고 [[소용 박씨|박씨]]도 외로움이 더해졌다. 그러다 [[소용 박씨|박씨]]는 환관 송중이라는 자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송중이 이를 [[세조(조선)|세조]]에게 고하자 [[소용 박씨|박씨]]는 죄를 받고, 신분도 궁중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내인으로 강등되었다.[*1][* 《문화원형백과 - e조선궁중여성》〈덕중〉항목] 내인으로 강등된 [[소용 박씨|덕중]]은 환관 최호와 김중호를 이용하여 [[세조(조선)|세조]]의 조카 [[귀성군]]에게 언문 연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 연서를 받은 [[귀성군]]과 그 아버지 [[임영대군]]은 이 사실을 곧바로 [[세조(조선)|세조]]에게 고하였다. 당시 [[세조(조선)|세조]]는 최호와 김중호에게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아녀자의 일을 논할 필요는 없으나, 조금의 지식이 있는 환자들이 궁녀의 말을 바깥 사람에게 전하였다."라는 이유로 신문을 하였고, 결국 두 환관은 문 밖에서 맞아 죽었다. 한편 [[세조(조선)|세조]]는 오랫동안 봐왔다는 이유로 [[소용 박씨|덕중]]을 살려주고자 했으나, 여러 대신들이 죽여야 한다고 청하여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또 [[귀성군]]에게는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세조실록 37권, 세조 11년 9월 4일 무신 1번째 기사] 결국 [[소용 박씨|덕중]]은 논의 다음날인 1465년(세조 11년) 음력 9월 5일 교형에 처해졌다. 이때 의정부와 육조에서는 [[귀성군]]과 [[소용 박씨|덕중]]에 대해 국문을 통해 죄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세조(조선)|세조]]는 이미 [[소용 박씨|덕중]]은 교형에 처했고, [[귀성군]]은 의심스러운 점이 단언코 없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세조(조선)|세조]]는 수 일 내에 다섯 명이나 극형을 당하자 신하와 백성들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사면령을 내리고, 융복을 입고 예를 행하였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