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일본군의 전쟁범죄)] [include(틀:제2차 세계 대전/연표)] [목차] [clearfix] == 개요 == '''숙칭 대학살'''(肅淸大虐殺, 肅清大屠殺, 肃清大屠杀)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2년 [[영국령 싱가포르|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이 [[일본령 싱가포르|싱가포르 통치 기간]]에 2월 18일에서 3월 4일 사이에 싱가포르에 거주하던 [[중국인]] [[화교]]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인종청소]] 사건이다. 숙칭 대학살 사건 이후 학살은 [[페라나칸|말레이시아계 중국인 화교]]들로 확대됐다. 숙칭 학살로 희생된 사람의 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일본 정부 측에서는 약 4 ~ 5천 명이 학살에 의해 희생됐다고 추산했으며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화교 측은 약 10여만명이 학살됐다고 추산했다. 전후 학계에서는 약 2만 5천 명에서 5만 명 사이의 [[중국계 싱가포르인]]들 및 [[싱가포르인]]들이 학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숙칭'(肅清)의 의미는 '''[[숙청]]''', 즉 '[[일본 제국]]의 [[중국인]] [[인종청소]]'를 의미한다. == 전개 ==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은 [[영국]]이 [[홍콩]]을 통해 [[중화민국]]을 돕는다고 여겨 [[영국령 홍콩]]을 점령하였다.([[홍콩 전투]]) 영국은 허약한 [[식민지]] 주둔군 탓에 손쉽게 식민지를 뺏겨 버렸다. 여기에 기세를 몰아 일본은 전선을 [[동남아시아]] 전 지역으로 확대해 [[필리핀]]과 [[괌]]도 [[미국]]으로부터 빼앗고 또 다른 [[영국령 말레이]] 연방까지 쳐들어가 [[말레이 반도]] 본토를 순식간에 차지하였으며 [[1942년]] 2월에는 마침내 영국령 말레이 연방의 최대도시였던 [[싱가포르]]까지 침공하여 [[싱가포르 전투]]를 치렀지만 [[영국군]]은 허약한 식민지 주둔군 특성 상 손쉽게 패배했고 싱가포르 주둔군이던 [[영국 해군]]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호주]]로 패퇴해야 했다.([[남방 작전]]) 싱가포르는 이후 [[일본 제국]]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이름부터 [[쇼와]]의 남쪽 섬이라는 의미의 소남(昭南: 쇼난)으로 바뀌었다. 싱가포르를 [[일본군]]이 점령한 이후 [[일본군]]은 많은 물자를 얻게 되어 사기가 올라가고 물자 전달 방식을 현지 조달, 손쉽게 말해 '''[[약탈]]'''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싱가포르에서 굉장히 많은 [[전쟁범죄]]들을 저질렀다. '''이때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일본 제국]]의 적국인 [[중화민국]]과 동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 많은 탄압을 받았다.''' 이는 [[말레이 반도]] 본토인 [[일본령 말라야|말라야]]도 해당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도계 싱가포르인]] 영국군 장병과 군무원, 영국령 말레이 연방 경찰공무원 및 총독부 소속 공무원들 상당수가 수감되거나 살해당했다.[* 물론 [[말레이인]]이나 [[인도계 싱가포르인]]들 중 일부는 일본군과 함께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에 대해 쌓인 감정 때문에 학살에 동참한 경우도 있었다. 당연히 중국계도 이에 응수해 서로 학살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는 나중에 싱가포르 해방 후 [[리콴유]]가 민족 갈등을 없애고자 인종/사회 통합책을 사용하는 이유가 되었다.] == 학살의 시작 == 이 사건은 일본 [[군부]]가 18~50세의 [[중국계 싱가포르인]] [[게릴라]] 또는 공산주의자를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자행한 [[학살]]이다. 이로 인해 일본 추산 5000명, 학계 추산 약 5만명, [[중국계 싱가포르인]] 커뮤니티 추산 10만명 정도의 [[화교]]가 학살당하였다. 이 학살의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1. 일본군 및 [[일본인|일본계 주민]]을 상대로 [[게릴라]] 활동을 한 자. 2. [[중화민국]]에 재정지원을 한 자. 3. [[동남아시아]]를 거점으로 항일 활동을 하거나 반일 행동을 한 자. 4. [[레지스탕스]] 관계자 및 지지자 5. 영국 식민지 시대의 공무원, 법관, 입법회 의원, 경찰관 및 식민지 주둔 영국군 군속. 6. [[흑사회]] 등 비밀조직과 반사회적 조직에 관여된 자. 7. [[중일전쟁]] 이후 이민한 자. 8. [[하이난섬|하이난]](海南) 출신자.[* 왜 하필 하이난섬이었냐면 일본군은 이들의 대다수를 공산주의 활동가로 보았기 때문이다.] 9. 