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송복신3.png|width=100%]]}}} || ||<-2> '''1930년 학위 취득 당시[* 중외일보 1930년 2월 7일]''' || ||<-2> '''{{{+1 송복신}}}[br]宋福信''' || ||<|2> '''성명''' ||송복신(宋福信) || ||Grace Poksyn Song Line || ||<|2> '''출생''' ||[[1900년]] || ||[[평양]] || ||<|2> '''사망''' ||[[1994년]] '''(향년 94세)''' || ||[[미국]] || || '''학력''' ||[[숭의여자고등학교|평양숭의여학교]][br]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br][[미시간 대학교]] {{{-2 (공중보건학 석사·박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송복신.jpg|width=100%]]}}}|| ||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송복신 박사. 1956년 부부가 숭의여중고에 방문했을 당시^^[[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yung21&logNo=220591185467|출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송복신2.png|width=100%]]}}}|| || '''왼쪽에서 두번째가 송복신 박사. 맨 오른쪽은 남편. 1956년^^[[https://palmspringshs.pastperfectonline.com/photo/3533AD5A-730E-4414-99B8-698712899090|출처]]^^'''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 조선 및 미국에서 활동한 의사 및 공중보건학자. '''한국인(조선인) 최초의 여성 [[박사]]이기도 하다.''' 흔히 [[김활란]]이 한국 여성 최초의 박사라고 잘못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의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1120200209202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1-12-02&officeId=00020&pageNo=2&printNo=3930&publishType=00020|오보]] 때문이기도 하고, 또 김활란은 귀국하여 활발히 사회활동을 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인 반면 송복신은 미국에서 결혼하고 정착한 탓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 상세 == [[평양]]의 포목상인 송상점(宋相漸)의 1남 4녀의 둘째로 [[평양]]에서 자랐다. [[숭의여자고등학교|평양숭의여학교]]를 거쳐, 1922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현 [[http://www.twmu.ac.jp|도쿄여자의과대학]])를 졸업한 후 미국 [[미시간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13년 숭의여학교 교사 황애덕, 김경희, 박정석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헌신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송죽회[* 송죽형제회, 송죽결사대라고도 함]를 결성하였는데 처음 3명의 교사가 선정한 10명의 제자 중 한명이 송복신이다. 유학 생활 중에도 광복대업에서 언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설명하며 삼일신보(三一申報)의 창간목적과 의의 및 사업내용을 기술한 삼일신보 창간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일제에 의해 불온조선인으로 분류되었다. 동경여의전 재학 중에는 재동경조선여자친목회 회원인 동경여의전 학생 [[현덕신]], 정자영, 유영준과 황에스더, [[나혜석]] 등과 함께 [[2.8 독립 선언]] 운동의 확산을 위해 민족자결운동에 관한 비밀문서를 갖지고 국내에 잠입하였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고 성악 기량이 뛰어나 전 이왕직 양악대, 경성악대 등 1백20명의 악사의 반주에 맞춰 독창회를 하기도 하고, 숭의음악급 강연회에서 독창,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동경 여자유학생친목회의 졸업생 축하회에서 허영숙, [[나혜석]] 등의 졸업생 답사에 이어 가창하는 등 평양은 물론 많은 음악애호가들 사이에도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1924년 미국 유학생들이 북미조선학생유학회를 결성하였는데 여기서 회계부장(재무부장)을 담당하였다. 1928년 미국 유학생들이 발간한 우라키에 '아동 영양부족과 그 원인'이라는 논문을 게재하였다. >'''조선 최초의 여 위생학 박사''' >'''여자 박사는 조선서 처음이다''' >'''금의환향한 송복신씨''' > >【평양】'엠에이'(MA)를 최고 학위로 한 조선 여자계에도 우리의 기대한 여박사의 출세를 보게 되었다. 