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회원수정2)]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신라의 동음이의어, rd1=신라(동음이의어))] [include(틀:신라)] ---- || {{{#fbe673 '''신라 관련 둘러보기'''}}}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한국의 역사)] ---- [include(틀:신라의 역사)] ---- [include(틀:진한의 국가)] }}} || ---- ||<-4> '''{{{#fbe673 {{{+1 신라 | 新羅}}}[br]Silla}}}''' || ||<-4> {{{#4a2d5b,#fbe673 '''德業日新 網羅四方[br]덕업일신 망라사방'''}}}[* '''덕을 쌓는 일이 날마다 새로워 사방 천지를 아우른다''' 라는 뜻이다.요즘으로 치면 덕을 쌓아 온 세계로 퍼트린다는 뜻.] || ||<-4> [[파일:신라 군기.svg|width=130]] || ||<-4> '''{{{#fbe673 군기{{{-1 (상상도)}}}}}}'''[* 《[[삼국사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850&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신라 무관 3]]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신라 사람들의 휘직은 띠를 푸르거나 붉거나 하는 등의 색깔로 구분하였고 모양은 반달의 형상을 취하였다." 깃발은 주로 [[반달곰]] 가죽으로 만들었다. 이외에도 신라에선 [[신궁]] 이름도 [[달]]에 비유해 [[경주 월성|월성]]으로 짓고, 신라를 [[초승달]]에 비유한 기록도 있어[[http://db.history.go.kr/id/sg_028r_0020_0370|#]] 여러모로 달을 신라의 상징으로 여기는 기록이 많이 등장한다. 다만 위의 이미지는 텍스트를 근거로 상상해 그린 것으로 정확히 저런 모양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 ||<-4> {{{#!wiki style="margin: -6px -10px 0px" [[파일:신라 지도.png|width=100%]]}}}{{{#1b71bc ■}}} {{{-1 [[6세기]]경 신라의 강역}}}[* 북동단은 오늘날의 [[함경남도]] [[리원군]]으로 [[마운령비]]가 세워진 곳이다.] || ||<-4> {{{#fbe673 [[기원전 57년|{{{#fbe673 '''기원전 57년'''}}}]] [[6월 8일|{{{#fbe673 '''6월 8일'''}}}]][* [[갑자]]년([[기원전 57년]]) 음력 4월 병진일 또는 1월 15일.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건국을 기원전 57년으로 전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역시 동일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br]'''~''' '''서기''' [[936년|{{{#fbe673 '''936년'''}}}]] [[1월 13일|{{{#fbe673 '''1월 13일'''}}}]][* 을미(乙未)년 기축(己丑)월 임신(壬申)일로, 음력 935년 12월 12일, 율리우스력으로는 936년 1월 8일이다. 신라의 합병 연도를 일반적으로 935년이라고 하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태조(고려)|왕건]]이 공식적으로 신라 합병을 결정하고, 경순왕과 신라 왕족이 제후왕 신분을 완전히 잃는 날은 12월 12일인데, 이를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변환계산 시스템을 이용해 현대에 쓰이는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해를 넘겨 936년 1월 13일 금요일이 된다.][* 다만, 실제 항복과 경순왕의 개성 입조는 935년 11월에 이뤄졌고 이게 936년 1월까지 미뤄진 건 경순왕이 귀부를 요청하고 왕건이 거절하기를 반복하는, 예의상 인사치레를 한 달 동안 했기 때문이다.] '''(약 991년)'''}}} || ||<-4> {{{#fbe673 '''시대 구분'''}}} || || [[진한|{{{#000,#e5e5e5 진한}}}]] [[사로국|{{{#000,#e5e5e5 사로국}}}]] || {{{#000,#e5e5e5 삼국시대[br]신라}}} || [[통일신라|{{{#000,#e5e5e5 통일신라}}}]] || [[신라/후삼국시대|{{{#000,#e5e5e5 후삼국시대[br]신라}}}]] || ||<-2> {{{#fbe673 '''성립 이전'''}}} ||<-2> {{{#fbe673 '''합병 이후'''}}} || ||<-2> '''[[진한|{{{#fff 진한}}}]]''' ||<-2> '''[[고려|{{{#670000 고려}}}]]''' || || {{{#fbe673 '''국호'''}}} ||<-3>[[사로국#s-1|{{{#000,#fff [[사로국|사로]], [[서라벌]] 등}}}]][* '신라'에 해당하는 고유어 음을 한자를 빌려 나타냈기 때문에 '사로(사로국)', '신라', '[[사라]]' 등 여러 표기가 혼용되었다. 따라서 진한 12소국 시기의 사로국을 '신라국'이라고 해도 완전히 같은 말이다.] → 신라[* [[503년]] 국호 통일. 이 밖에 일종의 별칭으로, 건국 신화의 발원지이자 신라인의 정신적 구심점인 '[[계림]]'이 곧 신라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계림대도독부]] 등). 계림은 심지어 신라가 고려에 합병된 뒤에도 [[조선시대]]까지 [[한반도]]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해당 문서로.] || || '''[[위치|{{{#fbe673 위치}}}]]''' ||<-3>[[사로국|경주 분지 계림 일대]]→ [[한반도]] 동남부[* [[골벌국]]과 같이 신라에 우호적인 국가가 많았다. 이후 영천의 토착신이 신라에서 행하던 대사(大祀)에서 모시는 3선(仙)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로 골벌국은 신라 사회에서 나름대로 대접을 받았다.] ㆍ부속도서[* [[신라-우산국 전투]]로 울릉도(우산국) 복속]→ [[한반도]] 중부 · 남부 ㆍ부속도서[* [[탐라국]], [[우산국|우산도]]. 탐라국은 672년 통일신라에 자진 복속한다.]→ [[한반도]] 중부ㆍ북부ㆍ부속도서[* [[676년]] [[나당전쟁]] 승리([[임진강]]선) → [[694년]]([[효소왕]]3) [[송악]]성 축성([[예성강]]선) → [[748년]]([[경덕왕]]7) 대곡성(오늘날 [[평산군]]) 등 축성 → [[선덕왕]]대 패강진([[황해도]] 일대) 개척 → [[헌덕왕]]대 취성군(오늘날 [[황주군]]) 신라 말기 진성여왕 시대에 전국에서 호족과 도적떼가 들고 일어나 난세가 시작될 때 금용은 평양성주장군(平壤城主將軍)이었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가 평양을 통치권으로 차지했는지 아닌지는 논란이 있어서, [[금용]]을 발해의 변방 지배자나, 신라나 발해 어디의 간섭도 받지 않던 토착세력 정도로 보기도 한다. 사실 신라도 나당전쟁 끝나고 얻은 영토에서 계속 가만 있었던 건 아니고 주민들 이주시키고 개척하면서 조금씩 북상했기 때문에, 황주에서 평양이 멀지 않으니 아마도 9세기 후반쯤 가면 평양도 통치권에 들어갈랑 말랑 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은 가능한 수준. 대체로 남북국시대 지도에는 발해가 평양을 먹은 것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발해 중심지는 매우 먼 상경 용천부였고, 발해가 평양을 지배했다는 근거도 딱히 없고 9세기 후반쯤 가면 발해도 끝물인 건 신라와 비슷했기에 뭐라고 확언하기 어렵다.] / [[요동]] (670)[* [[고구려]] 멸망 후 신라의 장군 [[설오유]]가 고구려 유민과 합세해 요동에 주둔한 [[당나라]]를 선제공격해 몇 달간 점령했다. ([[석문 전투]])이 사건이 본격적인 [[나당전쟁]]의 시작.] → [[신라/후삼국시대|한반도 동남부ㆍ부속도서]][* [[후삼국시대]]([[나말여초]]) [[우산국]]과 [[탐라국]]은 신라에 [[복속]]이 되어있는 상태였다가 930년대 우산국의 백길과 토두는 고려에 복속요청, 탐라국은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 || '''[[수도(행정구역)|{{{#fbe673 수도}}}]]''' ||<-3>[[서라벌|서라벌(금성)]][* [[고구려]], [[백제]]와 비교해도 수도의 변동이 없었다. 다만 [[신문왕]] 때 [[달구벌]]([[대구]])로 천도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귀족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는 [[고려]]도 마찬가지.] || || '''{{{#fbe673 행정구역}}}''' ||<-3>6부 5주 2(3)[[소경]][* 小京. 수도인 서라벌이 동남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거리가 먼 지역의 주요 도시에 설치한 행정구역. 요즘으로 치면 광역시쯤 된다. 558년의 국원소경(충주시) 설치 과정 기록을 보면 서라벌 인근의 부유한 백성을 옮겨서 도시를 키웠다고 한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514년에 설치한 함안군의 아시촌소경, 충주시의 국원소경, 강릉시의 북소경 3경이 있었으며, 통일 이후에는 옛 고구려 지역이 둘, 옛 백제 지역에 둘, 옛 가야 지역에 하나씩 5소경을 뒀다. [[9주 5소경]] 문서로.]→[[9주 5소경]] || || '''[[국조|{{{#fbe673 국조}}}]]''' ||<-3>[[닭]] {{{-2 (추정)}}}[* 신라 건국 신화에 [[계룡]]이나 [[백마]], [[김알지]] 설화와 신라의 국호([[계림]], 계괴, 유괴 등)에서 닭이 많이 등장한다.] || || '''[[종족|{{{#fbe673 종족}}}]]''' ||<-3>[[예맥]], [[진한|진한인]] || || '''[[언어|{{{#fbe673 언어}}}]]''' ||<-3>[[신라어]] || || '''[[문자|{{{#fbe673 문자}}}]]''' ||<-3>[[한자]] ([[이두]][* [[설총]]대에 [[이두]]문이 재정립된다. 특히 [[향가]]에서는 [[향찰]]이라는 형식으로 특화되었다.], [[향찰]], [[구결]]) || || '''[[종교|{{{#fbe673 종교}}}]]''' ||<-3>[[한국 신화|토속 신앙]] → [[불교]]([[교종]][* 신라에서 원효와 의상으로 대표되는 교종불교가 발달했으나, 하대가 되면서 중국에 유학한 구법승려가 개인주의적, 사회개혁적, 민중지향적인 선종을 수입전파하고 호족들이 선종을 후원, 후삼국시대가 되면서 왕건의 고려는 선종 세력으로부터 사상적 후원을 많이 입었다. 그러나 고려도 국가 성립 이후에는 지배층은 교종과 밀교를 많이 신앙하였다. 고려 시대 불교 통합운동을 위해 노력한 의천도 교종 승려였다. 고려시대때는 의천이 불교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국청사를 중심으로 해동 천태종을 개창하고 수행 방법으로 교관겸수를 제시했다.] → [[선종(불교)|선종]][* 신라 때 [[원효]]와 [[의상(신라)|의상]]으로 대표되는 [[교종]]불교가 발달했으나 신라 하대 선종의 출현으로 신라 말의 혼란은 더더욱 가중되었는데, 신라계 중앙귀족들은 왕실의 지원을 받는 [[교종]](5교)을 신봉했다면 삼한계 지방 [[호족(한국사)|호족]]들은 신라의 원신라계 우대정책에 반발하여 중앙에 대한 악감정으로 누구나 부처가 될수있다는 교리를 지닌 선종(9산)을 추종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석가모니]] 부처가 아닌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증득한 자를 말한다. 하지만 [[궁예]]는 선종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리를 악용하여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던 궁예가 타락하고 멸망하게 되자, [[태조(고려)|왕건]]의 [[고려]]는 초반에 선종 세력의 후원을 많이 받았음에도 정작 국가의 지원을 받는 호국불교 [[교종]]을 국가이념으로 삼아 선종을 박해하였는데, 귀족 지배층 입장에서는 전통을 중시하는 교종 쪽이 더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 고종 시기 대각국사 [[의천]]은 선종을 매우 증오하여 선종을 [[사문난적]]이라 표현하며 [[조선]] [[연산군]]의 파불에 가까울 정도로 박해를 가한다. 하지만 아무리 위에서 박해를 해도 대중의 지지는 선종쪽이 더 높았기 때문에 선종의 씨를 말리는것은 불가능했다. 