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불가리아 차르)] ---- || '''{{{#fff 시메온 2세 관련 틀 }}}'''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불가리아 총리)] ---- [include(틀:추축국의 주요 지도자들)] ---- [include(틀:BNT 1 선정 위대한 불가리아인)]}}} || ---- ||<-2> '''불가리아 차르국 제3대 차르[br]{{{+1 시메온 2세}}}[br]Симеон II'''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684f, #009b75 20%, #009b75 80%, #00684f)" [[불가리아 총리|{{{#fff '''불가리아 공화국 제48대 총리'''}}}]][br]'''{{{+1 시메온 삭스코부르고츠키}}}[br]Симеон Сакскобургготски'''}}}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Df1V1S1W4AAYS38.jpg|width=100%]]}}} || ||<|2> '''출생''' ||[[1937년]] [[6월 16일]] ([age(1937-06-16)]세)|| ||[[불가리아 왕국]] [[소피아(도시)|소피아]]|| ||<|2> '''재위기간'''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 차르]]|| ||[[1943년]] [[8월 28일]] ~ [[1946년]] [[9월 15일]]|| ||<|2> '''재임기간''' ||제48대 [[불가리아 총리|총리]]|| ||[[2001년]] [[7월 24일]] ~ [[2005년]] [[8월 17일]]|| || '''서명''' ||[[파일:시메온 2세 서명.svg|width=150&bgcolor=#fff]]||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가문''' ||삭스코부르고츠키 가문 || || '''이름''' ||시메온 보리소프 삭스코부르고츠키[br](Симеон Борисов Сакскобургготски) || || '''아버지''' ||[[보리스 3세]] || || '''어머니'''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의 조반나[* 1907~2000] || || '''형제자매''' ||마리야 루이자[* 1933년생으로 1957년에 6대 라이닝겐 후작의 차남 카를(1928~1990)과 결혼했다가 1968년 이혼하고 이듬해에 폴란드인 평민 브로니스와프 흐로보크(Bronisław Chrobok, 1934~)와 재혼해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2남을, 현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전부 포함하여 3남 1녀다.] || || '''배우자''' ||마르가리타 고메스아세보 ,,(1962년 결혼),, || || '''자녀''' ||카르담[* 2008년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있다가 2015년에 사망했다.], 키릴, 쿠브라트, 콘스탄틴아센, 카리나 || || '''종교''' ||[[불가리아 정교회]] ||}}}}}}}}} || [목차] [clearfix] == 개요 == [[불가리아 왕국]]의 마지막 [[차르]]이자 [[불가리아 공화국]]의 제48대 총리. 제대로 꼬인 [[불가리아/역사|불가리아의 현대사]]를 지나오며 특이한 이력을 많이 남긴 인물이기도 한데 세계 역사상 [[차르]] 칭호를 사용한 마지막 군주[* 공교롭게도 '''최초로 차르 칭호를 사용한 군주'''는 그와 이름이 같은 [[불가리아 제1제국]]의 [[시메온 1세]]다.]이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참전국들의 국가원수 중 현재까지 살아 있는 유일한 인물[* 2차 대전 당시의 국가원수 중 시메온 2세 다음으로 가장 오래 살았던 인물은 루마니아의 [[미하이 1세]]로, 2017년에 사망했다.]이다. 세계 역사상 유일무이한, '''혁명으로 인해 퇴위한 군주가 공화제로 바뀐 조국의 정부수반이 된''' 케이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군주가 아닌 왕족이 공화정의 정부수반이 된 사례로 따지면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왕자인 [[모하마드 다우드 칸]]과 [[라오스 왕국]]의 왕자 [[쑤파누웡]]이 1970년대에 왕정이 무너진 후에 공산당 1당 사회주의 공화제가 수립된 [[라오스]]와 공화국이 된 [[아프가니스탄]]의 초대 국가주석, 대통령이 된 사례가 있다. 다만 다우드 칸은 대통령이 된 지 5년 뒤인 1978년 군부의 쿠데타로 정권이 전복되어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세력들에 의해 피살, 암매장당하는 등 그 끝이 좋지 못했다. 쑤파누웡은 왕위 계승권자가 아닌 [[서자]]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사회주의 사상과 공화제를 받아들인 케이스다. 