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 孫旂 (? ~ 301) [목차] == 개요 ==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백기(伯旗)로 청주 낙안군 광요현 출신. == 생애 == 아버지 손력(孫歷)은 [[위(삼국시대)|위나라]]에서 유주자사, 우장군을 지냈다. 손기는 맑고 침착한 성격을 타고나 젊은 나이에 바르게 수양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후 효렴으로 천거되어 황문시랑에 올랐고 지방으로 나가 형주자사가 되니, 그 명성과 지위는 해계 형제와 맞먹을 정도였다. 영희(永熙) 연간에는 중앙으로 돌아와 태자첨사를 맡았다가 위위로 옮겨졌으나, 수많은 보물들을 보관해두었던 황궁 창고에 원인불명의 큰 화재가 나는 바람에 [[공자]]가 신었던 신발, [[한고제]]가 붉은 뱀을 벨 때 사용한 검 등 진귀한 보물들이 소실되었다. 결국 손기는 책임을 떠안고 면직당했다. 그리고 1년 남짓 지나서 다시 관직에 나가 연주자사로 취임했고, 평남장군, 가절로 옮겼다. 손기의 아들 손필(孫弼)과 조카 손모(孫髦), 손보(孫輔), 손염(孫琰)[* 손기의 동생 손윤(孫尹)의 아들들. 손윤은 자가 문기(文旗)로 진류, 양평태수를 역임했으나 요절하였다.] 네 사람 모두 우수한 관리로 당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지만, 이들은 간신배인 [[손수(서진)|손수]]와 영합하여, 밤에 손수를 따라 신무문을 열고 조왕 [[사마륜]]을 맞았다. 이후 사마륜이 정권을 잡자 손필과 그 사촌들은 고위 관직을 연달아 누렸다. 손필은 중견장군에 임명받고 상서좌승을 겸하다가, 얼마 안가 상장군으로 승진하고 사성교위를 겸했다. 또, 손모는 무위장군(武衛將軍)에 태자첨사를 겸했고, 그 동생 손염도 무위장군(武威將軍)에 태자좌솔을 겸하였다. 사마륜이 황제를 칭하고 이들에게 군후의 작위가 주어지니,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던 손기 또한 거기장군에 개부를 더해 직위가 매우 높아졌다. 애시당초 사마륜을 지지하지 않았던 손기는 어린 아들 손회(孫回)를 보내, 손필 등에게 정통되지 못한 조정의 벼슬을 함부로 받은 것을 꾸짖고 지나치면 반드시 화를 부른다며 경고했다. 하지만 손필과 조카들이 손기의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으니, 이들을 막을 방도가 없었던 손기는 그저 집에서 통곡할 뿐이었다. 얼마 후, 제왕 [[사마경]]이 사마륜을 토벌함에 따라 손필 등 네 명의 일당은 모두 주살되었다. 양양태수 종대(宗岱)는 사마경의 명을 받들어 손기를 참수하고 삼족을 멸했다. [[분류:서진의 인물]][[분류:301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