이 교종과 선종의 대립은 [[12세기]] 후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숭유억불]] 방향으로 나가면서 왕실의 불교 지원이 크게 줄어들게 되고 이로 인하여 정통 [[교종]]이 몰락하면서 오히려 선종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한국사]]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도의선사(9산중 가지산파)에 의해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종 전체로 봤을 때 제일 먼저 들어온 시기는 서기 8세기 후반에 신행대사가 단계적 깨달음을 중시하는 북종선을 들여온 것이 최초다. (도의선사는 우리가 잘 아는 돈오=즉각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남종선을 들여왔다.) 선종이 들어오던 서기 820년대, 이 시기는 한국사의 3대 반란으로 칭해질 만큼 기세가 무시무시했던 그 유명한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던 시기고 그 규모는 신라 9주 중 4주를 점령할 만큼 막강했으나 상당히 빨리 진압된다. 거기다가 일부 주에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공로로 '''7년간 면세''', 이 단어를 강조하는 이유는 890년 이후에 일개 지방의 독립선언도 못 막는 상황과 너무 대비되기 때문이다.의 혜택을 주었을 정도다. 그 정도로 이 시기까지만 해도 신라 정부의 여력이 충분하고 권위도 있었기 때문에 민중들 입장에서도 권위에 의지하지 말라는 선종의 가르침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북종선은 말할 필요도 없이 더 주목받지 못했다. 때문에 도입되던 당시에는 선종이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라 말기인 서기 890년대 이후, 흔히 말하는 [[국가 막장·멸망 테크|국가 막장 테크]] 시기에 9산 선문이 [[소율희]] 등 몇몇 [[호족(한국사)|호족]]들의 지원을 받고 성장하면서 보편화되었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신라 정부는 선종과의 제휴를 시도했다. 이유는 선종을 통해서 떨어지는 권위를 다시 세우려고. 물론 호족의 지원이 더 커서 선종 측은 이를 거절했다. [[일본]]에는 [[남송]]을 통해 12세기경 유입되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간단하게 말해 원효대사의 정토종(법성종)보다도 파격적인 효과를 불러온다. 그 때문인지 ''''무식한' 호족과 [[무신정권]]기의 무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다만 이 표현은 조금 비약이긴 하다. 교종은 본래 문벌귀족 사회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무신정권으로 문벌귀족 사회가 무너지자 이들을 지원했으며 심지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때문에 [[최충헌]] 시기 [[지눌]]과 같은 승려가 무신정권의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고 한다. ]) || || {{{#fbe673 '''정치 체제'''}}} ||<-3>[[군주제]] → [[전제군주제]] || || {{{#fbe673 '''국가원수'''}}}[* 역대 한국 왕조 국가들 중에서 가장 많은 독자적인 군호를 가지고 있다.] ||<-3>{{{#!folding [ 펼치기 · 접기 ] [[한기#s-2|한기]][br][[간지#s-4.1|간지]][br][[거서간]][* 1대 [[박혁거세]] 또는 2대 [[남해#s-4|남해]]][br][[차차웅]][* 2대 [[남해#s-4|남해]]][br][[이사금]][* 3대 [[유리 이사금]] ~ 16대 [[흘해 이사금]]][br][[마립간]][* 17대 [[내물 마립간]] ~ 21대 [[소지#s-2.1|소지]]][br][[매금]][* [[광개토대왕릉비]], [[중원 고구려비]]에는 [[매금]](寐錦)이라는 왕호도 등장한다. 또한,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도 ‘[[법흥왕|모즉지매금왕]]’이란 표현이 등장한다.][br][[어라하|코니키시]][* [[가야멸망전]] 당시 신라 장군이 칼을 빼서 목을 치려고 하며 억지로 [[하카마]](褌)를 벗기고 이어서 엉덩이를 [[야마토]](日本)로 향하게 하고 "야마토(日本) 이쿠사노키미(將)는 내 엉덩이를 깨물어라!"라고 크게 부르짖게 하자(부르짖는다(叫)는 것은 울부짖으며 소리친다는 말이다) 곧 "신라 [[코니키시]](王)는 내 엉덩이를 먹어라!"라고 소리쳤다라고 [[일본서기]]에 적혀있다. 백제에서 쓰이던 '[[건길지]]'가 이와 관련이 있다.][br][[왕]][* 22대 [[지증왕]] ~ 56대 [[경순왕]]][* 다만 [[울진 봉평리 신라비]] 등의 [[금석문]]을 살펴볼 때, 법흥왕까지는 [[왕#s-1|왕]]과 [[마립간]](매금)이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br][[마립간|매금지존]][* 한자로는 寐錦之尊,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서 발췌. 모든 신라왕을 칭하는 것일 수도 있음.][br][[태왕]][br][[대왕]][br][[제왕]][br][[태왕]][br][[황제|황왕]][* '황왕'이라는 군주 칭호는 사서에는 나오지 않고 당시의 [[금석문]]에서 주로 확인된다. 진흥왕 순수비 등 금석문에서는 황왕 외에도 [[제왕]](帝王), [[태왕]](太王) 등의 칭호도 그 당시에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황제와 왕의 복합어로 [[외왕내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 || {{{#fbe673 '''주요 군주'''}}} ||<-3>{{{#!folding [ 펼치기 · 접기 ] [[혁거세 거서간]][br][[탈해 이사금]][br][[파사 이사금]][br][[미추 이사금]][br][[내물 마립간]][br][[눌지 마립간]][br][[지증왕]][br][[법흥왕]][br][[진흥왕]][br][[진평왕]][br][[선덕여왕]][br][[태종 무열왕]][br][[문무왕]][br][[신문왕]][br][[성덕왕]][br][[경덕왕]][br][[원성왕|열조 원성왕]][br][[흥덕왕]][br][[신덕왕]][br][[경애왕]][br][[경순왕]]}}} || || '''[[국성|{{{#fbe673 국성}}}]]''' ||<-3>[[박(성씨)|박(朴)]][* [[밀양 박씨]]] · [[경주 석씨|석(昔)]][* 경주(월성) 석씨] · [[경주 김씨|김(金)]][* 경주 김씨]|| || '''{{{#fbe673 역사}}}''' ||<-3>{{{#!folding [ 펼치기 · 접기 ] [[박혁거세]], [[건국]][br][[황산진구 전투]][br][[황산하 전투]][br][[포상팔국의 난]][br][[신라-왜 전쟁]][br][[신라-우산국 전투]][br][[독성산성 전투]][br][[나당전쟁]][br][[달벌 전투]][br][[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br][[가야멸망전]][br][[관산성 전투]][br][[아막성 전투]][br][[가잠성 전투]][br][[칠중성 전투]][br][[백제멸망전]][br][[북한산성 전투]][br][[평양성 전투(661년)|과천 전투]][br][[사천 전투]][br][[평양성 전투]][br][[석문 전투]][br][[매소성 전투]][br][[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br][[김헌창의 난]][br][[달벌대전]][br][[신라구|신라구의 일본 침입]][br][[비뇌성 전투]][br][[대야성 전투]][br][[후삼국시대]] 개막[br][[경순왕]]의 [[항복|투항]], 왕조 멸망 }}}|| || '''{{{#fbe673 현재 국가}}}''' ||<-3>[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br][include(틀:국기, 국명=북한)][br][include(틀:국기, 국명=중국)][* [[석문 전투]] 당시 요동점령.]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external/cineaste.co.kr/14010711162408_cd500eb86897c4e0324a540a3e6844cb.jpg|width=70%]] ||[[파일:/image/003/2007/07/18/NISI20070718_0004825592_web.jpg|width=100%]] || ||<:> {{{#000000 {{{-1 통일신라 시기 서라벌 상상도[* [[강]]([[해자]]) 위, [[숲]] 아래가 [[법궁]]인 [[경주 월성]]이다. 그 위쪽 일부는 [[북궁]]이다. 또한 시가지 중간중간에 지붕이 누런 집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금|황금]]을 [[기와]] 모양으로 만든 것을 올린 [[기와집]]인 [[금입택]]이다.]}}}}}} ||<:> {{{#000000 {{{-1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의 궁궐터 [[경주 월성|월성]][br]([[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16호)}}}}}} || '''신라'''(新羅)는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군주제 국가이다. 약 1천 년간 56명의 군주를 거치며 [[한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존속하여 '''천년왕국'''이라는 별명과 함께 화려한 황금 문화로도 알려져 있어 '''황금의 나라'''라고도 불린다. [[삼국시대]]의 세 [[고구려|나]][[백제|라]] 중 [[영남|동남쪽]]에서 시작[* 신라의 시초는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사로국]]이다.]했으며 《[[삼국사기]]》의 서술에 따르면 고대 한반도에 존재한 [[삼국]] 중 가장 빨리 건국됐다. [[삼국통일전쟁]] 끝에 [[백제]] 전역과 [[고구려]] 중남부[* [[패서]] 지역.]를 병합한 이후 [[삼국통일]] 의식을 바탕으로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지배했다. [[676년]] 이후의 [[남북국시대]]의 신라는 '''[[통일신라]]'''라고 불린다. [[나당전쟁]]에서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고 통일을 이룬 뒤로는 강력한 군사력과 해군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강국이자 부국으로 거듭나 [[청해진|남해와 동중국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불교의 급속한 발전에 힘입어 당대 아시아에서 [[당나라|중국]]과 더불어 가장 화려한 불교 문화를 꽃피운 바 있다. 옛날 신라의 경제적 풍요로움과 문화적 번성함은 멀리 [[서역]]까지 알려져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도 [[이상향]]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다가 9세기 말에 이르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나머지 다시 [[후삼국시대|후삼국]]으로 분열되었으며 종국에는 [[태조(고려)|왕건]]을 필두로 한 [[고구려부흥운동|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고려]]에 의해 병합되었다. 신라정통론(新羅正統論)적 입장에서는 신라의 [[삼한일통]] 사상을 이후 [[고려]] 왕조가 계승한 것이 훗날 [[한민족]] 의식으로 발달하였다고 보아 삼한일통 사상을 한민족의 의식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고려]] 왕조는 국가 공인 관찬사서인 《[[삼국사기]]》나 그에 준하는 《[[삼국유사]]》에서 신라가 과거 통일을 했었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신라의 삼국통일은 불완전, 고려의 후삼국 통일을 진정한 통일로 봤기 때문에 신라의 통일을 정통으로 봤다면 삼국사기 이후에 등장했어야 할 신라사를 따로 저술하진 않았다. 중국사의 관찬사서인 [[24서]]와 비교해보면 중국 삼국시대 및 이후에 대한 관찬사서는 [[삼국지]]에서 [[진서]]로 이어지는 구조인데, 여기서 [[조위]]만을 정통으로 보아 본기로 넣고 촉한과 동오는 세가로 넣었으며, 통일 왕조로서의 [[서진]]사를 따로 저술하였다. 