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이란의 세계유산)] [include(틀:후제스탄 주의 행정구역)] [[파일:site_1455_0007.jpg]] 다리우스 (아파다나) 궁전과 성채 [[파일:이란 수사 32.jpg]] 대표 유물인 옛 궁전 기둥의 머리 장식 (머리 둘 달린 소)[* 페르시아 뿐만 아니라 서아시아권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확인되는 유물로, 이 도시의 원래 주인이던 [[엘람]]과 [[아시리아]] 등에서도 머리 둘 달린 소를 만들어 세웠다.] [[파일:수사 이란 8.jpg]] 현대 슈쉬 시가지와 [[다니엘]] 영묘 --깨알같은 삼성-- ||<-3> '''[[유네스코|{{{#fff 유네스코}}}]] [[세계유산|{{{#fff 세계유산}}}]]''' || ||<-3>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width=160]] || ||<|5> 이름 || 한국어 || 수사 || || 영어 || Susa || || 페르시아어 || شوش || || 아랍어 || مدينة شوشان أو سوسة || || 프랑스어 || Suse || ||<-2> 국가·위치 || [[이란]] [[후제스탄]] 주 || ||<-3> [include(틀:지도, 장소=Susa قلعه شوش, 너비=100%, 높이=224px)] || ||<-2> 등재유형 || [[세계유산#s-3.1|문화유산]] || ||<-2> 등재연도 || [[2015년]] || ||<-2> 등재기준 || (i)[*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ii)[*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iii)[*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iv)[*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 ||<-2> 지정번호 || [[https://whc.unesco.org/en/list/1455|1455]] || [[파일:수사 이란.jpg|width=500]] [[다리우스]] 궁전의 벽돌 장식 엘람어: 𒈹𒂞𒆠, 𒀸𒋗𒊺𒂗[* 중기 엘람어], 𒋢𒋢𒌦[* 중기 말~신 엘람어] 고대 페르시아어: 𐏂𐎢𐏁𐎠 [[페르시아어]]: {{{+1 شوش }}} [[그리스어]]: Σοῦσα [[히브리어]]: שׁוּשָׁן (Shushán)[* שׁ(š, sh)[ʃ\]를 'ㅅ'으로 표기하는 개역판 성경에서는 '수산'으로 표기된다.[br]"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아닥사스다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__수산__ 궁에 있더니"(느헤미야 1:1),[br]"당시에 [[크세르크세스 1세|아하수에로왕]]이 __수산__ 궁에서 즉위하고"(에스더 1:2)] [[시리아어]]: ܫܘܫ [[영어]]: Susa [목차] == 개요 == [[이란]]의 고대 도시.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Çūšā (수샤)라고 하며, 영어로 수사와 그 주변 지역을 수시아나(Susiana)라고도 한다. [[이란]] 서남부에 위치한 도시로서 고대 [[엘람]] 왕국의 수도로 시작하여 오랜 세월 번영을 누렸다. 다만 중세를 거치며 쇠퇴하여 현재는 인구 8만의 소도시에 불과하며, 대신하여 일대의 주요 도시로 성장한 동북쪽의 [[데즈풀]]과는 데즈 강을 사이에 두고 약 20km 떨어져 있다. == 역사 == 고대 [[엘람]] 왕국의 수도로 본격적인 역사를 시작하여 [[메소포타미아]] 국가들과 경쟁하며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하였는데 가끔은 엘람이 우위를 점하여 바빌로니아를 일시적으로 통치하는 등의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때 바빌론에서 [[함무라비 법전]] 석비를 약탈해 와서 함무라비 법전 유물은 수사에서 발굴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엘람이 메소포타미아 국가들에 비해 열세인 경우가 많은 편이었고 기원전 7세기 [[바빌론]]의 반란에 도움을 준 이유로 신[[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이 침략하여 주민들이 대규모로 학살되고 크게 파괴당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가 재건되었고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에 의해 정복되어 [[엑바타나]], [[페르세폴리스]], [[바빌론]]과 함께 제국의 4대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다. [[파르티아]] 시대에도 번영을 이어가서 겨울철 수도가 되었다. 이후 [[사산 왕조]] 시대까지 번영하였으나 [[이슬람]] 세력이 흥기하여 사산 왕조를 정복할 때 또다시 파괴되었다. 곧 재건되어 고만고만한 지방 도시로 명맥을 유지했으나 [[몽골 제국]]의 침공 때 철저히 파괴당해 완전히 깡촌이 되고 말았다. 이곳의 주민들은 지금 이란의 중소도시이자 수사의 근처에 위치한 데즈풀(Dezful)로 이주해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누가 이란 아니랄까봐 데즈풀도 역사가 2천년이 넘고 데즈 강의 다리(기원후 300년에 지워진 다리로 현존한다)를 보호하기 위한 요새가 기원인데, 수사가 바로 데즈 강 위에 세워진 도시이고, 엘람 시대 수사의 수도권(아완)은 현대의 데즈풀에 위치해 있었다. 즉 수사의 명맥 자체는 이어지는 셈이다. 엘람 ~ 사산 제국기 유적 외에도 시내에는 [[구약]]의 인물인 [[다니엘]]의 영묘가 있다. 무덤의 존재는 [[이슬람 정복]] 직후 아부 무사 알 아슈아리 때부터 알려져 있었으며, 1160년경 유대인 여행가 투델라의 벤자민이 방문했을 때에 이미 성지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카자르 왕조]] 시대에 [[후제스탄]]의 쉬아 성직자 셰이크 자파르 슈슈타리가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한편 유적지 남쪽의 슈쉬 성채는 페르시아 유적은 아니고, 1890년 수사를 발굴하던 프랑스 고고학자가 유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다만 이 역시 130여년이 흐르자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수사의 유구한 역사가 느껴지는 부분. 당시 발굴한 유물의 대부분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나머지와 최근 발굴한 유물들은 현지 슈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현대 이란에서는 1980년 가을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 군이 슈쉬의 서쪽에 흐르는 카크헤 강까지 진격하여 한때 전장이 되었으나 1982년 봄 이란군이 반격에 성공하여 최전선에서 후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갤러리 == [[파일:다니엘 이란.jpg|width=780]] 1870년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다니엘 영묘 [[파일:수사 이란 1.jpg|width=780]] [[파일:이란 팔레비 수사.jpg|width=730]] 팔레비 왕조 시절 궁전 ||[[파일:수사 이란 5.jpg|width=420]]||[[파일:이란 수사 다리우스.jpg|width=316]]|| || 페르시아 양식의 기둥 || [[다리우스 1세]] 석상 || ||[[파일:수사 이란 7.jpg|width=340]]||[[파일:수사 이란 6.jpg|width=390]]|| |||| 기둥 상단을 장식했던 쌍두우 유물 (루브르 박물관 소장) |||| [[파일:이란 수사 5.jpg|width=780]] [[파일:수사 이란 2.jpg|width=78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ersian_warriors_from_Berlin_Museum.jpg|width=780]] [clearfix][[분류:후제스탄]][[분류:이란의 옛 수도]][[분류:이란의 도시]][[분류:이란의 세계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