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고령 신씨]][[분류:장성군 출신 인물]][[분류:1900년 출생]][[분류:192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 성명 ||신국호(申國浩) || || 이명 ||신경호(申景浩)·신국홍(申國洪) || || 본관 ||[[고령 신씨]][* 귀래정공파 26세 호(浩) 항렬.] || || 생몰 ||[[1900년]] [[12월 10일]] ~ [[1924년]] [[10월 10일]] || || [[출생지]]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독립유공자 [[신상우(독립운동가)|신상우]]·[[신태식(1890)|신태식]]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지 ||[[전라남도]] [[장성군]]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신태식(1890)|신태식]]의 5촌 조카(당질)이기도 하다. == 생애 == 신국호는 1900년 12월 10일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에서 아버지 신병식(申昞植)과 어머니 [[고(성씨)|장택 고씨]] 고제원(高濟元)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부 신병식은 1914년 생모 [[고(성씨)|장택 고씨]]가 별세하자 곧 [[전주 이씨]] 이문례(李文禮)의 딸을 재취로 들여 두 아들을 두었다.] 이후 자식이 없던 큰아버지 신경식(申耕植)에게 입양되었다.[* 입양된 후 1930년 양부 신경식과 양모 [[울산 김씨]] 김요석(金堯碩)의 딸 사이에 늦둥이 아들 신방호(申邦浩)가 태어나긴 한다.] 일찍이 [[광주광역시|광주군]]의 춘담(春潭) 기동준(奇東準)[* 1869 ~ 1918. 자 평중(平仲). [[기대승]]의 후손으로 [[전라도]] 광주목 광곡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광곡마을)의 [[행주 기씨]] 집성촌에서 기창현(奇昌鉉)의 아들로 태어났다.[[http://www.gjsgcc.or.kr/ko/35/view?SEQ=2168&page=3|#]] 1894년 식년시 생원시에 3등 84위로 급제하였다.[[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4_039430|#]]]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19년 4월 3일 저녁, 그는 아버지 신경식과 [[고용석]]·유상순(柳相淳)·[[유상설]]·[[정병모]] 등이 화전회(花煎會) 모임을 이용하여 시국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하다가 귀가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사가리 헌병주재소에서 일본 헌병이 고용석·유상설·유상학·신진식(申鎭植)을 연행해 가자, 이날 밤 신경식·정병모·[[신태식(1890)|신태식]]·[[신상우]] 등과 만나 연행된 동지의 석방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튿날 오전 11시경 오상구(吳相九)·박광우(朴光又) 등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헌병주재소로 시위행진하여 주재소 앞에서 연행된 동지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니,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린 헌병들이 장성읍 헌병 분대를 불러들여 합세하여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6명의 부상자를 낸 채 강제 해산되었다. 이때 현장에서 체포된 신국호는 1919년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4년 10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신국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3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