이에 비해 고려는 삼국 모두를 정통으로 보아 본기로 저술, 직후 고려 왕조로 이어지게 서술하여 고려야말로 중국의 서진 왕조처럼 그 모두를 완전히 싹 다 통합한 진정한 정통 왕조라는 입장이었다.][* 다만 [[한민족]]의 정체성은 [[고구려부흥운동]]의 한 갈래였던 고려의 후삼국 통일로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신라가 아닌 고구려쪽에 가깝게 단일화되었다.] == 국호 == ||<-5><:>'''{{{#000 신라 국호}}}''' || ||<:>[[한국어]] ||||'''신라(新羅)'''[br]나라 이름의 의미는 '덕업일'''신''' 망'''라'''사방: 德業日'''新''' 網'''羅'''四方’에서 두 글자를 취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말 뜻은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wiki style="margin:1em"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群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br]([[지증왕]]) 4년 10월에 군신(群臣)이 말하기를, "[[박혁거세|시조]]께서 나라를 세운(創業) 이래로 나라 이름이 일정치 아니하여 [[사라]](斯羅), [[사로국|사로]](斯盧), [[신라]](新羅)라 하였으나, 신(臣)들은 생각건대 '신'(新)은 '''덕'''(德業)'''이 날마다 새로와져서''', '라'(羅)[* 어두에서는 두음 법칙에 따라 '나'이지만 둘째 음절 이하부터는 '라'로 발음.]는 '''동·서·남·북의 것들을 널리 받아들여 모두 포함한다'''는 의미이므로, 그것으로 국호(國號)를 삼는 것이 좋을 듯하오며, 또 생각건대 자고로 국가를 가진 이가 다 제왕(帝王)이라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가 건국한 지 지금 제22대에 이르도록 단지 방언(邦言)으로 칭하여 존호(尊號)를 정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 군신(群臣)은 한뜻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올리옵니다"고 하니, 왕이 거기에 좇았다.[br][br]{{{#!wiki style="text-align:right" [[김부식]], 《[[삼국사기]]》 4권 〈신라본기〉 제1 지증마립간}}}}}} 다만 '신라'라는 명칭 자체는 지증왕 때 뜻풀이하여 확정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고구려와 함께 '신라'가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 시기인 377년과 381년에 등장해 《[[자치통감]]》 등에 기록되어 있고, 당대 사료인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신라가 이미 등장하고 있다. >[[백제|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백제|백잔]]과 '''신라'''는 과거에 속민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 >---- >[[광개토왕릉비]], AD 414 건립 따라서 지증왕 시절의 의미 풀이는 원래 존재하던 고유어를 한자로 표기하려는 과정에서 음도 의미도 적절한 한자를 찾아서 [[유교]]적인 해석을 끼워 맞춘 것이며, 이전부터 사용되던 '신라'라는 이름을 유일한 공식 명칭으로 규정한 것으로 추정되며, [[지증왕]] 대에 국호를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사로국]], [[사라]] 등 다른 표기를 혼용했다.[br][br]신라 이전에 불렸던 이름들은 [[시라]](尸羅), [[사라]](斯羅), [[사로]](斯盧), [[시림]](始林), [[유계]](有鷄), [[계괴]](鷄怪), [[계림]], [[서야벌]](徐耶伐), [[서라벌]](徐羅伐), [[유잠국]](有蠶國) 등으로 불렸다. ㅅㄹ 계열의 고유어 국명을 음차한 것으로 보이는 표기가 주를 이루며, [[누에]]치기와 관련된 이름 또한 일부 존재한다. 일본에서 발견된 〈[[민정문서]]〉에서도 유달리 [[뽕나무]] 재배 수량이 많아 신라가 전통적으로 누에치기와 관련이 컸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닭]]에 관한 이름도 많은데 실제로 신라 [[건국]][[설화]]에는 [[계룡]]이 등장한다. 불교계 일부에서는 신라가 계(戒)를 나타내는 시라(Sila)에서, 서라벌을 부처님 당시 코살라국의 수도였던 슈라바스티(Sravasti)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의 특성상 어느것이 맞다 아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신라에 불교가 전래, 공인되는 [[눌지왕]], [[법흥왕]]대 한참 이전부터 신라와 통하는 사로, 사라 등의 이름이 쓰이기도 했고, 이병도나 환빠들이 자주 넘겨짚는 성운의 유사성을 가지고 하는 주장은 딱히 근거랄 게 없으며 억지스러운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근거라고 내미는 것이 도올 김용옥의 생각이다. [[계림]](鷄林)은 좁은 의미로는 [[경주시]]에 있는 작은 [[숲]] 이름이자, 넓게는 신라국 전체를 이르는 이름인데 사서에서는 제3대 [[탈해 이사금]]부터 계림을 정식 나라 이름으로 쓰다가 제15대 [[기림 이사금]]이 다시 신라로 되돌렸다고 되어있고, 이후 공식적으로 신라라는 국명이 정해진 뒤에도 계림은 신라라는 나라의 일종의 별칭으로 불렸는데,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별칭으로도 쓰였다.[* [[이순신]]은 계림 최고의 장수라는 식.] 신라의 또 다른 이름으로 걸의식국(乞衣食國)이 있다는 정보도 인터넷 상에서 많이 떠도는데 이는 중국의 기담집 《유양잡조(酉陽雜俎)》 〈방이 설화〉의 한 구절을 [[띄어쓰기]]가 없는 [[한문]]을 제대로 끊어 해석하지 않고 [[오역]]한 것이다. '(방이가) 옷과 음식을 빌어먹고 살았는데(乞衣食), 나라 사람들(國人) 중에 남는 땅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에서 걸의식과 바로 뒤에 나오는 국인의 국을 '걸의식국'이란 한 단어로 오역한 것이다.|| ||<:>[[중국어]]||||'''신뤄(Xīnluó)'''. 사로국은 '''쓰루(Sīlú).''' 현대 [[관화]] 기준이다.[* 신라 초기의 [[한나라]]에서 사용한 [[상고한어]]로는 s.tsʰi(n)rˤaj, 신라 후기의 [[당나라]]에서 사용한 [[중고한어]]로는 sinla로 발음했다. 한글로 비슷하게 표기하자면 각각 "ㅆ-씬라이" 및 "신-라" 정도. 공교롭게도 중고한어 발음은 [[자음동화]]가 없는 점만 빼면 현대 한국어 발음과 거의 일치한다.] || ||<:>[[일본어]]||||'''[[시라기]](しらぎ) 혹은 신라(しんら)'''[br][br]초기부터 일본과 거리가 가깝고 서로 많이 얽혔던 관계라 [[백제]]를 쿠다라로 읽는 것과 같이 신라를 읽는 법이 따로 존재한다. 시라기는 《[[일본서기]]》의 훈을 따른 것이다. 때론 しんら, 즉 한국어 독음과 유사한 '신라'로 읽기도 하는데 이건 한자 新羅를 현대 일본어식으로 음독한 것이다. 다만 한국어에서 신라를 읽을 때는 [[자음동화]] 현상으로 실제로는 저절로 '실라'라고 읽게 되지만, 일본어로 しんら를 읽을 때는 실라가 아닌 '신'라 그대로 읽는다. 신라에 대해서는 新羅라 적고, "シラギ(< シラキ)"(시라기/시라키)로 읽는데, 이건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신라의 본래 이름인 斯羅를 그대로 일본식으로 읽은 シラ에 キ(城의 뜻)를 더한 것이다. 일본 동양학의 토대를 놓은 학자인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キ(고대 일본어 독음 *kuy)를 백제어 '기(己)'의 차용어로 추정했다. 마쿠라고토바에서는 "栲衾新羅(タクフスマシラキ)"(타쿠후스마시라키)라고도 하는데, 이는 특산물인 종이의 원료 "닥(タク(타쿠))"과 "シラ"에서 연상되는 백색의 이미지가 이불(フスマ(후스마))과 연상되어 이루어진 명칭이다. || ||<:>[[아랍어]]||||'''알실라(Alshillaالسيلى)'''[*아랍어 정관사 ال(al)+سيلى(silla)의 합성일 경우, 아랍어의 음운변화에 따라 앗실라로 읽는게 맞다. 아랍어로 중국을 지칭하는 الصين (앗씬)같이 정관사+단어로 구성된 국명이 많은데, 신라도 이와 같은 가능성이 높다.]|| ||<:>[[페르시아어]]||||'''베실라(Beshilla), 바실라(Bashilla)'''[br][br]통일 신라 시기에는 [[아랍]]과 [[페르시아]] 사람들이 신라를 찾은 이후 아랍 문헌에선 신라의 국호가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페르시아]] 문헌에선 '베실라(Beshilla)' 등으로 표기됐다. 2010년 말 한국에 그 정체가 알려진, 신라에 관한 내용이 풍부한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 کوش نامه, Kush Nama)에선 신라의 국호가 '신라(Shilla)' 또는 '바실라'라고 나타난다. || ||<:>[[라틴어]]||'''SELLA'''[* 라틴어로 [[의자]]라는 뜻도 있다.] || ||<:>[[인도]]||'''구구탁예설라(矩矩托禮說羅)'''|| ||<:>[[튀르크어|고대 튀르크어]]||'''𐰱𐰇𐰞‎𐰍𐰠[br]쵤글(čölgl)'''[* 퀼 테긴 비, [[빌게 카간]] 비. 한국을 뜻하는 [[몽골어]] '솔롱고스'나 [[만주어]] '솔고/솔호'와 연관이 있으리라 보는 의견도 있다.] || == 연호 == [include(틀:한국사의 역대 연호)] 신라는 한반도에 존재한 나라들 중 독자적인 연호를 걸고 내린 기간이 가장 명확하게 확인된다. ||<-5><:>'''{{{#black 신라의 연호}}}''' || ||<:>[[건원]](建元)||[[법흥왕]] ~ [[진흥왕]] (536년 ~ 551년)|| ||<:>[[개국]](開國)||[[진흥왕]] (551년 ~ 567년)|| ||<:>[[대창(동음이의어)|대창]](大昌)||[[진흥왕]] (568년 ~ 572년)|| ||<:>[[홍제]](鴻濟)||[[진흥왕]] ~ [[진평왕]] (572년 ~ 583년)|| ||<:>[[건복]](建福)||[[진평왕]] ~ [[선덕여왕]] (583년 ~ 634년)|| ||<:>[[인평]](仁平)||[[선덕여왕]] ~ [[진덕여왕]] (634년 ~ 647년)|| ||<:>[[태화]](太和)||[[진덕여왕]] (647년 ~ 650년)|| == [[신라/역사|역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신라/역사)] == 정치 == 처음에는 3개 성을 가진 사람들이 교대로 국가를 통치했다. 박씨&석씨&김씨 이렇게 3개 성을 가진 사람들이 교대로 국가를 통치했지만, 최후에는 김씨가 독점을 하게 되었다. [[현대]] [[민주주의]]&[[자본주의]] 국가들처럼 백성들의 투표를 통해서 뽑힌 것은 당연히 아니고, 지들끼리 알아서 걍 한 것이다. 그래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 경제 == 처음에는 변방에서 시작한 나라답게 굉장히 열악했다. 하지만 신라는 복수의 칼날을 노리며 국력 증대에 온 힘을 썼고 마침내 강한 인내심을 발휘한 결과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중국과 다이렉트로 교역을 하게 됨으로써 성장해 나갔고 결국 삼국통일을 하게 된다. 까고 말하자면 신라의 경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 행정 == 현대 한반도의 지명들은 신라 [[경덕왕]] 대에 행정을 개혁하면서 지은 한자식 명칭[* [[조선]]의 수도인 ‘[[한양]]’이나(이 경우는 정식명칭은 [[한성]]이었다) [[고려]]의 수도인 ‘[[송악]]/[[개성시]]’, 그리고 [[동래]], [[대구광역시]], [[전주시]] 등 여러 지역 중심도시들이 대표적인 예이다.]을 토대로 한다. 다만 경덕왕의 한자식 지명은 신라 당대에는 행정개혁을 통한 왕권강화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진골귀족들의 반발로 제대로 쓰이지 못했고 후의 고려 왕조에 들어서 경덕왕이 만든 한자식 지명을 참조하여 새로 작성한 한자식 지명을 완전히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다. 당연히 이 또한 고려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한 행정개혁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중앙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지명을 통일함으로서 호족들에게 질서를 강요하고 행정을 통일하는 작업의 일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게, 경덕왕의 지명 개혁을 마치 이전에는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작업인 것처럼 착각해 신라중심주의적인 입장에서는 한반도의 지명은 경덕왕이 완전히 새로 창조한 것이며 후대에도 계승했으니 신라문화만이 남았다!