국가수반이나 정부수반급이 아닌 정치인으로 폭을 넓히면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 소속으로 [[유럽의회]] 의원을 지낸 사례가 있다.] == 생애 == 부왕 [[보리스 3세]]가 [[유대인]]들을 잡아들이라는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한 뒤 [[의문사]]하고 그는 1943년에 6세라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불가리아의 차르로 즉위했지만 재위 3년째인 1946년에 공산혁명이 일어나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왕위에서 쫓겨난다.[* 만약 시메온 2세가 계속 재위했다면 2023년에 재위 80주년을 맞았을 것이다(...)] 왕의 나이가 어리다 보니 왕국의 실권은 [[섭정]]이었던 숙부 [[키릴 프레슬라프스키]] 왕자, [[보그단 필로프]] 전 수상, [[니콜라 미호프]] 장군 등 섭정단에게 있었는데 1944년부터 불가리아의 공산화가 진행되면서 키릴 왕자를 포함한 섭정단이 국회의원 67명과 함께 처형당했다.[* 키릴 왕자는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소련 등 연합국 측과 접선하려고 했다.] 한편 어린 탓에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그는 모후 조반나와 함께 망명이 허락됐는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로 망명했으며[* 시메온 2세의 모후 조반나는 [[이탈리아 왕국]]의 공주로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셋째딸이다. 아버지가 망명해 있던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이어서 [[1951년]] [[스페인]]으로 망명하고 1962년 마르가리타와 결혼해 4남 1녀를 뒀다. 스페인과 미국 군사학교에서 대학을 졸업했으며 스페인에서 경영 컨설턴트 직업을 갖고 일하고 있었다. === 귀국과 정치활동 === [[1990년]]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무너지고 불가리아가 민주화된 지 6년 뒤인 [[1996년]] 불가리아의 젤류 젤레프 전 [[대통령]]은 공산화 직후 국외로 추방된 시메온 전 국왕 등 불가리아 구 왕가 사람들에게 내려졌던 구 왕가의 입국 금지 조치를 해제하고 불가리아 귀국을 허용했다.[* 그래서인지 시메온 본인도 자신의 귀국을 허용해 준 젤레프 전 대통령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젤레프 전 대통령이 퇴임 후인 2015년 노환으로 사망했을 때도 애도를 표했을 정도다.] 불가리아의 민주 신정권은 그의 귀국을 허용하되 과거 군주제의 상징인 시메온에 정치적 관심이 쏠리는 것을 막으려고 시도했으나 망명 50년 만에 귀국한 차르에 불가리아 국민들은 환호했다. 귀국 후 그는 결국 정치에 뛰어들어 '시메온 2세 국민운동연합' 창당에 참여하고 선거에서 승리해 [[2001년]] '''[[불가리아 총리]]가 되었다'''. 총리 재임 시절에는 외교 활동으로 [[2004년]] [[NATO]] 가입 및 [[2005년]] [[유럽연합]] 가입 동의[* 실제 가입은 2007년]를 얻어내는 성과를 이뤘다. 경제적으로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국유재산 [[민영화]] 과정 문제 및 대외무역수지 적자로 비판을 받았다. 4년의 임기를 마친 후 국민운동연합은 차르의 귀환이라는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반동으로 [[2005년]] 총선에는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대신 다시 여당 자리를 내주어야 했으며 [[2009년]] 총선에는 아예 원외정당이 되어 버렸으며 본인도 당수 자리를 사임하면서 뚜렷한 정치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망명 시절에는 꾸준히 불가리아의 차르라는 서명을 남겼지만 귀국 후엔 왕정복고에 관해서는 뚜렷한 입장을 보이진 않았다. 전 차르라는 경력을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인기를 얻긴 했지만 결국 다음 총선에서 패배해 버려서 발언할 기회 자체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 가족관계 ==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13> 시메온 2세[br]{{{-2 (Simeon II)}}} ||<|6> [[보리스 3세]][br]{{{-2 (Boris III)}}} ||<|3> [[페르디난트 1세(불가리아)|페르디난트 1세]][br]{{{-2 (Ferdinand I)}}} ||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아우구스트[* 초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의 남동생이자 [[벨기에]]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의 형인 페르디난트 공자의 차남. [[빅토리아 여왕]]의 외사촌이자 [[앨버트 공]]의 친사촌이다.][br]{{{-2 (Prince August of Saxe-Coburg and Gotha)}}} || || [[클레망틴 도를레앙|오를레앙의 클레망틴]][* [[루이필리프]]의 4녀이다.][br]{{{-2 (Princess Clémentine