평양부 차관리 송상점씨의 장녀 송복신(27)양이 조선에 처음인 여자 박사 학위를 받아 가지고 지난 1일 금의환향하였는데 양은 1923년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의학전문학교를 마친 후 미국 미시간주로 건너가 동주 주립대학을 졸업한 후 작년 6월에 '인종별의 성장차이'라는 논문을 제출한 결과 통과되어 위생학 박사의 학위를 받고 고향에 돌아왔는바 양의 포부는 금춘에 다시 미국 미시간주로 건너가 동주청 공중위생국에서 한 3년동안 근무하다가 돌아오리라 한다 >--------- >[[동아일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0020600209207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0-02-06&officeId=00020&pageNo=7&printNo=3404&publishType=00020|1930년 2월 6일 7면]] >'''여의박 송복신양''' >'''6년간 미국 유학 마치고 금의환향으로 귀국하여''' > >평양 출생 송복신(27)양은 일찍이 평양 숭현, 숭의의 두 학교를 졸업한 후 동경에 건너가 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23년 여름에 미주로 건너가 북미 미시간대학 의과 공중위생과 연구소에서 6년간 연구를 하여 1928년 동대학을 졸업하여 석사 학위를 받았고 다시 논문을 동대학 박사원에 제출하였던 것이 통과되어 박사 학위를 얻은 후 다시 연구 계속하다가 2일 오후에 고향인 평양에 도착되었는데 2,3개월을 두류하다가 다시 미주에 향하여 연구를 2년간 더 할 예정이라더라 >----- >중외일보 1930년 2월 7일^^[[http://viewer.nl.go.kr:8080/main.wviewer?cno=CNTS-00093477401|출처]]^^ 1929년 미국 [[미시간 대학교]]에서 '인종별 성장 차이'라는 논문으로 공중보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박사'''가 되었다.[[https://books.google.co.kr/books?id=YVo_AAAAMAAJ&hl=ko&source=gbs_navlinks_s|학위논문]][[https://books.google.co.kr/books?id=htbhAAAAMAAJ&pg=RA2-PA149&dq=grace+poksyn+song+line&hl=en&sa=X&ved=0ahUKEwjN9f3ShrjmAhXB-GEKHRE1AqIQ6AEIMTAB#v=onepage&q=grace%20poksyn%20song%20line&f=false|학적부]] 미시간 대학교 재학 중에 Winfield Henry Line와 만나 [[캠퍼스 커플]]로 교제 끝에 결혼했다. 그는 1902년 [[펜실베이니아]]에서 유명한 상업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졸업 후 아버지의 백화점을 물려받아 경영하는 등 사업가로 활동하다 송복신이 사망한 해와 같은 1994년 사망했다. 1938년 부부가 조선을 방문했으며 당시 여행 기록을 책으로 내기도 했다. 제목은 [[https://www.worldcat.org/title/pyeng-yang-the-story-of-winfield-and-grace-song-line-in-japanese-controlled-korea-and-hawaii-august-to-november-1938/oclc/810080358|Pyeng Yang : the story of Winfield and Grace Song Line in Japanese controlled Korea and Hawaii : August to November 1938]]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623119380913m1023&set_date=19380913&page_no=2|당시 기사]] 의사이자 공중보건 전문가로 미국에서 활동하였으며, 실제로 1947년에 Michigan State College에 근무중이라는 [[https://cdnc.ucr.edu/?a=d&d=DS19470228.2.54&srpos=6&e=-------en--20-DS-1--txt-txIN-grace+song+line-------1|기사]]가 확인된다. 1960년 4.19 혁명 당시에 개인적인 친분에 관계없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https://cdnc.ucr.edu/?a=d&d=DS19600603.2.15&e=-------en--20--1--txt-txIN--------1|신문기사]]가 나기도 했다. 남편과 본인의 이름을 딴 Winfield H. & Dr. Grace Song Line Scholarship Fund가 있다.[[https://www.leelanaufoundation.org/scholarship-funds|#]] 유학생 시절부터 미모로 유명하여 남자 유학생들의 연모를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볼 수 있다. > '''해내 해외에 흩어져 있는 조선 여의사 평판기''' > >X 응 나 아는 중에도 두어 분 더 있어. 지금 인천 야소교부인병원에 가 계신 전혜덕씨하고 미국 가서 지금 유학하는 송복신씨하고 한소제씨가 있지. >A 아하 송복신씨, 한참 동경 재학 시대에 유학생들의 물의가 분분하여 양근환군의 주먹까지 왔다갔다 했다는 그 분 말인가. 그 분이 의전 출신이던가? >X 나는 그것까지는 몰라도 하여간 일본서 의전을 마치고 바로 미국으로 가더니 요새 들으니까 학위까지 얻었다는 말이 있데. >A 갸륵한 노릇일세. 아무러나 조선 여자도 해외에까지 나아가서 학위까지 얻는데는 그의 고심도 적지는 아니하였겠지. 그리고 조선의 여성이 그렇게 발전하여 나간다는 것이 참으로 기쁜 일이야. >------- >1927년 3월 1일 별건곤 제5호 >'''신여성 총관(2) 백화난만의 기미 여인군''' > >송복신 여사도 그 당시 화려한 기억을 주던 여인이었다. 지금은 미국에 가서 고등교육을 받고 영국인인 어떤 유력한 은행가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지내는데 외국에 내어놓아도 실로 그 용모나 학식으로 부끄럽지 않을 이는 송복신 낭(娘)이라 하리만치 그때는 경모를 받았다. >------- >1931년 6월 1일 삼천리 제16호 > 동경에서 공부하던 조선 학생 사이에 한때 평판이 잇던 미인으로 화제의 주인공인 당시의 송복신양..... 그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재학 당시에는 그 교태에 취하야 가슴을 태운 열정 청년도 적지 안헛섯다. 그러나 그는 그 만흔 청년 학생들의 불꼿가티 퍼붓는 사랑도 칼날로 베이드시 다 물리치고 큰 뜻을 품고 태평양을 건너 멀리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낫든 것이다. >------- >1938년 9월 13일 [[조선일보]] [[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생물학자]][[분류:1900년 출생]][[분류:1994년 사망]][[분류:평양시 출신 인물]][[분류:미시간 대학교 대학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