라 여기고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경덕왕은 삼국의 전통을 소멸시킨 사대주의자(이에 따르면 기존 신라의 전통 또한 말살된 것이 된다)에 불과하다!라 여기기도 하는데 일단 이런 한자식 지명은 삼국시대에도 한자문화가 완숙해지며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고마나리(固麻那利)→웅진, 벌나→평양, 국내, 요동, 한성(황해도 재령군), 국원 등의 수많은 한자식 명칭.] 경덕왕 또한 무작위로 새로 창조하여 작명을 한 게 아니라 이전 삼국시대 지명의 뜻과 전통을 계승하여 한자화한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이미 중국 문화 도입을 통한 중앙집권화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고, 권력과 기존 전통을 유지하려 했던 기성 귀족들의 반발 또한 시시각각 터졌다는 건 기록으로도 많이 남아있다. 게다가 이런 개혁 및 교류로 인해 후기 삼국의 문화는 이미 무덤양식까지 같아질 정도로 서로 유사한 형태로 수렴 중이었고 따라서 경덕왕의 개혁은 완전히 새로운 신라중심주의적인 혹은 기존 전통을 깡그리 소멸시킨 독자적인 작업이 아닌 삼국시대부터 이미 진행되어 오던 중앙집권적 개혁의 전통을 계승한 것에 해당하며 종합적으로 보면 고려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 일련의 작업이 완성된 형태를 띠고 있다. === 중앙 행정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13부)] === 지방 행정구역 === [include(틀:한국 행정구역의 시대별 변천사)] 통일 신라 이전 시대의 행정 구역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데, 아직 신라의 영토가 [[경상도]] 일대에 머물러 있던 514년([[지증왕]]대)에 지금의 [[함안군]]에 아시촌소경을 설치하고, [[진흥왕]] 대 557년에는 [[충주]]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한 기록이 있는 등 [[주(행정구역)|주]], [[소경]]식의 행정구역 체계는 삼국 통일 이전에도 비슷하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삼한위치비정통합수정본.jpg|width=100%]]}}}|| ||<:> {{{#000000 {{{-1 ▲ [[1세기]]경의 추정 위치.[br](11)이 신라의 모체인 [[사로국]].}}}}}}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aroguk_200ad_map.jpg|width=100%]]}}}|| ||<:> {{{#000000 {{{-1 ▲ [[3세기]]경의 통치 영역}}}}}}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라의 지도 (진흥왕 시대).png|width=100%]]}}}|| ||<:> {{{#000000 {{{-1 ▲ [[6세기]]경의 통치 영역}}}}}}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통일 신라의 지방 행정 구역.jpg|width=100%]]}}}|| ||<:> {{{#000000 {{{-1 ▲ [[9세기]]경의 통치 영역과 하위 행정구역}}}}}} || [[통일신라]]의 [[행정구역]]은 [[9주 5소경]]으로 대표된다. [[9주 5소경]] 문서로.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후삼국시대의 지도.png|width=100%]]}}}|| ||<:> {{{#000000 {{{-1 ▲ [[10세기]]경([[후삼국시대]])의 통치 영역.[br]청록색이 신라이다.}}}}}} || == [[/사회|사회]] == [[신라/사회]] 문서로. == [[/문화|문화]] == [[신라/문화]] 문서로. == [[언어]] == [[신라어]] 문서로. [[현대]] [[한국어]]는 [[고대 한국어]]의 동남지역 방언인 [[신라어]]를 기반으로 발달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한 이후 [[고구려어]]와 [[백제어]]는 거의 소멸되어 [[신라어]]로 통합되었으며 [[고려]]의 영토는 [[통일신라]] 시기의 영토와 거의 동일했기 때문에 사실상 현대에 이르는 [[한국어]]는 [[신라어]]에 기반을 두었다고 보는 가설이다. 다만 현대에는 신라와 고려의 향가에서 나타나는 차이[* 고려시대에 기록된 [[서동요]]는 대격표지로 乙(을, ur)을 사용하는데 비해 이전 신라에서 기록된 향가에서는 肹(힐, gur)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이는 언어의 변화에 따른 차이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등의 역사적인 기록 및 [[유화부인]] 숭배, 5층 석탑 건립 등 이전 삼국시대 문화를 계승해온 흔적이 드러나는 후삼국 호족 문화의 삼국문화로부터의 연속성, 현대 한국어의 방언연속체가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는 점 등에 근거해 고대 한국어의 [[동남방언]]보단 중부지역 방언[* [[황해 방언]], [[경기 방언]]. [[충청 방언]]은 모두 방언연속체에 해당한다.]이 후의 [[표준어]]로 발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론 또한 제기되고 있다. 또한, 삼국어 자체가 예맥계의 언어이기에, 애초부터 삼국어 자체가 방언연속체였을 경우, 한반도 중부지역 방언이라는 것은 결국 고구려 유민들의 전통의 거주지인 개성 및 평양시 주변부 언어이기 때문에, 현대 한국어가 고구려어계 직계 또는, 고구려어와 통일신라어의 융합의 결과물이라는 반론 또한 강하게 존재한다. == 외교 == [include(틀:신라의 대외관계)] [[백제]] 와는 상쟁하면서 [[나제동맹]]을 맺기도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많은 전투가 있었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은 적도 있었다. 때론 국가의 이득을 위해 혈연이 맺어지기도 했다[* [[장수왕]] 즉위 이후 최전성기를 맞은 고구려라는 공통의 적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맺은 120년간의 [[나제동맹]] 기간에 있었다. 해당 문서로.]. 하지만 국가의 이익에 따라 나제 동맹도 결렬된다.([[관산성 전투]]) 이후에는 백제 멸망 시기까지 양국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고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하고 백제 영역과 인구는 고스란히 신라에 귀속된다. [[고구려]]와의 관계도 국가의 이득에 따라 동맹하거나 싸웠다. [[광개토대왕]] 시절,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에 의하면 왜의 공격에 5만의 군사로 신라를 구원하였고(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신라가 조공하였다고 한다(寐錦家僕句請朝貢) [[장수왕]] 대에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후 [[진흥왕]]이 반격에 나서 고구려의 남쪽 영토를 대거 빼앗기도 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고구려군에게 잦은 공격을 받기도 하는 등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삼국시대 말기까지도 [[무열왕]]은 고구려로 가서 [[연개소문]]을 찾아가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백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는 하지만 [[나당전쟁]]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 고구려 유민들 입장에서는 신라보다 당에 대한 적대감이 훨씬 더 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라와 손을 잡은 것이다. 물론 신라에 대한 반감도 상당히 컸을 것은 분명하다.] 이후 고구려인의 일부[* 주로 황해도, 강원도 지역민들과 여러 사유로 남하한 고구려인들]는 신라인에 포함되었다.[* 다만 백제인은 거의 대부분이 신라인이 된 반면 고구려인은 일부만이 신라인이 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발해]]와는 초반에 [[고왕]]이 신라 대아찬 벼슬을 받으면서 외교관계를 형성했고[* 단 대조영이 신라 벼슬을 받았다는 기록은 신라인인 [[최치원]]이 발해를 비하하는 글에만 나오는 내용이고 다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아 교차검증이 안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당나라에 의해 한때 상호 대립하기도 했지만 [[선왕]] 시기 남경 남해부를 통해 신라도가 연결된 이후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발해가 거란에 압박받을 때에는 신라와의 동맹을 추구하기도 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두 나라는 사이좋게 [[926년|9]][[935년|년]]의 시차를 두고 멸망했다. [[가야]]와는 초기부터 경쟁하는 관계였으나, [[금관국]]을 멸망시킨 후 [[구형왕]] 가문을 진골로 편입시켰다. 이후 중심을 잃은 가야의 소국들은 신라에 각개격파당하면서 흡수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tudy.zumst.com/%EC%8B%A0%EB%9D%BC%EC%9D%98%EB%8C%80%EC%99%B8%EA%B4%80%EA%B3%84.png]]}}}|| [[중국]]과의 관계는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조공]]이라는 교류를 하였으나 초기에는 한반도 동남부라는 지리적 위치상 한반도 서해의 중국과 직접 교역은 불가능해 많은 교류는 어려웠던 걸로 보인다. 그러다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서해]]안에 영토가 닿게 되면서 항구 도시 당항성을 통해 직접 교류가 가능해졌고, 고구려와 백제에게 남북으로 협공당하게 되자 [[수나라]], [[당나라]]와의 교류가 수월해졌다. 한때 [[나당전쟁]]으로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이후 회복되었고, [[통일신라시대]]에도 신라의 인재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고 [[신라방]], [[신라원]] 등이 생기면서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숙위 학생단이라는 유학생단을 만들어 10년 정도의 기간씩 교대로 유학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한때 그 숫자가 105명에 이르기도 했으며 일부는 [[빈공과]]라는 당나라의 과거 시험에 응시해 당나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귀국해 신라에서 관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당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에서 5대 10국 시대가 개막하며, 한반도에서는 태봉과 후백제가 신라에서 갈라져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어 한강 유역과 서해안을 상실한 이후에도 신라는 후당 등 중국의 5대 10국 국가들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멸망 직전에도 중국과 교류했다. [[일본]]과 거리가 가장 가까운 [[영남]] 지역에 위치한 신라였지만 왜국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왜국은 신라보다는 백제, 가야와의 친밀한 관계를 삼국시대 거의 내내 유지했으며, 때로는 백제-가야-왜가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고, 심지어 신라와 백제가 손 잡은 [[나제동맹]] 때도 왜는 '친구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신라를 공격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초기부터 많은 침략을 받았다. 