일본군의 검문 시 저항하는 자 및 도망하는 자. [[http://chedulife.com.au/1942%EB%85%84-3%EC%9B%94-4%EC%9D%BC-%EC%8B%B1%EA%B0%80%ED%8F%AC%EB%A5%B4-%EC%A0%90%EB%A0%B9-%EC%9D%BC%EB%B3%B8%EA%B5%B0%EC%9D%B4-%EC%8B%B1%EA%B0%80%ED%8F%AC%EB%A5%B4-%EA%B1%B0%EC%A3%BC-%EC%A4%91/|출처]] 위의 기준에 따라 대학살이 벌어져 문자 그대로 [[중일전쟁]] 때 [[난징]]에서나 볼 법한 '''[[난징 대학살|인간 도축장]]'''이 섬 전체에서 펼쳐졌다. 이때 중국계는 하도 탄압을 당해 그 악명 높은 [[백호주의]]를 실시하던 [[호주]]로 돈 싸들고 도망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피난했다가 온 사람도 많으며 특히 학살이 집중적으로 벌어진 풍골 비치, 창이 비치 등 동부 해안가는 현재 목 없는 중국인 귀신이 대거 출몰한다는 [[괴담]], [[도시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다. 일본군이 난징에서처럼 학살할 때 사람들의 목을 베어 수급을 챙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국계 학살 역사는 싱가포르 교육에서 [[싱가포르인]] 전 인종을 통틀어 제대로 배우며 특히 중국계는 밥상머리 교육 등을 통해 젊은 세대도 일본 제국의 만행에 대해 [[영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일본 문화보단 한류가 더 영향력이 강하며 특히 F&B에선 한국 브랜드가 압도적으로 인기인 게 바로 일본에 대한 불편한 감정 때문이다.] 35년[* [[을사조약]]을 기준으로 하면 사실상 40년이다.] 동안 지배받은 한국보다 더 [[반일]] 감정이 강한데 짧은 기간 동안 너무 잔혹한 전쟁범죄를 당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오래 흘러 싱가포르에 국빈 방문한 일본의 [[가이후 도시키]] 총리는 싱가포르 국빈 방문 당시 싱가포르 외무장관이었던 라자나트남으로부터 "일본인은 반성이란 걸 할 줄 모르는 거 같다"며 극딜당하기도 했다. 라자나트남은 중국계도 아닌 인도계인데도 이 정도 반응이 나온 것이다.] 중국계는 물론 [[백인]]들도 박해를 당했으며 야만인이라고 멸시하던 일본군으로부터 터무니없는 망신소리까지 들어야 했으며 [[여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갔다. 백인들 중 일부는 망신소리와 [[조리돌림]] 끝에 자결하기도 하고 일부는 호주로 피신해 복수를 꿈꾸기도 했으며 싱가포르를 영국이 탈환한 후에나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은 싱가포르에서 재배되는 농산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 의해 속칭 바나나 달러라고 불리는 일본 발행 달러가 발행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암시장에서는 해협 달러가 더 많이 쓰였으며 [[군표]], 화폐의 남발과 현지 공장의 가동 중단, 영국령일 때 [[인도 제국]]과 [[호주]]에서 수입하던 식량이나 자원을 수입하지 못해서 생필품 가격이 오르는 턱에 무지막지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연합국]]은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영국 공군]]과 [[미국 해군 항공대]]가 맹공격으로 해안가의 일본 해군기지에 대규모 폭격을 퍼붓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해병대]]를 상륙시키는 등의 본격적 탈환 시도는 없었고 [[일본 해군]]도 해안선 방비를 철저히 하여 싱가포르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제의 통치를 받았다. 물론 저항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 전선 곳곳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미합중국 해병대]]에 밀리며 하나둘씩 점령지를 뺏기기 시작하고 [[미드웨이 해전]]으로 연합함대가 전멸해 버려 전쟁이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자 영국군은 말라야 반도와 홍콩에 상륙해 두 지역은 일찍이 해방시켰다. 이후 끝까지 일본군이 버티던 싱가포르의 경우 최종적으로 싱가포르를 탈환할 지퍼 작전과 조석 작전을 [[영국 해군]]이 입안했다. 그러나 그 전에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실행하고 [[소련]]이 [[만주 작전]]으로 일본군을 [[한반도]] 북부, [[만주]], [[내몽골]], [[사할린]], [[쿠릴 열도]] 등에서 모두 쫓아내면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이 작전은 무기한 연기되어 실행되지 못했다.