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후궁]][[분류:1506년 사망]][[분류:참수된 인물]][[분류:담양 전씨]] [include(틀:조선의 후궁(환조 ~ 연산군))]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조선 연산군의 후궁[br]{{{+1 숙용 전씨 | 淑容 田氏}}}'''}}} || || '''출생''' ||미상 || ||<|2> '''사망''' ||[[1506년]] [[9월 28일]]^^([[음력]] [[9월 2일]])^^ || ||[[한성부]] 군기시 앞 || ||<|4> '''재위기간''' ||'''{{{#ffd400 조선 숙원}}}''' || ||미상 ~ [[1505년]] [[5월 31일]] || ||'''{{{#ffd400 조선 숙용}}}''' || ||[[1505년]] [[5월 31일]] ~ [[1506년]] [[9월 28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담양 전씨]] || || '''휘''' ||전비(田非) || || '''부군''' ||[[연산군]] || || '''자녀''' ||'''슬하 1녀''' 딸 - 왕녀({{{-2 요절}}}) || || '''봉작''' ||숙원(淑媛) → '''숙용(淑容)'''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연산군]]의 [[후궁]].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으며, 또한 연산군의 많은 여자들 중 그를 이해한 후궁이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열흘 전에 연산군이 후원에서 노닐다가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는 것"이라고 읊자 [[장녹수]]와 더불어 유일하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생애 == 1505년(연산군 11) 숙원에서 숙용(淑容)으로 품계가 올랐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이미 그 전에 연산군의 후궁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연산군일기 57권, 연산 11년 4월 18일 계유 6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104018_006|#]] ] 연산군 재위 기간 동안 다른 후궁들과 마찬가지로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다. 달성군 [[서거정]]의 서자 서복경(徐福慶)[* 서복경을 낳은 어머니는 능직(陵直)을 지낸 이영근(李寧根)의 딸이다. ]은 그녀에게 뇌물을 주고 벼슬을 얻었고[* 연산군일기 58권, 연산 11년 7월 24일 정미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107024_003|#]] ], 외삼촌인 전동(田同)은 조카딸의 권력을 믿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횡포를 부리는데 오히려 지방 수령들은 전동을 접대하며 잘 보이려고 노력하였다.[* 연산군일기 62권, 연산 12년 6월 1일 기유 8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206001_008|#]] ] 그러나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연산군이 폐위되자 권세를 잃고 몰락하여 [[장녹수]], [[숙원 김씨(연산군)|김귀비]] 등과 함께 군기시 앞에서 [[참수]]되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