《[[삼국사기]]》 기록에서만도 [[박혁거세]] 시대부터 수십 번 쳐들어오고, 신라도 말기의 [[신라구]]를 제외하면 직접 왜를 침략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527년 [[규슈]] 북부의 유력자 [[이와이의 난|이와이(磐井)에게 왜군의 신라 침공을 저지하도록 포섭한 일]]이나, 신라 원정군을 꾸리던 일본 왕자에 대한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 [[유례 이사금]] 시기에 신라가 왜국의 [[오사카]]까지 침공했다는 일본측 기록 등 기타 일본측 사서에서 신라가 일본을 침공했다는 기록들도 많이 나오는 등 신라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더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로.)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는 백제를 하나의 번국으로 보았고[* [[일본서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과장되고 왜곡된 내용이 많다.](반면에 백제는 왜를 자신들의 번국으로 보았다.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칠지도]] 명문)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도 신라를 공격하고, 후속 공격을 준비하기도 했으나([[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문서로.)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이후에는 신라와도 교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통일신라]] 때도 신라와 일본은 아주 사이가 나쁜 시기와 그나마 괜찮던 시기가 있었는데, 양국 모두 자존심이 무척 강해서 대체로 서로 상대방이 오만하며 무례하다고 비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신라와 일본의 사이가 단순히 좋지 않았다는 편견과 달리, 이전 백제 때 만큼은 아니지만 이후 시대인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비해서는 양국간 교류량은 훨씬 많은 편이었다. 특히 일본의 우방이던 백제가 사라진 [[통일신라]]로 들어서는 상황이 변하게 된다. [[나당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선 후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일본 역시 백제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며 다음에는 나당연합군이 일본에 쳐들어올 것을 염려해 얼마 전까지 싸웠던 신라와 전격 화친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왜전(倭典)이라는 일본 외교사신 접객을 담당하는 관청을 따로 두어 체계적으로 대일관계를 관리했다. 훗날의 [[조선 통신사]] 파견이 조선 후기 200여 년간 고작 9회에 불과했지만,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신라 때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670년부터 779년까지 1세기 동안 일본으로 사신단이 39차례나 파견됐고, 동시기 일본 사신단도 신라를 25차례나 방문했다. 사신단의 규모에 있어서도 성덕왕 2년(703년)에 204명의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까지 감안했을 때 1회에 300~500명을 파견한 조선 통신사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8세기 중후반으로 가면서 일본의 자존 의식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자국을 상국으로 모실 것을 신라에 요구하는 형식적 외교 관례에 집착했고, 이러면 신라도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내고 개무시하면서 차츰 정부간 교류가 줄어들게 되는데 그래도 [[장보고]]로 대표되는 사무역이나 민간 교류는 9세기에도 꽤 많았다. [[이웃나라/안 좋은 사이|다만 활발한 교역량과는 별개로 왕실과 백성들은 서로에게 그리 좋은 감정을 갖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apture+_2018-03-28-07-44-36-1.png|width=700]]}}}|| [[통일신라시대]]에는 [[중동]] 지역과도 교류가 있어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기록에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베실라'(Beshilla) 등의 이름으로 중동과 유럽 지역에 소개되었다. 위 지도는 [[https://en.wikipedia.org/wiki/Muhammad_al-Idrisi#/media/File:TabulaRogeriana_upside-down.jpg|'<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인데, [[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시칠리아 왕국]] 노르만 왕조의 [[루지에로 2세]]의 지원하에 제작했다. '''한국이 포함된 최초의 세계지도'''로, 참고로 원본은 남쪽이 위로 가게 만들어서 신라가 좌측 끝에 있다. 다만 신라가 [[섬나라]]로 묘사된 오류가 있는데, 멀리서 한국에 오는 사람들은 바다를 항해해 [[동중국해]]에서 올라와 한국에 상륙했기 때문에 한국의 북쪽으로 가 볼 일이 없어 섬나라로 오해한 것이다. 수백 년 뒤 조선을 표시한 유럽 세계지도에서도 조선을 섬나라로 잘못 그린 지도가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https://www.dh-jac.net/db/maps/results-big.php?-format=resultsp.htm&-max=300&enter=cortazzi&singleskip=3&skip=0|1636년작인 테세이라의 <일본전도>]]에서도 한반도가 섬나라로 잘못 그려져 있다. 중동인들의 기록에서는 대체로 신라가 [[이상향]]마냥 살기 좋은 곳으로 기록했고, [[이라크]] 지역 사람들 몇십명이 신라에 정착해 있었다고 기록했다.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에 소장 중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의 기록에 따르면 752년에는 아랍 상인단이 신라 사신단을 따라서 [[일본]]까지 갔다오기도 했다. 일부 [[중동]]인들은 신라에 정착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용]]을 이 예로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경주시에서 특이한 유리구슬들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경주 황남동 상감 유리구슬, 식리총 상감 유리구슬, 경주 노서리 상감 유리구슬이 그것이다. 영국 런던 고고학연구소의 제임스 랭턴 박사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지역의 고대 펠랑기 구슬과 동일한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적어도 4세기 이전부터 신라인들이 인도네시아 자바 섬 주민들과 직접 교류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그 외에 당나라의 의정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신라 승려 2명이 인도에 가기 위해 배를 타고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을 거쳐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인도네시아에 있었던 스리비자야 왕국을 말하는 것으로, 인도로 오가는 구법순례의 중간 거점으로 인도네시아와 교류가 있었던 근거가 되고 있다.한국에서 베트남에 대해 기록한 최초 사례는 신라의 문인 최치원의 882년 저작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이다. 《계원필경》의 일부이며, 당시 베트남 역사에 대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신라 승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여행기를 남겼는데 이는 지금도 남아있으며, 기록이 부족한 당시 인도-중앙아시아의 정세를 기록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여행기를 남긴 혜초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신라 승려들이 인도를 오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당나라의 의정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아리야발마 법사, 혜업 법사, 현태 법사, 현각 법사, 혜륜 선사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두 사람까지 일곱 명의 신라 승려가 인도에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현태법사는 중앙아시아 루트를 선택한 혜초와 달리 650년에서 656년 사이에 티베트와 히말라야 산맥, 네팔을 거쳐서 육로로 인도에 갔고, 반면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승려는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를 지나 해로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신라인의 인도 구법순례는 비록 기록이 부족해 완전한 복원은 어렵지만, 이렇게 여러 경로가 개척될 정도로 일회성이 아닌 꾸준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시기엔 이란의 전신인 사산조 페르시아와 무역으로 교류가 있었으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서도 혜초가 파사국(波斯國)도 갔다 왔음이 언급되는데 파사국은 페르시아를 음차한 것이다. 반대로 훗날 이란계가 관료층으로 자리잡은 중동, 이슬람의 세계지도나 지리서에선 신라가 언급되며 신라에 정착한 이란인들도 있었다. 또한 중세 이란의 서사시 샤나메에서는 판타지가 가미된 픽션이지만 신라가 '바실라'라는 이름으로 언급되고 극중의 무대가 되기도하며 주인공인 파리둔은 페르시아-신라 혼혈이기도 하는 등 상당히 우호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원성왕릉의 호인석과 처용역시 당시 이주한 이란인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삼국시대]]의 경우, [[태봉]]은 신라와는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와 같았다.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칭하며, 우호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적개심을 드러냈다.[* 어떤 국내 모 포털 사이트의 네티즌은 후백제의 견훤이 아니라 태봉의 궁예가 왕건의 쿠데타로 몰락하지 않고 신라를 침략했으면 신라 침공 후 경순왕만 세워놓고 괴뢰국화하는 선에서 그친 견훤과 달리 무력으로 멸망시킨 다음 태봉 영토로 강제 병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백제]]는 태봉에 비하면 신라 눈치를 보는 시늉은 했지만[* 892년에 사실상 왕이 되었지만 '''신라 서면 도통 지휘 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 전주 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 개국 공식 읍 이천호'''라는 형식상 신라의 신하로 깔고 들어가는 칭호를 자처했다. 백제 왕 칭호는 8년 뒤엔 900년부터다.] 역시 후백제의 창업자인 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그렇게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후백제도 신라를 침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하기까지 했다. 반면 태봉국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즉위한 [[왕건]]의 [[고려]]는 궁예와는 상반되는 친신라 정책을 펼쳤으며, 동시기에 존재한 후백제보다는 고려 쪽에 신라가 의탁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중국과 조공을 하였는데 [[5대 10국]] 중 [[후당]]과 주로 조공을 하였다. == 군사 == [include(틀:역대 한국의 군사조직)]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라 갑옷과 투구.pn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라 말머리 가리개.png|width=100%]]}}}|| ||<-2> {{{#000,#fff {{{-1 신라 초의 갑옷과 말머리 가리개.