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 적개공신)] ---- ||<-2>
'''{{{+1 손소}}}[br]孫昭'''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손소 적개공신도상 후모본.jpg|width=100%]]}}} || || '''이름''' ||손소(孫昭) || || '''자''' ||일장(日章) || || '''호''' ||송재(松齋) || || '''본관''' ||[[경주 손씨]](慶州 孫氏) || || '''생몰년''' ||[[1433년]]([[세종(조선)|세종]] 15) ~ [[1484년]]([[성종(조선)|성종]]15) || ||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width=28]] [[조선]] || [목차] [clearfix] == 상세 ==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시|경주]], 자는 일장, 호는 송재로 손현검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손등, 아버지는 증 병조참판을 지낸 손사성이며 어머니는 권명리의 딸 권씨다. [[세조(조선)|세조]] 때,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서 승문원정자에 올랐다. 1459년(세조 5년)에 승정원주서로 있을 때, 문예시에 장원하여 한 자급 특진했다. 그러나 1464년 정월,<의방유취>의 교정을 잘못 보아 파직되었는데 7월, 집현전을 폐지하고 예문관이 대신하도록 했을 때, 겸예문관이 되었고 병조좌랑을 거쳐 종묘서령이 되었다. 1467년 5월,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에 책훈, 계천군에 봉해져 공조참의에 올랐다. 1469년, [[예종(조선)|예종]]이 즉위하자 [[성주군|성주]]목사를 지냈는데 기근이 심하게 돌자 극진한 마음으로 구휼하여 희생자가 없었다. 손소는 문헌상으로 처음으로 집성촌 [[양동마을]]에 입향한 인물로 기록되어있다. 이미 [[양동마을]]에 살고 있었던 [[여강 이씨]] 이광호의 둘째아들 이상도의 딸에게 풍덕 류씨[* 현재 절손되었다고 전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그러나 풍덕은 [[개풍군|개풍]]의 옛이름으로 정주 류씨의 옛이름일 가능성도 있다.] 류복하가 장가를 들어 [[양동마을]]로 오게 되었는데, 이 류복하의 외동딸에게 손소가 장가를 들어 재산을 상속 받으면서 이곳으로 오게 된 것. [[양동마을]]로 온 이후 손소는 지금의 월성 손씨 종가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에는 공조참의, [[안동]]부사를 역임하고 계림군에 봉해졌고 [[진주시|진주]]목사를 지내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종(조선)|성종]]의 특명으로 녹봉을 지급받았고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친자식같이 여겨서 명망을 얻었다. 그래서 성주목사 시절에는 성주 사람들의 호소로 임기를 연장하고 목민관의 모범이 되었다. 또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성주, 진주, 안동 등지에서 외관직을 지낸 것은 노부를 봉양하기 위해 스스로 자원하여 왕의 특지로 임명된 벼슬이었고 글씨를 잘 썼으며 시호는 양민이다. 손소는 5남 3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인 우재 손중돈 역시 학문이 뛰어났으며, 정2품 의정부 우참찬까지 오른 비범한 인물이었다. 걸출한 선비를 배출해 내면서 손씨 집안은 [[여강 이씨]] 문중과 함께 양동마을 집성촌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손소,version=48)] [[분류:조선의 문관]][[분류:경주 손씨]][[분류:1433년 출생]][[분류:1484년 사망]][[분류:조선 적개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