of Orléans)}}} || ||<|3> 부르봉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br]{{{-2 (Princess Marie Louise of Bourbon-Parma)}}} || ||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br]{{{-2 (Robert I, Duke of Parma)}}} || || 부르봉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피아 공주[* [[페르디난도 2세]]의 3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이모다.][br]{{{-2 (Princess Maria Pia of Bourbon-Two Sicilies)}}} || ||<|7> 사보이아의 조반나 공주[br]{{{-2 (Princess Giovanna of Savoy)}}} || ||<|3>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br]{{{-2 (Vittorio Emanuele III)}}} || || [[움베르토 1세]][br]{{{-2 (Umberto I)}}} || ||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 [[카를로 알베르토]]의 손녀이자 [[요한(작센)|요한]]의 외손녀이다.][br]{{{-2 (Princess Margherita of Savoy)}}} || ||<|3> [[몬테네그로 왕국|몬테네그로]]의 옐레나 공주[br]{{{-2 (Princess Elena of Montenegro)}}} || || [[니콜라 1세]][br]{{{-2 (Nicholas I)}}} || || 밀레나 부코티치[br]{{{-2 (Milena Vukotić)}}} || 1962년 스페인의 귀족인 제 4대 코르티나 후작(Marquess of Cortina)의 손녀 마르가리타 고메스아세보(Margarita Gómez-Acebo y Cejuela, 1935-)와 결혼해 4남 1녀를 두었지만 장남 카르담이 2008년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 2015년에 [[참척|먼저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사후에는 카르담의 장남이자 시메온 2세의 장손인 보리스가 명목상의 차르 '보리스 4세' 가 될 예정이다. 차남인 프레슬라브 공 키릴의 장녀 마팔다(1994년생)는 현재 영국에서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재위 기간 중에는 왕위 계승권자가 공산당에게 총살당한 삼촌 키릴(자녀 없음)뿐이었지만 그가 아들을 넷이나 두었고 그 아들들이 낳은 손자가 7명, 손녀가 3명이나 되어 가문이 번성하게 됐다. [[룩셈부르크]] 대공 [[앙리(룩셈부르크)|앙리]],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지막 왕 [[페타르 2세]]와 6촌간이다.[* 친할머니인 부르봉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가 앙리 대공의 할아버지 펠릭스 공자의 이복누나고 외할머니인 옐레나는 페타르 2세의 할머니 류비카의 여동생이다.] 원래 조부 페르디난트 1세의 형인 루트비히 아우구스트의 후손들이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가문[*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한 분파로, 초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의 동생이자 시메온 2세의 고조부인 페르디난트 공자가 헝가리 귀족 가문인 코하리 가문의 상속녀와 결혼하면서 창설된 가문이다.]의 수장 지위를 잇고 있었는데 루트비히 아우구스트의 증손자이자 시메온 2세의 7촌 조카인 요하네스 하인리히가 2010년에 후사 없이 죽어서[* 아들 요하네스가 있었지만 1987년에 18살 나이로 등산하다가 요절했다. 요하네스는 어머니의 가문인 [[작센 왕국|작센 왕가]]의 잠재적 후계자이기도 했다.] 시메온 2세가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가문의 수장을 맡았다가 2015년에 수장 작위를 누나 마리야 루이자에게 넘겼다. 재혼한 평민 남편의 소생들은 작위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코하리 가문의 작위는 이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https://eurohistoryjournal.blogspot.com/2022/05/the-current-state-of-princely-house-of.html?m=0|#]] == 둘러보기 == [include(틀:추축국)]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엘리자베스 2세,version=1193,paragraph=7.2,title2=불가리아,version2=473,paragraph2=4)] [[분류:망국의 군주]][[분류:불가리아 차르]][[분류:불가리아 총리]][[분류:삭스코부르고츠키 가문]][[분류:폐위된 군주]][[분류:유럽의 작위 요구자]][[분류:1937년 출생]][[분류:소피아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