}}}}}} || 신라는 초기에 6부(部)의 장정을 징발하여 편성한 6부병(六部兵) 제도로 운용되었다. 기록을 봐도 무슨 일이 있으면 총사령관인 국왕이라도 6부병 부하 지휘관들의 의견을 무시하지 못했는데 이는 신라왕이 다른 부 수장들의 대표였지 그들 모두의 위에 초월적으로 서는 위상은 아니었던 게 이유다. 하지만 나물 마립간 때부터 슬슬 신라왕이 다른 부 수장들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찍어눌러서 씹어버리고 독자적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승리를 거두는 사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나물 ~ 소지 마립간 때까지 신라 임금들이 걸핏하면 딴지를 걸어대는 진골들에게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기 위해 오늘날 경북 서남부, 충북 남부 추풍령 일대를 왕실 직할령으로 키우면서 그 일대에서 진골들과는 무관한 정예 부대를 육성한 게 이유다. 이후로 지증왕 때부터 등장하는 습보계 왕가는 눌지계 왕실에게서 승계한 추풍령에 더해 고구려에게서 수복한 '고구려 고지'인 경북 북동부 조령 일대을 또 하나의 직할지 비슷한 영역으로 확보하고, 이를 통해 옛 6부병 체제의 유산을 청산해낸다. 국력이 급속도로 팽창하는 시점인 [[진흥왕]] 때부터 늘어난 영토의 방위 목적 등으로 군사 편제가 큰 변화를 겪게 되며, 초기 6부 체제는 6정의 6개 군단 편제로 바뀌게 된다. 나중에 이 지방군 체제는 더 증편되어 진평왕 때에는 10정(停)으로 바뀐다. 지방 체제의 군단 편제 외에도 중앙군도 개편에 맞추어서 서당(誓幢: 583년), 낭당(郞幢: 625년)이란 부대로 개편되었고 왕궁 수비대인 시위부(侍衛府: 624년)도 창설되게 된다.[[http://tip.daum.net/openknow/38855872|관련 정보]] 이러한 개편은 결국 신라가 그간 수천 단위로 동원되던 수준의 원정 능력에서 10,000 단위 이상의 동원 능력을 보이는 계기가 되며 삼국 전쟁 말기 고구려 원정, 그리고 이후 [[달벌대전]] 때에는 10만 단위의 대군을 동원하기도 한다. 또한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봐도 참으로 특이한 편제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진흥왕 이래로 서라벌 방어 부대 편제와 서라벌 왕궁 방어 체제를 완전 분리한 것이었다. 서라벌 방어 정예 부대는 당연히 서라벌 거주 왕경인들을 위주로 편성되었는데, '''기이하게도 서라벌 왕궁 근위대는 지휘관이든 병사든 서라벌인들은 아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 근위대는 앞서 신라 왕실이 진골들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척한 추풍령과 조령 등에서 자원 입대를 받았으며, 왕궁 근위대장 자리는 아예 진골은 임명되지 못하게 하여 왕궁 내 무력 집단에 서라벌 거주 진골이나 6두품 등이 진입하는 건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이는 이미 진흥왕 때부터 진골 집단이 골품제의 한계를 벗어나 광범위한 개혁을 추구하는 왕실에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었던 것을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는 비슷한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고대 원수정 로마의 최측근 왕궁 경비대원은 전원 게르만인이었고, 동로마도 최측근 경비대원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치역학과 무관한 노르만인 바랑기였다. 하지만 신라 왕실이 뿌리가 같고 평소에는 왕실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던 진골을 왕궁 경비에서 제외한 것이 특이해보인다는 것이다. 신라 왕실이 전성기 때부터 진골의 위험성을 인지한 것이다.] 군복무 기간은 삼국사기에 실린 [[가실]] 열전에 의하면 3년인 듯 하지만, 워낙 전쟁이 많았던 [[난세]]인 삼국시대다보니 한없이 연장되는 일이 많았던 듯 하다. 가실은 6년이 지나서야 결혼을 약속했던 설씨녀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일본과 워낙 전쟁이 자주 일어나다보니 군복무도 혹독했는지 6년만에 나타난 가실은 너무 초췌해져 처음엔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장 [[삼년산성]]을 비롯해,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막기 위해 수많은 [[산성]]을 쌓았는데 가실 같이 병역의 의무를 짊어진 장정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나당전쟁]]을 마지막으로 [[통일신라]]부터는 한반도에서 큰 전쟁이 수백년간 거의 없는 평화기가 찾아오게 된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전국을 옛 고구려 지역 3주, 옛 백제 지역 3주, 원래 신라였던 지역 3주인 [[9주 5소경]]으로 편제하고 국왕 직속으로 수도에 출신별로 아홉 개 서당(誓幢) 부대, 그리고 지방 각 주에 하나씩 정(停) 부대를, 단 전방지역인 [[한주]]만 2개 부대씩 해서 9서당 10정 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각 주마다 만보당 2개 부대를 각각 배치해 지방을 방어하였다. 이들은 현대의 [[부대마크]]처럼, 부대별로 옷깃(衿) 색깔을 다르게 해서 구분했다. * 신라 중앙군 || '''부대명칭''' || '''출신지''' || '''창설 시기''' || ||{{{#8b00ff 녹금서당(綠衿誓幢)}}} ||<|3>신라 ||583(서당) || ||{{{#00cc00 자금서당(紫衿誓幢)}}} ||625(낭당) || ||{{{#0000ff 비금서당(緋衿誓幢)}}} ||672(장창당) || ||{{{#0000ff 백금서당(白衿誓幢)}}} ||<|2>[[백제]] || ||{{{#ffffff 청금서당(靑衿誓幢)}}} || ||{{{#ff0000 황금서당(黃衿誓幢)}}} ||[[고구려]] || ||{{{#ffcc00 벽금서당(碧衿誓幢)}}} ||<|2>[[보덕국]](고구려계) || ||{{{#404040 적금서당(赤衿誓幢)}}} || ||{{{#ff0000 흑금서당(黑衿誓幢)}}} ||[[말갈]]([[예맥]]계 [[위말갈]]) || * 신라 지방군 || '''주둔한 주'''[* 색상은 전주를 제외한 해당 주의 만보당 부대의 상징색이다.] || '''10정 부대명'''[* 색상은 해당 부대의 옷깃 상징색이다.] || '''부대 주둔지의 현재 지명''' || ||<|2>[[한주|{{{#404040 한}}}{{{#00cc00 주}}}]]|| 남천정(南川停) ||[[경기도]] [[이천시]]|| ||{{{#ff0000 골내근정(骨乃斤停)}}} ||[[경기도]] [[여주시]]|| ||[[삭주|{{{#00cc00 삭}}}{{{#ffffff 주}}}]]|| 벌력천정(伐力川停) ||[[강원도]] [[홍천군]]|| ||[[명주|{{{#404040 명}}}{{{#ff0000 주}}}]]||{{{#8b00ff 이화혜정(伊火兮停)}}} ||[[경상북도]] [[청송군]]|| ||[[웅주|{{{#8b00ff 웅}}}{{{#0000ff 주}}}]]|| 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 ||[[충청남도]] [[청양군]]|| ||[[완산주|전주]]||{{{#ffffff 거사물정(居斯勿停)}}} ||[[전라북도]] [[임실군]]|| ||[[무주|{{{#ff0000 무}}}{{{#ffcc00 주}}}]]||{{{#ff0000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 ||[[전라남도]] [[나주시]]|| ||[[상주|{{{#ffcc00 상}}}{{{#8b00ff 주}}}]]|| 음리화정(音里火停) ||[[경상북도]] [[상주시]]|| ||[[강주|{{{#ffcc00 강}}}{{{#00cc00 주}}}]]|| 소삼정(召參停) ||[[경상남도]] [[함안군]]|| ||[[양주|{{{#0000ff 양}}}{{{#ffffff 주}}}]]|| 삼량화정(三良火停) ||[[대구광역시]] [[달성군]]|| 신라군은 보병 위주의 군대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말을 목축화하는데 어려운 지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백제와 유사하게 보병 중심이었으나, 이후 [[나당전쟁]] 때 당나라의 유목민 출신 기병대를 상대하기 위해, 말 그대로 [[장창]]을 주 무기로 하는 장창당(長槍幢) 부대를 따로 구성해 운용하기도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주 쪽샘지구 C10호분 신라 마갑1.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WLhYVvwkh0c)]}}}|| ||<-2> {{{#000,#fff {{{-1 [[경주 쪽샘지구 C10호분 신라 마갑]]과 신라 [[중장기병]] 복원도.}}}}}} || 기병의 전체적 비중은 적었지만 소수의 정예 기마병을 육성했고, [[경주시]]와 인근 [[가야]] 지역인 [[함안군]]에서 상태가 좋은 마갑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탑승자와 말 전체를 갑옷으로 감싸는 [[중장기병]]을 운용했음이 유물로 밝혀졌다. 갑옷은 고구려의 영향 전에는 [[판갑]](板甲)을 주력으로 운용했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구원 이후 고구려의 영향으로 [[찰갑]](札甲) 운용이 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구진천]]의 [[천보노]]라는 우수한 [[쇠뇌]], 그리고 거점 수비에 쇠뇌를 사용하는 노사(弩士)를 몇천명씩 배치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조선시대부터는 쇠뇌보다는 [[국궁]]을[* [[총기]]가 들어오는 이후에는 [[화승총]]] 주력으로 사용했던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화랑]] / 낭도 제도를 운용한 것도 특징. 대체적으로 고급 장교 - 하급 장교 / 부사관 급 인사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보는 편이다. 신라의 [[군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의 휘직은 띠를 푸르거나 붉거나 하는 등의 색깔로 구분하였고 모양은 반달의 형상을 취하였다. 계(罽) 또한 옷에 다는 것인데 그 길이의 길고 짦음에 대한 제도는 분명하지 않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850&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해당 링크]]. 이러한 신라의 군제는 통일기에 격변을 거쳤고, 통일한 이후 경덕왕에 의해 한차례 더욱 정밀한 군제 개편을 거치게 된다. 경덕왕의 군제 개편으로 구서당은 완전 해체되었고[* 다만 이는 구서당을 통해 흡수했던 고구려, 백제, 말갈인들을 더욱 차별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시기가 되면 적어도 서라벌에 살았던 이들은 왕경인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아서인지 조상이 고구려인이든 백제인이든 말갈인이든 완전히 신라인으로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구서당 부대를 유지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서라벌 방어 부대는 육기정 부대로 제개편되어 서라벌로 향하는 여섯 경로를 방어하도록 구체적인 임무를 받았으며, 일본이 침공해올 가능성에 대비해 부산으로부터 경주 방어선을 구축했다. 위에서 상술한 정예 쇠뇌부대들도 물론 그 방면에 배치되었다. 또한 발해나 여진을 대비해 동북방 국경 부대도 대폭 확충되었고 전면적인 요새 정비 사업도 행해졌다. 태봉과 고려가 생각보다 여진족이 북쪽으로부터 내리누르는 압력에 고생한 편인데, 경덕왕의 이런 군제 개편에 아주 덕을 많이 보았음은 물론이다. 자세한 부분은 [[경덕왕]] 문서로. 