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br]{{{-1 [[라틴어]]: Spurius Postumius Albin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미상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동생)||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10년 || ||<#800080> {{{#ffffff '''전임''' }}}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기원전 111년 집정관)|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br][[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 || ||<#800080> {{{#ffffff '''동기''' }}} ||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기원전 110년 집정관)|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 ||<#800080> {{{#ffffff '''후임''' }}}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br][[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기원전 109년 집정관)|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포스투미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는 그의 조부와 아버지 항목에 'AIbI'라는 4개의 문자만 남아있을 뿐 프라이노멘이 전해지지 않는다. 학자들은 행정관들의 법적 제한연령을 규정한 빌리우스 아닐리스 법에 의거해 기원전 113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았을 거라 추정한다. 이 무렵, [[누미디아]] 전임 국왕 [[굴루사]]의 아들인 마시바가 로마를 방문해 [[원로원]] 의원들에게 [[유구르타]]를 폐위시키고 자신을 왕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로마에 체류 중이던 유구르타는 이 소식을 듣고 암살자를 보내 마시바를 살해하게 했다. 마시바는 암살자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암살자는 알비누스에게 체포되었다. 알비누스는 유구르타와 측근 보밀카르를 마시바 암살 사주 혐의로 기소했지만, 재판을 맡은 50명의 배심원들은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어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원로원은 유구르타에게 당장 이탈리아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유구르타는 로마를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참으로 돈에 좌지우지되는 도시로다! 이제 돈으로 사들이는 자가 나타나면 로마는 곧 망할 것이다!" 기원전 110년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기원전 110년 집정관)|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누미디아를 배정받았다. 진작부터 누미디아로 가서 군공을 세우길 갈망했던 그는 곧바로 아프리카로 건너가 군대를 소집한 후 유구르타와 회전을 벌이려 했다. 그러나 유구르타가 싸움에 응하지 않으면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 집정관 선거가 다가오자, 그는 선거를 주관하기 위해 로마로 향하면서 군대를 동생 아울루스에게 맡겼다. 아울루스는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나중에 이 사실이 고발될까 걱정하다가 공적을 세워 만회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유구르타가 보물을 보관해뒀던 수흘 마을을 공격했다. 그러나 유구르타의 첩자들이 사전에 이러한 적의 움직임을 간파했고, 그는 군단병들을 매수해 숲으로 유인했다. 그 후 누미디아군이 로마군을 포위했을 때, 리구리아와 트라키아 출신의 기병대가 적에게 매수되어 탈주했다. 누미디아군의 뒤이은 공세로 막심한 피해가 속출하자, 이제 싸워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아울루스는 항복했다. 유구르타는 패배한 지휘관과 병사들이 멍에 아래로 지나가게 한 뒤 2주 안에 누미디아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로마군이 그런 굴욕을 당하고 쫓겨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인들은 극심한 분노에 휩싸였다.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를 통해 수많은 로마 귀족들이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당했다. 그는 자신까지 화를 입을 것을 염려해 전직 집정관이자 총독으로서 군대를 모집했지만, 어느 [[호민관]]이 그에게 새로운 군대를 아프리카로 끌고 가는 것을 금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홀몸으로 아프리카로 건너가 현지 군대와 합류했다. 이후 유구르타와 어서 전투를 벌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려 했지만, 병사들의 전투력이 매우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든 군사 활동을 중단했다. 기원전 109년 여름 집정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가 도착하자 그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로마로 돌아왔다. 한편, 로마에서는 호민관 가이우스 마밀리우스 리메타누스의 제안에 따라 누미디아 문제에 연루된 여러 정치인의 활동을 조사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한 직후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 및 루키우스 오피미우스와 함께 유구르타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당했다. 훗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마미우스의 법이 터무니없으며 별다른 증거도 없이 포스투미우스 등을 추방한 판사를 비난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