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일본 제국 해군대신]][[분류:1883년 출생]][[분류:1976년 사망]][[분류:도쿄도 출신 인물]][[분류:일본군 해군 군령부장]][[분류:정3위]] [include(틀:일본 제국 해군대신)] [include(틀:일본군/장성급 장교)] ||||<#DC143C> {{{#FFC224 {{{+2 '''시마다 시게타로''' }}}}}} {{{#FFC224 {{{+1 '''[ruby(嶋田 繁太郎, ruby=しまだ しげたろう)]'''}}}}}}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시마다.jpg|width=100%]]}}} || || '''주요 직책''' ||일본제국의 해군 군령부장, 해군대신|| || '''생몰년''' ||1883년 9월 24일 ~ 1976년 6월 7일[br](92세)||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해군 [[제독]]이다. 도조 내각에서 해군 대신으로 일한 바 있다. == 생애 == 시마다 시게타로는 [[1883년]], [[에도 막부]]의 신하 및 신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도쿄 중학을 거쳐 [[1904년]]에 일본 [[해군병학교]]를 졸업한 뒤, 해군 소위 후보생이 되었다. [[1905년]] 5월 말에는 [[쓰시마 해전]]에서 순양함 "이즈미"에 올라 정찰 임무에 종사하였다. [[1915년]]에 일본 해군대학교를 졸업한 후, 해군 [[소좌]]로 승진되었다. 그 후에는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하였고, 주로 [[군령부]]에 재적하면서 [[군령부 총장]]의 신임을 얻었다. [[1923년]]에 일본 해군대학 교관을 지내고, [[1928년]]에는 "다마"와 "히에이"의 함정을 거쳐 해군 [[소장(계급)|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상하이 사변]] 때는 제3함대 참모장으로 [[상하이]]에 출동하였다. [[1939년]]에는 [[중국]] 방면 함대 사령관과 동시에 해군 대장이 되었고, [[1941년]] 10월에는 도조 내각에서 해군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2월, [[도조 히데키]] 수상 겸 육군 참모총장 겸임에 맞추어 군령부 총장을 겸임했지만 지지를 받지 못했고, 같은 해 6월에 있었던 필리핀 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도조 히데키와 아울러 큰 비판을 받았다. 7월에는 해군 장관, 8월에는 군령부 총장을 사임하였고, 후에 군사 참의관을 거쳐 [[1945년]] 1월에 예비역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A급 전범으로 지명돼, 헌병이 신병 구속을 위해 자택에 방문했을 때는 자신은 자살하지 않는다는 당당한 태도로 연행되어갔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는 일본 해군에 있어서 전쟁 수행의 최고 책임자로 사형을 면할 수 없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1948년]] 11월 12일에 종신형 판결을 받았다. [[1955년]], 가석방 후에 사면돼 [[1976년]]에 사망하였다. == 기타 == * 버마의 도살자이자 일본의 악질 전범 [[기무라 헤이타로]]를 보고 사람이 아니라 했다. ~~이 사람마저 욕한 [[기무라 헤이타로|그]]는 도덕책~~ == 둘러보기 == [include(틀:일본군의 전쟁범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