이후 [[김헌창의 난]]을 거치면서 신라의 지방군 동원 체제가 생각보다 취약하고, 옛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게 확인되자 이번에는 [[헌덕왕]] 때부터 종심 방어선 체제 구축이 시작되어 [[헌강왕]] 때 끝을 본다. 통일신라의 중후기에 행해진 신라 임금들의 주도면밀한 군제 개편 작업 및 축성 작업 등은 [[후삼국시대]] 때도 후삼국의 쟁패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경덕왕]], [[헌강왕]] 문서로. 신라 [[수군]]의 활약상은 [[우산국 정벌]], [[기벌포 전투]] 등 다방면에서 전하지만 수군의 편제에 대해서는 육군에 비해서도 기록이 훨씬 부족하다. 삼국사기의 본기와 직관지를 참조하면, 신라 초기에는 오늘날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부(兵部)가 선박에 관한 일을 맡았는데 [[문무왕]] 18년(678) 선박 업무를 전담하는 선부(船府)를 설치했다. 660년 백제 침공 당시 기록을 토대로 [[당항성]]에 소속된 신라 [[황해]] 함대가 100척에 6,500여명 규모일 것으로 이상훈 교수는 추산했다. 이들은 병선(兵船), 대선(大舩), 거함(巨艦)으로 표현되고 있어 당시 동아시아 기준으로도 규모가 큰 전투함으로 볼 수 있으며,[* 이 100척을 당 수군에 대한 보급선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 삼국사기에서 비전투함은 조선(漕船, [[수송선]]) 등으로 불러 전투함과 구분해 기록했기 때문에 이상훈 교수는 전투함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황산벌 전투]]에 참여한 신라 육군과 별개로 당나라 수군과 오늘날의 경기도 앞바다에서 합류해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 [[금강]] 하구에서 백제 수비군을 물리친 후 백제 수도 [[사비성]]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신라에서도 시기별로 수군의 규모나 편제가 달랐을테고, 신라 국토 구조를 보면 신라 수군의 주력은 [[남해]]와 [[동해]]에 배치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 황해 함대 기록만으로 신라 수군을 완전히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신라/평가|평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신라/평가)] == 외국사서의 기록 == [include(틀:양서)] [include(틀:수서)] [include(틀:남사)] [include(틀:북사)]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include(틀:구오대사)] [include(틀:신오대사)] >《북서》<열전>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 <辰韓>亦曰<秦韓>. 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 <馬韓>割其東界居之, 以<秦>人, 故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 有似中國人,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不與<馬韓>同. 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傳, <辰韓>不得自立王, 明其流移之人故也. 恒爲<馬韓>所制. <辰韓>之始, 有六國, 稍分爲十二, <新羅>則其一也. 或稱魏將毋校勘 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 其人雜校勘 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諸本 「雜」 訛作 「辯」, 據隋書卷八一新羅傳改. 兼有沃沮註 ·不耐註 ·韓註 ·濊註 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校勘 ,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焉. 傳世三十, 至<眞平>.《隋書》作[傳祚至<金眞平>]. 按《通典》卷一八五《新羅傳》云[其王姓<金>名<眞平>],  引《隋東蕃風俗記》云:[<金>姓相承, 三十餘葉.] 這裏[眞平]上當脫[金]字. 以<隋><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文帝>拜<眞平>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신라'는 근본이 '진한'의 종자이다. 땅은 '고려'의 동남쪽에 있고, '한나라'때의 '낙랑'땅에 거한다. '진한'의 역시 '진한'이라고도 한다. 전하는 말로 '진'나라때에 사역을 피하여 온 사람이라고 하니,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나누어 거하게 하였다. '진'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고로 '진한'이라고 하였다.그 말로 물건의 이름이 중국인과 유사하니 나라의 이름을 나라 하고, 궁을 호라 하고, 적을 구라하고 주를 상이라고 상을 도라고 하니 '마한'과 같지 않다. 또한 '진한'의 왕은 항시 '마한'사람이 하는데, 대대로 전하여 '진한'은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없어, 밝혀 유이민이기 때문이다. 항상 '마한'의 제도를 따랐다. '진한'의 처음에 육국이 있었는데, 점점 나누어져 십이국이 되고, '신라'는 그중의 하나였다. 혹 칭하길 '위'의 장수 '관구검'이 '고려'를 쳐서 이를 깨뜨렸는데, '옥저'로 도망해서, 나중에 옛날의 나라로 돌아 왔다. 남는 자가 있어서 '신라'를 이루었다 하니, 역시 '사로'라 불리었다. 그 사람들은 '중국'과 '고려', '백제'와 섞여있는데, '옥저', '불내', '한', '예'의 땅에도 겸하여 있다. 그 왕은 본래 '백제'사람으로 바다로 도망하여 '신라'로 들어가 그나라에서 왕을 하였다. 처음 '백제'에 의지해 있었는데, '백제'가 '고려'를 정벌할 때, 혹독한 사역을 견디지 못하여, 후에 돌아와 강성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백제'를 엄습하고, '가야국'에 의지하였다. 삼십세를 전하여 '진평'에 이르렀는데, '수' '개황'십사년이다.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문제'가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하였다. >其官有十七等: 一曰伊罰干, 貴如相國, 次伊尺干, 次迎干, 次破彌干, 次大阿尺干, 次阿尺干, 次乙吉干, 次沙 干, 次及伏干, 次大奈摩干,《通典》[干] 作[于], 未知孰是. 又《梁書》云:[其官名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目旱支.] 與此不同. 次奈摩, 次大舍, 次小舍, 次吉士, 次大烏, 次小烏, 次造位. 外有郡縣. 其文字·甲兵, 同於中國. 選人壯健者悉入軍, 烽·戌·邏俱有屯營部伍.諸本及《隋書》[營]作[管].《通典》作[營], 是, 今據改. 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同. 每月旦相賀, 王設宴會, 班賚 官. 其日, 拜日月神主. 八月十五日設樂, 令官人射, 賞以馬·布.《隋書》[每]下有[正]字, [主]字作[至]. 按《隋書》是說正月元旦相賀, 拜日月神; 至八月十五日, 又設樂競射.《北史》疑是脫訛. 其有大事, 則聚官詳議定之. 服色尙 素.《隋書》無[ ]字. 按 則不素, 疑是衍文. 婦人 髮繞頸,《隋書》[頸]作[頭], 是. 此形似致誤. 以雜綵及珠爲飾. 婚嫁禮唯酒食而已, 輕重隨貧富. 新婦之夕, 女先拜舅姑, 次卽拜大兄·夫.《隋書》無[大兄]二字,《通志》卷一九四《新羅傳》作[次拜大兄, 次拜夫]. 死有棺 , 葬送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居服一年. 田甚良沃, 水陸兼種. 其五穀·果菜·鳥獸·物産, 略與華同. >관직은 17품으로, 일은 이벌간으로 중국의 귀와 같고, 다음은 이척간 다음은 영간, 다음은 파미간, 대아척간, 아척간, 을길간, 사돌간, 급복간, 대나마간, 나마, 대사, 소사, 길사, 대오, 소오, 조위 순이다. 밖으로 군현이 있고, 문자와 갑병은 중국과 같다. 건장한 사람을 가리고 군사로 뽑는데, 봉, 술, 라로 함께 영, 부, 오로 진을 친다. 풍속과 형벌, 정치, 의복은 '고려', '백제'와 같다. 매달 아침마다 하례하며 왕이 연회를 배풀면서 무리에 관직을 하사한다. 그날에 태양과 달의 신에게 절한다. 8월 15일은 풍류를 베푸는데, 관인이 활을 쏘아 상으로 말과 포를 내린다. 큰 일이 있으면, 벼슬아치들이 모여 의논하여 정한다. 옷색깔로 흰색을 숭상하고, 부인들은 머리를 땋아 목에 두르며, 비단과 구슬을 섞어 꾸민다. 결혼의 예는 술과 음식으로 하고, 빈부로써 경중을 따른다. 신부는 저녁에 가서, 여자가 먼저 시아비와 시어미에게 절하고 다음으로 대형과 지아비에게 절한다. 죽은 자에게는 관이 있고, 장사 지냄에 봉분을 쌓는다. 왕에서부터 부모, 처자의 상까지 1년간 복을 입는다. 밭은 물대기가 좋아서 물과 육지의 씨를 겸할수 있다. 오곡과 과채, 조수과 물산은 중국과 같다. ><大業>以來, 歲遣朝貢. <新羅>地多山險, 雖與<百濟>構隙, <百濟>亦不能圖之也. >대업'때에 왔는데, 해마다 조공하였다. '신라'의 땅은 산이 많고 험하고, '백제'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백제'도 능히 제도할 수 없었다. == 시기 구분 == 한국사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특히 신라는 국가 존속 기간이 1,200여 년[* 보통 나라가 길어봐야 600~700년 존속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긴 기간동안 존재했다. 존속 기간이 가장 비슷한 나라를 꼽자면 [[카넴-보르누 제국|이 녀석]].]이나 되기 때문에, 시기별로 나라 체제의 차이가 커서 여러가지 시기 구분이 있어 왔다. 옛날부터 사용되던 구분 방식으로는 《[[삼국사기]]》의 구분대로 상대, 중대, 하대로 구분하는 방법과 《[[삼국유사]]》의 구분대로 상고, 중고, 하고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유학자]] [[김부식]]이 주도해 집필한 책인만큼 왕의 혈통을 기준([[성골]] → [[태종 무열왕]]계 [[진골]] → [[내물왕]]계 진골)으로 했는데, 상대는 [[혁거세 거서간]] ~ [[진덕여왕]], 중대는 [[태종 무열왕]] ~ [[혜공왕]], 하대는 [[선덕왕]] ~ [[경순왕]]이다. 상대는 통일 이전, 중대는 왕권이 강했던 전성기, 하대는 쇠퇴기와 대강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지금도 많이 사용되는 구분이다.[* 물론 세세하게 따지면 중대에도 너무 어린 왕이 즉위해 정국을 주도하지 못했고, 반대로 하대 초기의 원성왕 ~ 헌덕왕처럼 개혁 정치를 통해 강한 전제 왕권을 추구했기에 도식화가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후자는 [[승려]] [[일연]]의 구분답게 [[불교]]와 연관됐는데, 불교 수용 이전([[고유어]] 왕호) → 불교식 왕호 사용 → 중국식(유교식) 왕호 사용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상고는 [[혁거세 거서간]] ~ [[지증왕]], 중고는 [[법흥왕]] ~ [[진덕여왕]], 하고는 [[태종 무열왕]] ~ [[경순왕]]이다. 현대에는 좀 더 세분화해 여섯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실 신화 시절을 포함하여 [[사로국]]으로 존속한 기간이 불분명하기는 하고 국가로 인정하기에는 미흡한 점들이 있기 때문에 신라의 역사를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고구려]]보다 국가 체제 발전이 늦었던 신라가 더 먼저 건국 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는 한국 고대 사학계의 쟁점 중 하나인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676년 이후의 신라를 [[통일신라]]로 부르는 문제에 있어서도 논란이 있다. '통일 신라'''시대''''라는 용어는 [[발해]]까지 아울러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는 쪽으로 현대에는 대체가 된 편인데, 그럼 남북국 두 나라 중 남국인 신라를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하면 이 쪽은 지금도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것도 부적절한 호칭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딱히 자리잡은 대체 용어는 없고 학자에 따라 대 신라, 후기 신라 등의 이름으로 676년 이전(삼국 중 1개국으로서의 신라)과 구분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고려]]의 존속 기간인 474년과 [[조선]]의 존속 기간인 518년을 더하면 992가 나오는데 이는 [[고려]]와 [[조선]]의 전신인 신라의 존속 기간인 992년과 같은 기간이다. 