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여 [[항복]]([[일본의 항복]])한 뒤에도 한 달 동안이나 싱가포르에선 일본군이 버티는 바람에 싱가포르만 계속 일본의 [[군정]] 통치 아래에 있다가 [[영국 해군]]이 전함 두 척을 보내고 전쟁이 끝났으니 항복하라고 일본군을 설득하여 현지 [[지휘관]]이 받아들임으로써[* 다만 이건 그나마 온건히 나온 케이스여서 일본군 300여 명이 할복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 영국은 싱가포르를 되찾았다. 싱가포르는 한반도 남부와 함께 그나마 패망한 일본군이 곱게 물러난 케이스인데 소련이 탈환한 만주, 내몽골, 한반도 북부, 사할린 등에서 일본군, 민간인들이 비참한 꼴을 당하며 끔살당하거나 [[시베리아]]의 [[굴라크]]로 끌려갔으며 미국이 일본에게서 빼앗은 [[오키나와]]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민간인 희생이 매우 컸고 미국이 탈환한 [[필리핀]]이나 [[괌]] 등에서도 일본군은 대거 미군의 압도적 공세에 끔살당하는 [[배드 엔딩]]을 맞이했다.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에선 일본군이 [[연합군]], 현지인 게릴라들에 의해 모두 쫓겨났다. [[리콴유]]는 유소년 시절 이 일을 모두 겪었기 때문에 생전에는 일본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싱가포르 독립 후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한 날을 민방위의 날로 지정하는가 하면 싱가포르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Singapore)에서 일본군이 점령했을 때 벌인 학살극을 자세히 언급하고 관련 유물도 모두 전시해 박제해 놨으며 싱가포르 역사 교과서는 일본군이 싱가포르에서 잔혹 행위를 벌였다며 날을 세운다. 사석에서도 '''일본의 재무장은 알콜중독자에게 알콜이 들어간 초콜릿을 주는 격'''이라며 재무장을 꿈꾸는 일본을 정신병자에 비유해 극딜하기도 했다. 민간에서도 특히 중국계 사회에선 반일 감정이 상당하여 서구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식집에 걸린 [[욱일기]]가 싱가포르에는 없으며 욱일기나 일본군 미화 등은 금기시된다. 현재까지 생존한 당시 학살에서 살아남은 중국계 노인들도 꽤 많으며 이들은 아직까지 앙금이 남아서 [[일본 요리]]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젊은 층 중에도 일본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와 별개로 뒷감정이 영 좋지 않다. == 참고 == * [[학살]] * [[민간인 학살]] * [[대량학살]] * '''[[난징 대학살]]'''[* 난징 대학살은 중화민국의 수도라는 상징성 때문에 특히 유명한 것이지, '''사실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서 학살이 비일비재했다.'''] * [[100인 참수 경쟁]] * '''[[욘 라베]]''' - 난징에 남겨진 50~60만명 중에서 20~30만명만 죽고 반수 가량 살아남은 건 순전히 그의 공. 문서 참고. * '''[[신멸작전]]''' * '''[[마닐라 대학살]]''' - 이쪽도 난징 대학살에 묻혀서 그렇지, 사상자 숫자는 난징 대학살에 비해서도 결코 적지 않다. 마닐라 대학살은 전쟁에서 지고 있을 때 벌인 것이라면 난징 대학살은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을 때 벌인 것이란 점에서 난징 대학살이 훨씬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난징 대학살이 다른 일본군의 범죄보다 조명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규모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을 때 벌어졌기 때문이다.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 '''[[홀로코스트]] -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상단에 기재된 모든 학살극의 희생자를 다 합쳐도 홀로코스트 하나에 못 미친다. * '''[[일본의 중국대륙 무차별 폭격]]''' - 이로 인해 민간인만 '''수백만 명''' 넘게 죽었다.[* 말이 좋아 폭격이지 '''민간인 죽이는 데 [[공수부대]]까지 투입해서'''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무차별적 학살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중국 상대로 수틀릴 때마다 10만에서 50만 단위의 학살을 저지르는 것이 일상이었다. 가령 [[둘리틀 특공대]]에서 중국이 달아난 미군 비행사들을 구출했다는 이유만으로 '''25만 명'''의 중국인을 살해했다.] * [[사카이 사부로#s-3.1]] - 위안부 피해자들을 비하함과 동시에 난징 대학살의 규모를 축소하는 발언을 했다. * [[간도 참변]] -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 [[인종청소]] * [[제노사이드]] * [[일본령 싱가포르]] [[분류:일본의 전쟁 범죄]][[분류:태평양 전쟁/전쟁범죄]][[분류:1942년/사건사고]][[분류:일본의 학살]][[분류:일본의 역사왜곡]][[분류:인종차별/사건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