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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블래스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피츠버그 파이리츠 개막전 선발 투수)] ---- ||
'''스티브 블래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 || '''[[1971년 월드 시리즈|{{{#fdb827 1971}}}]]''' || ---- [include(틀:파이리츠 명예의 전당)] ---- ||<-5> '''{{{#ffffff [[피츠버그 파이리츠|'''{{{#ffffff 피츠버그 파이리츠}}}''']] 등번호 23번}}}''' || || 훌리오 고테이[br](1964) || {{{+1 →}}} || '''{{{#000000 스티브 블래스[br](1964)}}}''' || {{{+1 →}}} || 조지 스프리그스[br](1965~1967) || ||<-5> '''{{{#ffffff [[피츠버그 파이리츠|'''{{{#ffffff 피츠버그 파이리츠}}}''']] 등번호 28번}}}''' || || 아지 버질[br](1965) || {{{+1 →}}} || '''{{{#000000 스티브 블래스[br](1966~1974)}}}''' || {{{+1 →}}} || 빌 로빈슨[br](1975~1982) || }}} || }}} || ---- || 이름 || 스티븐 로버트 블래스[br](Stephen Robert Blass) || ||<|2> 출생 || [[1942년]] [[4월 18일]] ([age(1942-04-18)]세) || || [[코네티컷]] 주 캐넌 || || 국적 || [[미국]] || || 포지션 || [[투수]] || || 투타 || [[우투우타]] || || 신체 || 183cm, 74kg || || 프로입단 || 1960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아마추어 FA 계약 || || 소속팀 || '''[[피츠버그 파이어리츠]](1964~1974)''' || [목차] [clearfix] == 개요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뛰었던 우완 선발투수. 그 유명한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의 주인공으로, 은퇴 후 30여년 간 피츠버그 지역 방송의 해설자를 맡다가 지금은 그만두었다. == MLB 커리어 == 1960년 18세의 이른 나이에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계약한 블래스는 22세 때인 1964년에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가졌고, 1966년에는 1군에 정착했다. 풀타임 4년차인 1968년에 커리어 하이 시즌을 찍었는데, 성적은 18승 6패에 무려 2.12의 평균자책점, 7완봉승을 기록했으며, 그 해 9월에는 5승 1패 1.65 ERA, 46탈삼진으로 NL 이달의 투수상을 받기도 했다. 1969년 16승 10패 ERA 4.46으로 주춤한 그는 1970년 ERA 3.52로 반등했고, 1971년에는 2.85까지 끌어내렸다. 이 시즌 피츠버그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여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격돌했는데, 블래스는 3차전, 7차전에 나서 모두 9이닝 1실점 완투승을 거두는 MVP급 활약을 선보였다.[* 다만 월드시리즈 MVP는 .414 .452 .759의 슬래시라인을 찍어버린 [[로베르토 클레멘테]]가 선정됐다.] 1972년에도 2.49의 평균자책점, 19승을 기록하며 명실상부 팀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활약에 힘입어 생애 첫 올스타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사이영 투표에서도 2위를 기록했다.[* 1위는 27승 10패 ERA 1.97로 만장일치 수상한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스티브 칼튼]].] 데뷔 후 8시즌 동안 정확히 100승을 찍고, 평균자책점은 3.24, 이대로 평탄한 커리어가 이어지는 줄 알았는데.. ==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 == 대활약을 펼쳤던 직후 시즌인 1973년, 블래스는 갑작스럽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제구력 난조를 겪게 되었다. 그저 그런 제구력 난조가 아닌, 아예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게 된 것. 이 해 그의 성적은 88.2이닝 '''9.85 ERA''', 84볼넷을 내줬고 삼진은 27개밖에 잡지 못했다.[* 원래도 삼진율은 낮은 편으로, 정상이었던 8시즌 동안 K/9가 5.2였다. 하지만 그 낮은 수치마저도 절반으로 줄어버렸으니...] 결국 마이너로 내려가게 되었지만, 1974년에도 회복방법을 찾지 못하면서, 1975년 3월, 충격의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 블래스의 사례를 계기로, 이른바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이라는 현상은 일종의 야구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현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상기 항목을 참조. 한편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인터뷰에서 블래스는 커리어 마지막이 끔찍하게 끝나고 말았지만, 피츠버그와 10년 간 좋은 인연을 만들면서 통산 100승을 쌓고 월드시리즈에 나설 수 있었던 야구 인생에 만족한다고 밝혔다. 또한 팀 동료이자 좋은 친구인 [[로베르토 클레멘테]][* 1972년 12월 31일 사망.]가 1973 시즌 직전에 사망한 것에 대한 슬픔 등이 블래스 신드롬의 원인은 아니라고 말했다. == 은퇴 이후 == 은퇴 직후인 1970년대 후반 블래스는 학교 졸업 기념 반지를 만드는 피츠버그의 한 회사에서 외판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1983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팀 TV 및 라디오 방송의 파트타임 해설자로 합류했고, 1986년에는 풀타임 해설자로 자리잡았다. 2005년부터는 가족들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홈 경기에만 나서다가, 2019년에는 해설자 인생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에는 피츠버그 명예의 전당 첫 입성자가 되었다. [[분류:리치필드 카운티 출신 인물]][[분류:1942년 출생]][[분류:우완 투수]][[분류:우투우타]][[분류:1964년 데뷔]][[분류:1975년 은퇴]][[분류:피츠버그 파이리츠/은퇴, 이적]][[분류:원클럽맨/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