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오대십국 왕조)]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5D5F53 0%, #70745f 20%, #70745f 80%, #5D5F53); color: #ece5b6" '''후주 제3대 황제[br]{{{+1 공황제 | 恭皇帝}}}'''}}} || ||<|2> '''출생''' ||[[953년]] [[9월 14일]] || ||[[후주]] [[허난성|전주]] [[푸양시|복양현]] [br](現 [[허난성]] [[푸양시]] 푸양현) || ||<|2> '''즉위''' ||[[959년]] [[7월 28일]] || ||[[후주]] [[허난성|변경]] [[카이펑시|개봉부]] 변경 황궁[br](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 ||<|2> '''사망''' ||[[973년]] [[4월 6일]] (향년 20세) || ||[[북송]] [[후베이성|방주]][br](現 [[후베이성]] [[스옌시]] 팡현) || || '''능묘''' ||순릉(順陵) || ||<|2> '''재위기간''' ||'''{{{#ece5b6 제3대 황제}}}''' || ||[[959년]] [[7월 28일]] ~ [[960년]] [[2월 4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곽(성씨)|곽(郭)]] / [[시(성씨)|시(柴)]] || || '''휘''' ||종훈(宗訓) || || '''부모''' ||부황 [[시영|세종]][br]모후 황후 부씨 || || '''작호''' ||[[양왕]](梁王) → 정왕(鄭王) || || '''시호''' ||'''공황제(恭皇帝)''' || || '''연호''' ||현덕(顯德, [[959년]] ~ [[960년]])[* [[시영|세종]](世宗)의 연호를 이어서 사용하였다. 원래 유년개원이라 하여 선황에 대한 효도의 이유로 즉위한 해에는 선제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며, 해를 넘겨서 정식으로 새로운 연호로 개원하였다. 하지만 해를 넘긴 정월에 송왕조에 선양하게 되었으므로 개원하지 못한채로 이전 연호를 본인 재위기간 내내 사용한 것이 된 셈이다.] || || '''절일''' ||천수절(天壽節) || }}}}}}}}} || [목차] [clearfix] == 개요 == [[후주]](後周)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휘는 종훈(宗訓). [[시영|세종]](世宗)의 넷째 아들. == 생애 == 959년, [[천하통일|중원 통일]] 준비를 위해 북방의 [[요나라]]를 공격하여 [[석경당]]이 내어준 [[연운 16주]]의 수복을 목표로 북벌을 감행한 아버지 시영이 도중에 갑자기 병사하자, 그 뒤를 이어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시종훈은 4남이었으나 맏형 시종의가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의 [[유숭]]에게 살해당했고, 둘째 형인 시종양과 셋째 형인 시종함이 요절하였기 때문이다.] 시종훈이 황제로 즉위할 때, 나이가 7살로 매우 어렸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가진 장수가 많았다. 960년, 장수들이 군대를 이끌고서 [[진교의 변]]을 일으켜 [[태조(송)|장군 조광윤]]을 황제로 추대했다.[* 이때 조광윤은 자다가 일어나 장수들의 이야기를 듣고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결국에는 승낙했다고 한다. 다만 제장들이 막중에서 추대하면서 제대로 만들어진 황포를 입혔다는 기록과 당시 그가 출병한 이유인 거란의 침입이 기록에서 검증되지 않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믿기 힘들다.] 이를 막아낼 힘이 없었던 어린 황제 시종훈은 조광윤에게 [[선양]]하였고, 이로써 후주가 멸망하고 [[북송|송나라]]가 개국하였다. 이후 시종훈은 선양을 한 뒤 조용히 살다가 21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조광윤은 그의 장례를 황제의 예를 갖추어 후하게 치러주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명목상 선양을 했던 중국의 대부분의 역대 황제들이 비참하게 죽은 것에 비해, 시종훈과 그 일가는 조광윤의 존중과 보호를 받았다는 점이다. 조광윤은 비록 시종훈으로부터 제위를 빼앗기는 했지만 개봉에 입성할 때부터 휘하 군대에게 철저히 민가 약탈과 살육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고, 전임 황제인 시종훈을 정왕(鄭王)에 봉하고 일족과 함께 방주(房州)에서 살게 하면서 방주 태수이자 자기 스승이기도 한 신문열로 하여금 잘 보호하게 했다. 그리고 조광윤의 후손인 그 후의 황제들도 시씨 일족에게 [[단서철권]]을 주거나 전쟁이 터져 황실이 도망갈 때 함께 데려가주는 등 각별한 대우를 해줬다. 이후 시씨 일족은 북송이 쇠하고 뒤를 이은 남송이 망할 때까지 줄곧 보호를 받았고, 답례인지 그들은 남송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까지 함께 할 정도로 충성을 바쳤다. 다만, 시종훈 자신은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이에 대해 독살설도 제기되었으나 이미 죽일 필요가 없는 그를 죽였겠냐는 반론이 더 우세하여서 그 설은 곧 사그라들었다. 조광윤의 스승인 신문열이 후환을 우려해서 시종훈의 아내를 농락한 후 자살하게 만들고 시종훈도 화병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야사도 있다.[* 이런 암살설은 조광윤의 성향에도 맞지 않고 이후 시씨 가문의 순응적인 행보를 생각해보면 굳이 자신의 일관성을 해치면서까지 피를 묻힐 필요도 없었다.] 그의 동생들인 5남 시종양(柴宗讓), 6남 시희양(柴熙讓), 7남 시희회(柴熙誨)는 모두 성을 바꿨는데 5남 시종양은 외가의 성으로 개명하여 영희양(寧熙讓)으로 살았고, 6남 시희양은 북송의 공신 [[반미(북송)|반미]]가 자신의 조카로 입양하여 반유길(潘惟吉)로 개명하였으며, 7남 시희회는 공신 노염이 입양하여 노선(盧璇)으로 개명하였다가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사위로 삼았다. 그리하여 시씨 가문은 세종 시영의 직계는 잇지 못했고 세종의 형제들, 즉 세종의 아버지인 시수례의 다른 자손들이 남송이 망할 때까지 이어갔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구오대사)] [include(틀:신오대사)]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공제, version=26)] [[분류:오대십국시대/황제]][[분류:망국의 군주]][[분류:송나라/인물]][[분류:953년 출생]][[분류:973년 사망]][[분류:푸양시(허난성)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