고려와 조선이 당대 중국 왕조들보다 2배 가량 더 존속한 장수 왕조들임을 감안하면 신라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나라를 영위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 [[신라/왕사|왕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신라/왕사)] === [[신라/역대 왕비|왕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신라/역대 왕비)] === 왕실 === | '''{{{+1 《삼국사기》에 의거한 신라 왕실의 성씨 변화}}}''' | '''회차''' || '''성씨''' || '''재위기간''' || '''누적기간''' || || - ||[[박씨]](제1대 [[박혁거세]]~제3대 [[유리 이사금|유리왕]])|| 114년 || 114년 || || 1 ||[[석씨]](제4대 [[탈해왕]])|| 23년 || 137년 || || 2 ||박씨(제5대 [[파사왕]]~제8대 [[아달라왕]])|| 104년 || 241년 || || 3 ||석씨(제9대 [[벌휴왕]]~제12대 [[첨해왕]])|| 77년 || 318년 || || 4 ||[[김씨]](제13대 [[미추왕]])|| 22년 || 340년 || || 5 ||석씨(제14대 [[유례왕]]~제16대 [[흘해왕]])|| 72년 || 412년 || || 6 ||김씨(제17대 [[내물왕]]~제52대 [[효공왕]])|| 556년 || 968년 || || 7 ||박씨(제53대 [[신덕왕]]~제55대 [[경애왕]])|| 15년 || 983년 || || 8 ||김씨(제56대 [[경순왕]])|| 8년 || 992년 || 신라는 [[박씨]], [[석씨]], [[김씨]] 세 성씨가 여러 번 번갈아가며 왕위를 이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방식은 [[한국사]]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서 찾아봐도 비슷한 경우가 거의 없는 특수한 방식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어떻게 박, 석, 김이라는 성씨가 다른 왕이 번갈아 왕위에 오르는게 가능한가. 또한, 왜 그 어떤 나라의 역사적 사료에서도 신라의 특이한 3성 정치 체제와 역성 혁명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는가. 사실 신라 초창기에는 성씨를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김알지의 후손이라 전하는 김(金)씨 [[진흥왕]](540~576년) 때부터 중국과의 교류를 위해 본격적으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신라 내에 있던 3개의 다른 집단인 박혁거세 후손, 석탈해 집단, 김알지 집단이 이때부터 성씨를 '''소급'''하였기 때문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성씨가 3개가 있는 것처럼 뒤죽박죽 마치 성이 바뀌듯 나오게 된다. 다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의 초반부는 불완전한 고대 기록을 모으는 과정에서 신화적인 대목이 많고, 초기 왕들의 지나치게 긴 수명 등 연도에 오류가 너무 많아[* 《삼국사기》 기록상 초기 왕들의 수명이 인간의 평균수명을 감안할 때 지나치게 긴 것은 [[고구려]]나 [[백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하다.] 진흥왕 이전의 박씨, 석씨 왕의 통치기간에 대한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신라 왕실은 대부분의 기간을 김씨 왕들이 통치하였지만 그들 모두 시조인 박혁거세를 참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군주는 김알지의 후손인 김씨 집단이 992년의 대부분 기간인 586년을 지배했지만, 모시는 시조는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였다. 중국이나 외국 사료에서 박혁거세 시조를 참배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외부, 그리고 머나먼 후손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내막을 알지 못하고 그냥 왕의 성씨가 김(金)씨여서 김씨 왕조가 세운 왕조인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신라가 성씨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시점이 김씨가 왕으로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그 이전의 왕들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신라 말기에 신라가 기울면서 처남이었던 박씨 왕조가 728년 만에 잠깐 다시 부활하나 견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다시 김부가 왕으로 등극하나 얼마 안가 고려의 왕건에 항복하고 신라는 992년만에 멸망하게 된다. 앞서 서술한 대로 신라 왕실의 군주가 된 석탈해·김알지 혈통은 석탈해 신당이나 김알지 신당을 시조 사당으로 참배하지 않고 박혁거세를 자신들의 시조로 숭배하였다. 일례로, 제14대 유례왕은 석탈해 혈통이지만,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그는 박혁거세 신당을 자기 시조의 사당으로 참배했다. 또 제18대 실성 이사금, 제19대 눌지 마립간, 제20대 자비 마립간, 제40대 애장왕, 제41대 헌덕왕, 제42대 흥덕왕 등은 김알지 혈통이지만 신라본기에 따르면 그들 모두 박혁거세 신당을 자신들의 시조로 참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석탈해·김알지 혈통이 비록 성은 다르지만 자신들을 박씨 왕실의 일원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박·석·김의 세 혈통 모두 박혁거세를 자신의 시조로 같이 모셨다고 볼 수 있다. 김씨가 왕위를 500년 이상 독점할 때에도 박혁거세 시조 참배는 계속 되었으며, 이러한 시조 박혁거세에 대한 신성함이 후대에 박씨 왕조가 잠깐이나마 다시 부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커다란 가문 내에서 작은 가문들이 독자성을 유지하는 모습은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데 성씨 제도, 즉 성과 씨의 제도에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원래 '''성'''(姓)은 혈족(血族)을 나타내는 보다 위의 개념이었고, '''씨'''(氏)는 그 성(姓)의 계통을 표시하는 개념이었다. 즉, 신라에 적용을 해보면 성(姓)은 신라 왕실이 공동시조로 모셨던 박혁거세의 박(朴), 씨(氏)는 성(姓)의 하위 개념인 석(昔), 김(金)이 된다. 따라서 신라 왕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朴) 왕실이었고 역성 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김씨가 통치했던 시기에도 박혁거세를 공동시조로 같이 받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姓)과 씨(氏)의 구분은 원래 중국에도 있었지만 [[진나라]], [[한나라]] 대에 이르러 없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통합된 성씨를 사용하고 있는 우리들이 신라시대를 보면 마치 박, 석, 김의 서로 다른 성씨가 왕위를 쟁탈하는 전쟁터, 역성혁명인 것처럼 비춰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성과 씨가 현재와 같이 통합되지 않은 다른 개념이었고[* 姓이 氏보다 더 위의 개념] 다른 어떤 나라의 사료에서도 신라 왕실의 성이 바뀌는 것을 역성혁명처럼 보는 기록이 전무한 것을 고려해보면 신라가 건국된 박혁거세 때부터 멸망했던 경순왕 때까지 약 991년간 역성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들 모두가 박혁거세를 공동시조로 모시면서 '''같이'''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약하면 박혁거세를 시조로 모시는 박(朴)이라는 성(姓)을 가진 왕실 안에 박(朴)씨 외에 석(昔)·김(金)의 분파가 용인됐던 것이었고, 이 3개의 분파 중에서 김(金)씨가 왕위를 가장 오랫동안 많이 차지해 후손들이 많이 번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가야가 멸망한 후 김해 김씨 왕족들은 모두 신라로 흡수, 합병, 통합되었는데 이때부터 김씨들의 장기집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박씨 집단은 신라 초기에 알영·박혁거세 부부의 여성 후손을 왕비족으로 묶고, 이 왕비족과 결혼해야만 왕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다른 성씨 집단의 경우에도 박씨의 여성 후손과 결혼하면 왕위를 이을 수 있게 만들었다. 따라서 석·김 혈통의 남성이 왕이 된다 해도 박씨 왕실은 '이 왕실은 여전히 우리 것'이라는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왕비들의 혈통으로만 본다면, 박씨 왕실은 992년 동안 지속적으로 배출이 됐기 때문이다. 이랬기 때문에 석·김 혈통이 왕이 된 시절에도 박씨들은 계속해서 영향력을 지키고 왕족의 위상을 유지하며, 나중에는 728년 만에 왕권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왕릉 === [include(틀:신라왕릉)] [include(틀:신라의 고총 고분군)] == [[신라/인물|신라의 인물들]] == [[신라/인물]] 문서로. == [[신라/문화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신라/문화재)] == [[신라부흥운동]]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신라부흥운동)] == [[/역사귀속과 계승인식|역사귀속과 계승의식]] == [[신라/역사귀속과 계승인식]] 문서로. == [[신라/창작물|신라를 소재로 한 작품]]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신라/창작물)] == 기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8px-Seal_of_Silla.png|width=100]]}}}|| ||<:>신라 청동 도장의 인장[[http://www.heritage.go.kr/heri/html/HtmlPage.do?pg=/inj/injang_sub01.jsp&pageNo=4_3_1_1|관련 내용]]|| == 같이 보기 == * [[가야]] * [[경상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경주시]] * [[경주시/문화]] * [[경주시/역사]] * [[계림]] * [[계림대도독부]] * [[고구려]] * [[고려]] * [[골품제]] * [[국립경주박물관]] * [[국선]] * [[금입택]] * [[금척]] * [[나당전쟁]] * [[남북국시대]] * [[녹읍]] * [[발해]] * [[백제]] * [[보덕국]] - 신라가 [[익산시]]에 세운 괴뢰국. * [[사로국]] * [[삼국시대]] * [[삼국통일]] * [[삼국통일전쟁]] * [[삼기팔괴]] * [[상수리 제도]] * [[시중]] * [[신궁]] * [[신라구]] * [[신라/왕사]] * [[신라왕릉]] * [[신라/인물]] * [[신라삼보]] * [[신라사선]] * [[신라삼최]] * [[신라십성]] * [[추존#s-1.1.1|신라/추존왕]] * [[신라토기]] * [[신라/후삼국시대]] * [[신사#s-6.1|신사]] * [[우산국]] - 이사부가 정벌한 국가. * [[신라-우산국 전투]] * [[원화(신라)]] * [[장안국]] - [[김헌창의 난]] 때 세운 국가. * [[진한]] * [[처용가]] * [[탐라국]] * [[태봉]] * [[통일신라]] * [[풍월주]] * [[화랑]] * [[낭도]] * [[화백회의]] * [[후백제]] * [[후삼국시대]] *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 [[통일신라]] === * [[만파식적]] * [[민정문서]] * [[신라구]] * [[신라방]] * [[청해진]] * [[한국의 오악]] : [[삼국사기]]에 신라가 [[제사]]를 지냈던 오악이 기록되어 있다. * [[후삼국시대]] [각주] [[분류:신라]]